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와 패배주의 역사관 청산을 위하여 (5)

1. ‘청일전쟁’에 가려진 일본의 조선 침략

청일전쟁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본이 묘하다. 조선의 운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인데, 남의 나라 일처럼 들리니 말이다. 지난 2005년 요시오카 전 일본공산당 의원이 일본 국회헌정자료관 ‘일청전쟁 선전조칙 초안’을 분석한 결과, 1894년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검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청과 조선이 함께 명기된 초안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요시오카는 “조선이 제3·4초안에서 선전포고 대상으로 포함돼 있다가, 제5초안에서 빠진 이유는 일본이 사주한 친일쿠데타가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친일쿠데타’는 왜곡이다. 조선침략을 친일쿠데타라고 하면 안 된다. 선전포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조선을 무시했던 일본! 저들의 조선 침략을 친일쿠데타라고 우기는 뻔뻔성이 놀라울 뿐이다. 1894년 일본은 청을 침략하기 전에 이미 조선을 침략, 조선 정부를 장악했다.

▲ 청일전쟁 당시 일본 보병의 사격 장면.

2. 일본의 1894년 조선 침략 과정

1894년 6월1일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조선 정부는 청에 군대를 요청하였고 청은 2460여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6월8일 조선과 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거의 빛의 속도로 (사전에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속도), 약 4500명의 일본군대가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6월11일 정부군과 농민군의 전주성 화의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에 철병을 요구하였지만, 일본은 철병은커녕 6월22일 추가 병력을 파견하였다. 7월3일부터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는 철병 요구를 거부하면서,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끈질긴 강요로 7월10일 서울 남산 노인정에서 일본 공사와 회담하였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는 겉으로는 ‘일본의 자위를 위해 조선 내정의 개혁을 촉구하여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밖에 없다’고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처할 전략적 시설을 확보하고 불평등 조약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본원적 축적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아예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당연히 회담은 결렬되었고, 일본은 내정개혁이 실시되지 않는 한 철수할 수 없다며,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라고 최후통첩을 하였다. 곧이어 인천에 주둔하던 일본침략군 혼성여단 주력부대를 서울에 난입시키고, 남산의 왜성대에 6문의 포대를 설치하였다. 군대로 서울을 강점한 일본 침략자들은 7월23일 새벽 일본침략군 11연대 1대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 국왕 고종과 왕비를 감금한 후 침략책동을 노골화하였다. 조선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친일내각을 수립하였다. 청일전쟁이 발발은 7월25일이지만, 일본의 조선 침략전쟁은 그보다 앞서 6월8일 일본군이 제물포에 상륙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은 7월25일 천안의 성환 전투, 다음날 아산만 앞바다 풍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청나라와의 전쟁을 강행하면서, 김홍집 내각을 내세워 갑오개혁을 실시한다. 갑오개혁은 몇 가지 개혁정책으로 포장했지만 ‘개국 연호’가 핵심이었다. 청나라와 대등하다는 정치선언이었던 셈이다. 평양 출정을 앞둔 8월20일 조선의 독립과 내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철도, 전신, 개항장 등 경제적 이권을 일본에게 양여하도록 한 ‘조일 잠정 합동 조관’을 체결했다.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는 명분을 쌓고 철도, 전신, 개항장과 같은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었다. 이어 8월26일 ‘조일맹약’을 체결했다. 일본과 조선이 공수동맹을 맺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조선 정부가 원조한다는 대청 군사동맹이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만 자국에서 가져왔을 뿐 ‘조일맹약'을 내세워 식량, 부식물, 물자수송 노동력 대부분을 현지에서 수탈했다.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청일전쟁을 벌이면서도 일본이 집중했던 것은 동학을 필두로 한 조선 민중의 반외세 투쟁 압살이었다. 정부를 휘여 잡고 조선 정부를 길잡이로 하여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을 짓누르고 청나라를 밀어내 조선을 일본의 독점적 식민지로 만들어 갔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청일전쟁을 일본과 청의 조선 주도권을 둘러싼 힘겨루기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또 동학농민전쟁 압살을 일본이 자행한 조선 침략책동의 일환이라기보다는 조선 정부가 일본을 끌어들여 농민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일본의 조선침략이라는 총체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3.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근본원인

당시의 국제정세를 잠깐 살펴보자. 영국은 제정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찾고 있었다. 영국은 청일전쟁 개시 2주일 전인 1894년 7월16일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개정했는데, 이는 사실상 일본의 침략전쟁 승인을 의미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침략 기도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침략 기회만 노리고 있는 단계였다. 미국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겉으로는 중립을 취한다고 떠들었지만 일본의 침략을 적극 조장, 사주한 것은 사실 미국이었다.

