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해방 이후 80년대 5공화국까지 독재정권은 정권 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많은 작가와 시인들을 고문하고 구속했다. 국제인권법을 강의하는 채형복 경북대 교수가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한국문학 필화사건들의 전모와 진실을 본격적으로 밝힌다. .[편집자] |
3. 법적 쟁점과 판단
검찰이 <분지>의 작가 남정현을 기소하면서 적용한 법률 규정은 반공법 제4조, 제16조와 국가보안법 제11조, 형법 제57조 등이다. 이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의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및 자격정지에 처한다”는 반공법 제4조 1항이다. 이에 의거하여 검찰은 소설 <분지>를 ‘반미·용공작품’으로 보고, 작가 남정현을 기소하였다. 검찰은 공소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기소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 대한민국이 마치 미국의 식민통치에 예속되어 주한 미국들은 갖은 학살과 난행 등을 자행하고, 우리 국민의 생명 재산을 무한히 위협하며 몇몇 고관 예속자본가들과 결탁하여 국민 대중을 착취하여 비천한 피해 대중은 참담한 기아선상에서 연명만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극심한 것을 말할 자유도 없는 이 나라에서는 이런 민중을 버리고 오직 자본가, 정치자금 제공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입법․행정을 하고 있으며, 국민 대중들은 물론 국회의원마저 미국에 아부 예속되고, 약탈의 수단인 원조로써 경제의 명맥을 틀어쥐고 미국의 예속 식민지, 군사기지로써 약탈과 착취,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자들은 미국의 가공할 강압과 보복을 받으면서도 굴복과 사멸함이 없이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다는 양, 남한의 현실을 왜곡 허위선전하며 빈민대중에게 계급 및 반정부의식을 부식 조장하고, 북괴 6.25 남침을 은폐하고 군복무를 모독하여 방공의식을 해이케 하는 동시에 반미감정을 조성 격화시켜 반미사상을 고취하여 한미유대를 이간함을 표현하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단편소설 『분지』라는 제목의 작품을 창작하여 1965년 2월 20일경 <현대문학>사에서 동사 기자 김수명에게 창작 원고를 수교하여 월간잡지 3월호 <현대문학>지에 게재하여 북괴의 대남 적화전략의 상투적 활동에 동조한 것이다.”
남정현에 대한 반공법위반사건 재판은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첫 공판이 열린 이후 판결 선고 때까지 8회에 걸쳐 공판이 계속 되었으며, 김두현, 이항녕, 한승헌 등 세 명의 변호사와 남정현 등단 시 추천한 작가 안수길이 특별변호인으로 허가받아 피고인 남정현을 변호하였다. 변호인 가운데 이항녕은 이 사건의 경험과 도스도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모티브로 소설 <최후진술>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검찰측 증인으로 여러 명의 전향자와 간첩, 그리고 피고인측 증인으로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증언하였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를 반증하듯 공판 때마다 많은 문인과 학자는 물론 일반인들이 방청석을 가득 매웠다.
법원은 변호인의 변소를 모두 배척하고, 남정현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그 판결 이유로, 소설 <분지>에서 문제가 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분지>가 남한의 현실을 왜곡 허위선전하며 빈민대중에게 계급의식과 반정부 의식을 조장하고 반미감정을 격화시켜 반미사상을 고취할 요소가 있는 작품으로 북한의 대남적화전략의 상투적 활동에 동조한 것을 들었다. 법원의 판결 이유는 검사가 남정현을 기소한 사유와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변호인은 피고 남정현이 <분지>를 집필함에 반국가단체에 동조한다는 하등의 혐의가 없으므로 피고의 행위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법원도 남정현이 작품을 집필함에 있어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호응하고 가세할 적극적 의사나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작품 <분지>를 보면 제목, 줄거리, 표현 등이 반미·반정부적 감정과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요소가 다분하므로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둘째, 변호인은, 작품에 나타난 정도의 표현은 자유국가에서 예술의 자유의 범위에 속할 뿐 아니라 사회 상규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분단 상황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읽히는 잡지에 이 작품을 게재했으므로 표현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법원이 남정현에게 내린 선고유예란 범죄의 정황이 가벼운 범죄인에 대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형의 선고를 유예하고, 그 유예기간을 특정한 사고 없이 경과하면 면소(免訴)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를 말한다(형법 제59조). 다시 말하여, 유죄는 인정되지만, 죄의 선고를 일정 기간 동안 유예한다는 뜻이다.
이 일심판결에 대해 무죄를 주장한 피고인측은 즉각 항소를 제기하였고, 뒤이어 검사도 일심의 형이 가볍다는 이유로 항소했다. 하지만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부는 피고인과 검사 측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해 모두 ‘이유 없다’며 배척하고 아래와 같은 사유로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첫째, 피고인은 항소이유로, 소설 <분지>는 저항문학·고발문학의 하나로 반공법 제4조의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다소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것이라 할지라도 피고의 고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심이 조사한 증거들을 살펴봤을 때 피고의 범죄사실이 인정되므로 이유 없어 받아들일 수 없다.
둘째, 검사측의 양형(量刑)과 관련한 항소 이유에 대하여, 양형의 기준을 살펴봤을 때 원심이 피고 남정현에 대해 선고한 형량은 타당하므로 더 엄한 형량을 주어야 할 하등의 자료를 발견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법원은 원심판결이 정당하고 검사와 피고인의 항소는 이유 없음이 명백하므로 각각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