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억압받는 자들의 직접정치는 계속될 것이다

2018년을 맞아 진보진영 주요 부문의 2017년 회고와 새해 전망을 연재한다.

촛불항쟁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2017년을 넘어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을 실현하고, 첨예한 북미 대치 속에서 남북관계를 풀어나가야 하는 2018년이다. 진보진영의 새해 진단과 구상을 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노동, 농민, 빈민, 청년, 여성, 시민, 통일 등 분야에서 활동하는 주요 인사들이 글을 보내주셨다. 게재순서는 무순이다. 바쁜 가운데 글을 보내준 분들께 감사드린다.[편집자] 

▲ 2016년 10월17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이화여대 이삼봉홀 앞에서 최순실 딸 정유라 학생의 부정입학 및 특혜에 항의해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팻말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 : 뉴시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는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말은 옳았다. 
학원의 신자유주의 시장화에 반대하며 시작된 이화여대생들의 투쟁은 정유라 부정입학 문제를 계기로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의 촉매제 역할을 하며 광장의 촛불을 횃불로 만들었다. 박근혜 국정농단의 축소판과 같았던 이화여대의 오래된 적폐를 청산한 것은 부정과 불의를 용납하지 않은 이대생들의 끈질긴 투쟁이었다. 이대생들은 우리사회에 만연한 부정과 비리, 부조리와 모순을 깨뜨리며 사회 전체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이 투쟁은 학내 자치기구인 총학생회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졌고 승리를 이루어냈다. 촛불혁명이 열어놓은 ‘포스트 87체제’, 직접민주주의의 정신을 이대생들은 선구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대한민국 여성주의 학문을 탐구하는 이화여대생들이 주체적으로 열어놓은 ‘다시 만날 세계’는 더 나은 평등과 민주로 가는 길목임은 자명하다. 
이들의 투쟁으로부터 페미니즘의 열풍이 일어난 대한민국의 2017년 ‘허스토리’를 짚어본다. 

- ‘중요한 것은 다시 온다’ 페미니즘 리부트
2017년 대한민국은 새로운 페미니즘 사상과 운동으로 무장한 영페미들의 등장과 금기와 억압의 상징이었던 낙태 및 퀴어 등 젠더이슈들이 사회 전면에 드러나며 급진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한 해였다. 

* 생리대 안전성 논란과 여성들의 건강권 투쟁
소비자들의 부작용 집단제보로 촉발된 일회용 생리대의 안전성 논란은 여성들의 안전한 생리대 및 여성 건강권에 대한 국가적 책임과 젠더 관점의 통합적 건강정책에 대한 요구로 발전했다. 정의당은 민관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생리대 안전성 역학조사를 요구했고 여성-엄마민중당은 ‘국가가 책임지는 여성건강기본법 발안운동’을 제안하며 생리대 및 여성건강에 대한 공공성 강화와 생리공결제 및 생리휴가의 제도적 보장 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지난해 12월20일 여성-엄마 민중당이 국회에서 "여성건강기본법 제정운동" 입법 토론회를 열고 있다.

* 여성 몸에 가해지는 국가폭력에 맞선 저항 – 낙태죄 폐지 투쟁
여성들은 자기 몸과 삶에 대한 주체적 결정권을 침해하는 낙태죄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다. 그 결과 청와대 홈페이지에 제안된 낙태죄 폐지 청원이 20만 명을 넘어 정부와 헌재는 임신중절 합법화 논의와 제도 손질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여성계는 낙태죄는 남성중심 국가권력에 의한 여성 시민권의 박탈이자 평등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낙태가 범죄로 취급되는 사회에 지속적인 경고를 날리고 있다. 

▲ 2017년 9월 28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가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발족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Me Too 운동과 성폭력 드러내기
미국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Me Too’ 캠페인에 참여해 성범죄 사실을 당당히 알린 여성들을 가리키는 ‘침묵을 깬 사람들’을 선정했다. 미국에서는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등 헐리우드 유명인을 중심으로 Me Too 운동이 전개되었다면 국내에서는 한샘의 신입사원, 현대카드의 위촉계약직사원 등 우리사회의 가장 약자에 속한 여성들이 시작하였다. 그동안 성폭력이 평생 혼자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숨겨야 할 사건’이었지만 지금 여성들은 ‘나도 당했다’며 피해자로서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성폭력 드러내기를 통해 여성들은 위로와 공감의 손길을 내밀고 ‘함께 싸워서 바꾸자’는 저항의 몸짓을 공유하고 있다. 
10여 년간 신입간호사에게 30여만 원 급여를 준 서울대병원, 간호사들에게 걸그룹 댄스를 강요한 성심병원 등에서 해묵은 직장내 성차별 문화를 바꾸려고 여성들이 용기어린 증언과 투쟁을 이어갔다.