미국은 ‘셔먼’호 사건에 이어 1876년 조선에 대한 전면적 무력침공마저 무색해지자, 직접 조선을 침략하기보다는 일본을 뒤에서 조정해 자기네 이권을 최대화하는 정책으로 바꾼다.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미국은 조선이 제3자로부터 위험에 처하면 ‘우호적 노력’을 할 것을 약속해주고 수많은 이권을 따낸 바 있다. 고종은 이를 믿고 1894년 6월과 7월, 4차례에 걸쳐 탄원서를 보내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리석은 짓이었다. 미 국무장관 그레셤은 일본이 불의한 전쟁을 수행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선언했지만, 바로 그날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다는 뜻을 일본에게 전달한다. 또 미국은 일본의 동학농민군 학살을 극구 찬양한다. 미국 신문 <리스 바그>는 ‘겨우 4개월간의 원정에서 일본군은 조선의 전 영토를 소탕하였다. 일본군의 동작은 민첩하며 과감한 기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이미 동양의 미래를 좌우한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라며 일제의 군사행동을 찬양 고무하였다. 우리는 미국이 중립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일본을 지지했던 정도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그 정도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침략의 돌격대로 사용했으며 주범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노골적인 일본 편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미국은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무력간섭을 감행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무력침략을 부추긴다. 1894년 6월5일 미국은 ‘발티모어’호를 비롯한 군함 6척을 조선 연해에 침입시켜 농민군의 군사행동을 위협하였으며 뒤이어 ‘거류민 보호’란 구실 밑에 해병대를 불법적으로 서울에 침입시켰다. ‘조선에 있는 일본인이 현재 서울에 5000명, 제물포에 4000명, 원산에 약 1만명이라는 사실…’ 또 ‘갑신정변에서 60명, 임오군란에서 40명 이상을 잃었다’며 일본의 조선침략은 ’거류민과 공사관 보호를 위한 정당한 조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둘째로 미국은 말로만 일본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수많은 전쟁물자를 공급했다. 북양대신 이홍장이 건립한 북양함대는 청일전쟁 직전, 78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배수량을 모두 합치면 8만3900톤으로 세계 8위의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청-프랑스 전쟁에서 남양함대가 거의 전멸한 후 이홍장은 자기 실권을 늘릴 겸 북양함대에 엄청난 투자를 해 강력한 군함들을 보유하였다. 일본이 북양함대를 자체의 힘만으로 격파하는 것은 무리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세계가 놀랐고, 메이지유신의 위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미국이 거대 군함으로 돕지 않았다면 실제 청일전쟁의 주요 해전에서 일본의 승리는 어려웠다. 1894년 8~9월 사이에 1500~3000톤급 군함들을 넘기고, 10월에는 또다시 1만톤급 군함 6척을 넘겨주었다.

셋째, 미국은 시모노세키 강화회담에서 일본이 최대한 유리하게 조약을 맺도록 적극 조정하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종결돼 가고 있던 1894년 11월 미국 대통령은 교전쌍방에 ‘평화중재’를 제기하는 한편, 일본의 더 활발한 마지막 공격을 부추겨 일본이 유리한 환경에서 강화 담판을 진행할 수 있게 하였다. 친일 입장이던 데니슨을 일본 전권대표의 고문으로, 역시 친일분자인 전 미 국무장관 포스터를 청나라 전권대표 리홍장의 ‘개인고문’으로 파견하여 담판을 일본에 유리하게 조종하였다. 포스터는 리홍장에게 “만일 전쟁이 다시 일어나 충돌이 연장되면 만청 정부의 통치 및 청제국의 자주권은 극히 위험하게 될 것”이라면서 일본이 제기한 강화조건을 다 접수하도록 위협했다.

이 정도면 일본의 조선 침략은 처음부터 미국의 침략공작으로 발생한 사건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871년 조-미전쟁(신미양요)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난 미국은 그 뒤 일본을 아시아 침략의 돌격대로 내세운 것이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핵심적 이익은 중국시장이었다. 청일전쟁 기간이었던 1895년 6월8일 미 국무부가 주중국 미국공사에게 보낸 지침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전쟁의 결과로 본국은 조선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평등하고 자유로운 무역상의 이득을 기대한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훨씬 더 노골적이고 전면적이었다(이는 다음에 다룬다). 우리는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당시 조선 지배계급의 무능과 내부 암투 때문으로 알고 있다. 이는 안일한 인식이다. 당시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한 제국주의가 일본의 조선 강점을 자기네 이해와 완전 일치시키고 있음에도, 조선은 이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부족했다. 무엇을 각오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 한반도 분단의 차가운 냉풍을 뚫고 평창에서 연일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트럼프와 아베의 초조한 얼굴을 보라! 마지막까지 무슨 짓을 할는지…. 미국이 망하는 순간까지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온갖 광란을 일으길 무리들…. 우리는 엄중히 상황을 주시하며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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