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 모사데크, 호메이니, 이란-이라크 전쟁
1921년 군사반란으로 이란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 새로운 왕조(팔레비 왕조) 수립의 주역을 담당한 영국은 내정간섭을 더욱 심화했다.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세우는 등 자원수탈도 심해졌다. 1941년 8월에는 석유자원 강탈을 위해 연합군과 함께 이란을 침공하기도 했다.(255)
▲독재 왕정 수립과 모사데크 축출 : 모함메드 팔레비 시절인 1951년에 모사데크는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는 법무장관, 재무장관, 외무장관 등을 두루 거친 지식인이었다. 국가자본 형성과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그가 펼친 정책은 앵글로-이란 석유회사 국유화, 농지 공동경작 등 급진 개혁이었다. 영국은 바로 반발했다. 석유 수출이 봉쇄되었다. 팔레비 왕은 모사데크를 해임했다. 그러나 이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모사데크는 닷새 만에 총리에 복귀한다.
미국과 영국은 더 구체적인 작전이 필요했다. 일명 ‘아작스 작전’은 모사데크를 제거하기 위해 한때 나치였던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은 작전본부 역할을 했다. 모사데크 지지자들과 왕정파 사이에 유혈충돌이 발생했다. 수백 명의 시민이 자헤디 장군측에게 학살되었다. 결국 내전 위기에 직면하자 모사데크는 1953년 8월 자진 사퇴한다.
이후 석유산업 국유화는 전면 백지화되었다. 미국과 영국이 각각 40%씩 석유산업 지분을 차지했다. 1959년에는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란의 군 수뇌부는 “미국의 군사원조 덕분에 군이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시민들을 잘 제압할 수 있다”며 미국에 감사를 표했다.(256~258)
▲호메이니 혁명과 쿠데타 음모 : 미·영 제국의 충견 노릇을 한 팔레비 왕조는 1979년 2월 호메이니가 이끄는 민중혁명으로 붕괴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이란에서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미국은 민중혁명이 주변 국가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친미 쿠데타를 유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쿠데타 음모가 호메이니 혁명정부에 발각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란 대학생들은 미국대사관을 ‘이란 침탈을 위한 스파이 본부’로 규정하고 대사관을 점거했다.(258~259)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 적대정책 :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원하여 이란을 침공하도록 부추겼다. 표면적인 이유는 샤트 알아랍 수로의 영유권 분쟁이었지만 밑바탕에는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내분을 통해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미국의 의도가 자리했다. 군수품을 팔겠다는 군산복합체의 욕심도 주요했다. 1980년 9월부터 1988년 8월 종전까지 양국의 산업은 초토화되었다. 200~3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어느 지역은 미국이 지원해준 생화학무기 때문에 1만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미국의 대이란 적대정책은 전쟁선동뿐만 아니라 노골적 테러로도 나타났다. 1988년 7월3일 미 순양함 빈센스호는 이란 영해인 페르시아만 상공을 비행하던 이란 민항기를 향해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 어린이 66명을 포함하여 탑승객 290여 명이 전원 몰살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들끓자 미국은 민항기를 미그25기로 오인했다는 변명을 내놓았다. 망원경으로도 식별 가능한 미그기와 민항기를 최첨단 함정이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희생자 유족을 애도한다면서, 빈센스호 함장에게는 두 개의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과연 미국과 이란 중 어느 쪽이 테러 국가이며 악의 축인가?(259~261)
▲이란 핵 의혹의 진실 :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자칫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국제사회를 협박해왔다. 그러나 이란의 핵에너지 개발은 미국의 주도로 시작된 것이다. 다름 아니라 이란이 미국과 강력한 동맹이었을 때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권장한 것이다. 미국은 모사데크를 몰아내고 1957년 이란과 핵개발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1960년 5메가와트급 실험용 원자로 등을 제공했다. 1967년에는 5545킬로그램의 농축우라늄과 112킬로그램의 플루토늄도 제공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 소요 자재 수급, 경수로 재처리시설 공급 등 미국은 물심양면 이란의 핵 개발을 지원했다.