▲ 지난해 11월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간호사들이 선정적인 장기자랑을 강요받았다는 논란은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 우리에겐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운동은 서울에 있는 한 초등학교 교사를 응원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여성혐오와 폭력으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교육현장에서부터 성평등교육, 성인권교육을 실현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 성평등 개헌과 퀴어운동
87년 이후 30년 만에 열린 개헌정국에서 여성들은 기존의 ‘양성평등’이 아니라 ‘성평등’ 개헌을 주장하며 사회적 공론장을 만들고 개헌에 주도적으로 임했다. 현재 성차별 문제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오는 차별을 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성평등’은 남성과 여성의 동등권을 넘어 구조화된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고 인권의 확장을 열어가는 철학과 비전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여성계의 주장은 보수개신교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문재인 정부는 이들과 타협해 성평등 개헌은 좌초될 상황에 놓여있다.  
성평등 개헌 흐름의 배경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개최된 퀴어축제, 군대내 동성애 처벌조항 폐기운동,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등 우리사회 금기에 도전하는 용감한 투쟁이 있었다. 퀴어운동은 성소수자의 인권 및 법적, 제도적 차별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임을 확산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 열풍은 페미니즘이 더 이상 여성들만의 사상이 아닌 우리사회 전체의 평등과 민주주의를 위한 사상과 운동임을 증명했다. 지금 여성들은 ‘더 이상 차별과 폭력에 침묵하지 않겠다.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외치며 개인적인 것의 정치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은 촛불의 요구인 적폐청산에서 우리사회의 가장 오래된 억압인 성(별)억압을 청산하고 촛불혁명을 완성해나가고자 하는 직접정치의 주역들이며 더 나은 세계를 열어가는 선구자들이다. 

▲ 2017년 다양한 성평등 개헌 토론회가 열렸다.

- 2018년, 가장 억압받는 자들의 직접정치는 계속될 것이다.

새해벽두부터 박근혜 정부시절 12.28 한일 '위안부'합의가 졸속이고 매국적 합의였음이 정부 보고를 통해 드러났다. 그런 만큼 당연히 합의파기로 갈 것이라는 예상을 엎고 현 정부는 파기는 하지 않고 무효화 수순으로 가겠다는 어정쩡한 입장을 내놓았다. 
국가 간의 합의와 절차를 쉽게 파기할 수 없다는 명분이 여성에게 가해진 참혹한 폭력에 대한 역사적 청산보다 더 중요하다는 논리는 늘 반복되어 왔다. ‘국가적 과업(큰 일)보다 여성인권(사소한 일)이 먼저일 수 없다’는 가부장제적 국가는 여전히 우리들 옆에 존재한다. 그 국가에서 ‘마스크 쓴 괴한이 20대 여성을 화장실까지 쫒아가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은 익숙한 일상이다.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혁명에는 늘 강력한 ‘백래시(backlash. 반발/편집자)’가 있어왔다. 가부장제적 억압에 대한 여성들의 반격은 지속적이며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또한 그만큼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보수개신교세력은 종북세력의 현재적 재현의 하나로 ‘종북게이’라 칭하며, 성소수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공격하며 이 반격에 힘을 더하고 있다. 민중의 정치적 진출이 강해질수록 보수개신교세력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강화될 것이며, 자기세력 강화를 위해 특정세력을 적대시하는 정책도 강력하게 일어날 것이다. 성평등개헌이 좌초되는 것을 보면 보수개신교세력의 전략이 일시적으로 강력한 정치력을 획득한 듯 보인다.  
촛불혁명이 열어놓은 민중의 직접정치 열망과 재기를 노리는 보수개신교세력의 종북+성소수자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 및 마녀사냥이 강력하게 충돌하는 한가운데에 2018년 페미니즘운동은 서 있다. 

* 누가 승리할 것인가
인간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넘어 평등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페미니즘 사상과 운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며 지향이라는 데서 그 승리는 이미 예견된 것이다. 2018년에도 평등과 평화를 향해가는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가슴 뛰는 투쟁은 찬란하게 피어날 것이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권력의 호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가장 억압받는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여성운동의 역사적 테제이다.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그 테제의 현재적 실천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촛불혁명이 열어놓은 민중의 직접정치시대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지상명령이다. 새로운 시대는 지금까지 민중의 역사에서 소외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소수자의 역사, 사회적 약자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2017년 이대생들의 투쟁이 권력의 지축을 흔들었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에 조용히 파열음을 내며 새 역사를 열어가고 있다.
미국의 유명 온라인 미리엄-웹스트가 2017년 '올해의 단어'로 페미니즘을 선정했듯이 페미니즘은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우리나라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대중적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2018년, 페미니즘 운동은 과거로의 회귀를 거부하고 현실의 억압을 깨뜨리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전진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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