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최근 드러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적폐를 “법원 내부의 문제”로 선을 긋고 “법원이 해결해야 된다”며 사실상 검찰 수사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문제만 봐도 사법적폐는 법원 내부문제가 아니다.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의 극히 제한된 조사만으로도 법관 사찰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담당 재판부 동향파악, 이를 통한 박근혜 적폐세력과의 결탁 의혹이 드러났다. 누가 봐도 법원 스스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게 명확하다.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의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관련 조사 결과는 사법적폐에 대해 검찰이든 특별검사든 강제조사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사 내용은 그간 정황으로만 나타났던 사법적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를 밝힌 중요 단서이다. 대법원장 직속인 법원행정처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판결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청와대와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고 이를 상고법원 설립에 이용하려 한 것은, 사법부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법원이 자신들의 이해 실현을 위해 판결을 담보로 정권과 뒷거래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법을 수호해야 할 법관들과 악질적 정상배들의 행태에 별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나아가 삼권분립이라는 근대 민주주의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단지 법원 내부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그 파장을 직감했는지 “재판이 재판 외의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오해받을 만한 일은 어떤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오해의 소지’로 돌리려 하고, 대법관 13명도 집단으로 나서 “사실이 아니다”, “사법부 독립에 관한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보도한 언론에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대도 법원의 공식 기관과 청와대간 결탁 의혹이 담긴 문건을 가짜라고 볼 근거는 없다. 대법원장부터가 ‘오해’라고 선을 긋는 한, 이 문제가 정말 ‘오해’인지 아니면 드러난 문건이 ‘진실’인지를 법원 스스로 명명백백히 가려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외부의 강제수사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또 수구보수언론들은 추가조사위원회가 ‘법원 블랙리스트’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법원행정처의 임종헌 전 차장과 이종걸 기획조정실장이 일선 판사들의 ‘국제인권법연구회’나 ‘이판사판야단법석’ 같은 인터넷 카페 등에 대한 동향 파악과 대책을 지시하고, 이들 판사에 대해 ‘검은 점’을 찍어 관리해 온 것은 분명한 블랙리스트임을 보여준다. 또한 ‘각급 법원 주기적 점검 방안’이란 문건에서 “판사의 업무 외 영역에 대해서도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특히 ‘신뢰할 수 있는 거점법관’을 법원마다 두어 판사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수집 활동을 한 정황은 사법부가 사실상 전체주의적으로 전 법관을 감시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일선 판사들도 법원행정처가 ‘자정기능을 상실한 괴물’이 되어 스스로 “개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맞다”고까지 개탄하고 있다. 외부의 강제수사가 절실한 두 번째 이유이다.
사실 지금까지 드러난 사법부 적폐는 빙산의 일각이다. 법원행정처가 끝내 협조를 거부해 조사하지 못한 임 전 차장의 컴퓨터와 암호가 설정돼 열지 못한 파일 760개는 아직 무엇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300개의 파일은 임의로 삭제되었다. 증거인멸이다. 시간만 보내다가 남은 파일마저 언제 어떻게 삭제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후 구성할 후속대책기구에서 의논할 사항이라고 물러섰다. 온 국민이 시급히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마당에 사법부의 최고 수장이 국민적 요구보다 사법부 내 고위법관들의 눈치를 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 직속으로 처장과 차장은 대법원장이 직접 임명한다. 법원의 보수적 생리와 구조상 대법원장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 그래서 법원행정처가 판사 개개인의 이념성향부터 시시콜콜한 일상사까지 사찰한 것은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의 뜻이란 평가가 맞다고 봐야 한다. 민주당조차 판사 동향 사찰에 대해 “누가 봐도 대법원장 보고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양승태 (당시)대법원장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사태”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법원 스스로 그 책임을 묻기 어려운 만큼 외부의 강제수사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이렇듯 쌓이고 쌓인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수사가 절박한데도 김 대법원장의 태도는 매우 미온적이다. 일각에서는 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입장문에는 인식의 차이가 없다고까지 한다. 대법관들은 ‘외압이 없었다’는 입장이고 김 대법원장은 ‘오해의 소지’ 정도로 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대로라면 사태 수습은 봉합으로 기울 것이다. 소수 문제된 사람에 대한 인사 조치와 대국민 반성 표명으로 끝내려 할 것이다. 이 정도로 사태를 봉합한다면 국민적 분노는 법원으로 향할 것이다. 이미 사법 불신은 임계치에 달해 있다.
남은 것은 검찰이나 특별검사에 의한, 또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에 의한 수사뿐이다. 김 대법원장은 소수의 고위직 판사들의 입장이 아니라 다수의 양심적인 판사와 국민적 바람에 의거해야 한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국민적 염원을 받들어야 한다. 국민의 70%가 법원에 대한 강제수사에 찬성한 여론조사도 나왔다. 법원은 성역이 아니다. 독립성이란 미명으로 국민주권과 법적 통제를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주장하듯 “이미 드러난 보고서만으로도 직권남용,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증거인멸에 해당하는 만큼 형사 책임을 물어야”한다. 사법부의 국정원 같았던 법원행정처를 해체하고 판사들에게 민주주의 소양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차제에는 판사 임용기준도 국민적 눈높이에 맞게 재정립해야 한다. 이것이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다. 사법부를 민주국가의 한 축으로 바르게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