그러나 1979년 2월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은 모든 지원을 전면 중단했다. 부시는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했다. 침공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2006년 1월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란의 핵시설에 대한 무력침공을 준비한 것은 아니나, 그 가능성은 여러 의제 가운데 하나다”고 밝혔다. 물론 2007년 IAEA 보고서와 CIA의 정보평가보고서는 모두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아무튼 미국의 이러한 생떼는 이란을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제네바 협정(1994년) 불이행이 북한의 핵무기 제조를 초래했듯이, 미국의 대이란 정책도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261~265)
팔레스타인 : 뒤바뀐 다윗과 골리앗
필리스타인 또는 블레셋(팔레스타인의 옛 이름)이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4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민족보다 한두 세기 앞선 시기다. 두 민족의 적대관계는 구약성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11세기 히브리 민족의 왕 다윗이 팔레스타인의 무장 골리앗의 목을 베어 명성을 날린다. 이후 이 지역은 유다왕국으로 통합, 바빌로니아·그리스·로마제국의 지배 등 복잡한 역사를 거치면서 이슬람교와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의 성지가 뒤섞이게 된다.(266~267)
▲제국이 뿌린 비극의 씨앗 :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제1차 세계대전에 이용하려던 영국은 양쪽 모두에게 전후 독립국가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1915년 영국 외교관 맥마혼은, 아랍지역은 아랍인의 손에 넘겨준다고 서면 약속을 했다. 반면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발포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조국을 세우는 것을 돕겠다고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1947년 11월 서구 제국은 유엔총회의 결의를 통해 팔레스타인 땅을 절반으로 나누어 유대인 나라를 세우도록 지원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영토분쟁을 야기했다.(267~268)
▲테러국가 이스라엘 :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예방 차원의 선제공격이라는 구실로 팔레스타인을 불법 침공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스라엘이 자행한 국가테러를 몇 가지 추려본다.
- 1946년 7월,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무장테러단 일군(Irgun)은 다윗 호텔을 폭파하여 팔레스타인 투숙객 등 91명을 죽였다.
- 1948년 4월, 베긴은 민간인 주거지역을 급습하여 250여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학살했다. 이 테러에 참가한 한 이스라엘 여성은 민간인 학살에 사용한 피 묻은 칼을 훈장처럼 흔들며 자랑했다.
- 사건 발생 반년 뒤 유엔은 스웨덴과 프랑스 출신 외교관을 현장에 파견한다. 하지만 도착 다음날 괴한들에게 살해되었다. 40년이 지나 TV에서 요슈아와 메쉬람은 자신들이 외교관을 죽였다고 당당히 털어놓았다. 이들은 베긴이 지휘하는 스턴무장단 소속이었다.
- 테러집단의 두목인 메나헴 베긴은 후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이스라엘 수상까지 지낸다.
이러한 테러 행위는 이스라엘 국가 수립 이후 더욱 노골적인 행태를 보인다. 이스라엘은 당초 유엔이 제시한 영토 분할선을 무시한 채 팔레스타인 거주지역 대부분을 강점했다.
- 1953년 10월, 훗날 수상이 된 이리엘 샤론은 특공대를 이끌고 퀴비아 마을을 급습하여 민간인 60~70명을 학살했다.
- 1956년 10월, 이집트가 수에즈운하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불법 점령했다.
- 1967년 6월, 아랍의 선제공격을 핑계로 요르단강 서안, 가자 지구, 동 예루살렘 등 유엔에 의해 팔레스타인 영토로 지정된 전역을 강점했다. 시리아의 영토인 골란고원과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그리고 요르단도 불법 침공했다.
- 1973년 2월, 이스라엘 전투기는 리비아 민항기를 격추시켜 100명 이상의 탑승객과 승무원을 죽였다.
이밖에도 2002년에는 전투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웨스트뱅크 북쪽 제닌의 난민촌을 습격하여 1000여 명의 난민을 학살했다. 학살한 뒤에는 불도저를 동원하여 난민촌을 폐허로 만들었는데, 이때 미쳐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노약자들을 건물 잔해와 함께 생매장했다. 이처럼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터를 빼앗고, 자기 부모 형제까지 도륙한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국가테러에 저항해 기꺼이 제 한 목숨을 내놓은 팔레스타인 해방전사들의 자폭공격을 과연 비열한 테러리즘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268~271)
▲이스라엘 국가테러의 배후 : 부시 대통령은 민간인 학살의 원흉인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수상을 평화의 수호자라고 극찬했다. 미국에게 이스라엘은 중동·아프리카 지역을 총괄하는 사령부와 같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가장 많은 경제·군사 원조를 하고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을 거부한 이스라엘을 세계 6위의 핵무기 보유국으로 만든 배후도 바로 미국이다. 헨리 키신저, 제임스 슐레진저, 올브라이트 등 미국의 정·재계 파워엘리트 상당수가 유대계라는 사실도 미국과 이스라엘을 끈끈하게 하는 주요인이다.(2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