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 후세인, 이라크전쟁, 제국의 오만

▲대영제국의 분할통치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터키에서 이라크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은 뒤 자국의 편의에 따라 1922년 12월 이라크에서 쿠웨이트를 강제 분리했다. 그러면서 인종과 종파가 다른 쿠르드족은 이라크에 병합시켰다. 이 때문에 쿠르드족이 독립투쟁을 벌이자 영국군은 화학무기를 살포하여 이들을 학살했다. 이라크 석유자원은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제국이 각각 23.5%씩 차지했다. 단 6%만이 이라크 몫이었다.

1958년 7월 국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카심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한다. 카심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반제국주의 정책을 펼치며 알제리와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후원했다. 영국계 석유회사가 독점한 토지는 저소득층에게 분배했다. 불공정한 석유 협정을 무효화했다. 그러자 미국·영국·이스라엘은 쿠웨이트에 작전본부를 두고 반(反)카심 군 지휘관 양성, 무장봉기 지원, 암살 공작 등을 벌였다. 1963년 CIA의 지원으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카심이 살해되고, 반제국주의 노선을 지지한 수천 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미국은 주소까지 상세히 기록된 5000명에 달하는 살생부를 쿠데타 군부에 전달했다.(231~233)

▲미국이 키운 후세인 : 사담 후세인은 범아랍주의를 주창한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영향을 받아 바트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68년 바트당 주도의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다. 바트당 정권에서 후세인은 혁명평의회 부의장을 거쳐, 1979년 대통령까지 된다. 1980년 9월 후세인은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기습 공격했다. 대외명분은 양국 간 계속되어온 영토 문제였지만 배후에는 미 제국이 있었다.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함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에 첨단무기와 생화학무기, 심지어 핵물질까지 공급했다. 소국 이라크가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성장했다. 걸프전과 이라크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234~236)

1983년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특별 교섭인과 만난 사담 후세인, 출처 Iraqi state television

▲걸프전 유발 음모 : 걸프전의 실마리가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1922년 영국이 이라크 유전지대인 쿠웨이트를 독점하려고 이를 이라크의 바스라 주에서 강제로 분리한 데서 유래한다. 1990년 이라크는 쿠웨이트 접경 지역에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미국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무모한 전쟁을 벌이려 하지는 않았다. 1990년 7월25일 후세인은 두 나라의 영토분쟁에 대한 미국의 의중을 물었다. 글래스피 대사는 “아랍 내부 문제에 미국은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다. 8월1일에는 이라크-쿠웨이트 회담이 결렬된다. 다음날 새벽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그런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까지 미국의 몇몇 행동은 다소 의심스럽다.

- 1989년 11월, 쿠웨이트 안보장관과 CIA 국장은 회담을 한다. 메모로 확인된 회담 내용은 ‘미국과 쿠웨이트가 국경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것, ‘CIA는 쿠웨이트에게 적절한 압력 수단을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 1990년 7월31일, 미 하원 청문회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질문에 미 국무부 켈리 차관은 “(미국은)군사개입의 의무가 없다”고 밝혔다. 

- 당시 PLO의장은 미국이 쿠웨이트에 이라크의 협상 제안에 응하지 말도록 지시해서 평화적 해결의 길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 쿠웨이트 국왕은 사석에서 “이라크 점령군을 이곳에 하루만 묶어둔다면 미국이 그들을 물리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종래의 입장을 180도 바꿨다. 실제로 쿠웨이트로 진입한 이라크군은 2000명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2~30만의 병력이 쿠웨이트를 유린했다고 선전했다. 유엔 안보리는 통상금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236~239)

▲걸프전, 전쟁인가? 학살인가? : 당시 부시 행정부는 미 상원에서 전쟁 동의를 구하기 위해 증언도 날조했다. 이라크 점령군이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신생아를 병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는 것이다. 미 의회에서 이를 증언한 15세 쿠웨이트 소녀는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 ‘나이라’였다. 그 소녀는 줄곧 쿠웨이트가 아닌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증언 시나리오는 광고회사인 힐 앤 놀툰사 작품이었다. 아무튼 파병 결의안은 의회에서 근소한 차로 통과됐다. 

1991년 1월17일 새벽, 이라크군 섬멸을 위한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됐다. 언론이 떠드는 정밀폭격 따위는 없었다. 미군이 불과 6주 동안 퍼부은 폭탄 양은 파괴력으로 따질 때 히로시마 원폭 7배에 해당했다. 우라늄 미사일, 네이팜탄 등 1977년 제네바협약으로 금지된 폭탄도 사용됐다. 미군은 도로·교량·전기·통신·수도·댐 등 공공시설을 초토화했다. 이라크 주민은 오염된 강물을 퍼다 마시고 등잔불로 어둠을 밝히는 석기시대로 돌아갔다. 유엔의 경제봉쇄는 식량과 의약품 부족을 일으켜 아사자와 병사자를 속출시켰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고속도로를 통해 철수하던 이라크 군인들에게도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100km의 고속도로에는 이라크 군인과 난민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휴·종전협정으로 철수하는 군대에 적대행위를 할 수 없다는 국제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이라크 유전지대이지 이라크 국민이 아니었다. 폭격과 경제봉쇄로 이라크 주민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이 가운데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는 60만 명을 넘었다. 미군 희생자는 294명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오폭 등으로 인한 사고사였다. 미국은 1998년 10월 “이라크 해방법”을 선포했다.(239~242)

▲‘해방’을 위한 두 번째 침공 : 2003년 3월20일 미국은 이라크에 선전포고와 동시에 이라크를 침공했다. 대량살상무기 개발, 테러조직과 연계 그리고 후세인 정부의 인권탄압이 명분이었다. 평화와 인권을 위해 후세인 정부를 타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 무기사찰단에 의해 대량살상무기 개발·은닉 의혹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후세인은 이미 침공 직전에 제한 없는 무기 사찰을 수용하겠다며 사실상 항복선언을 한 상태였다. 세계 각지에서 100만 명 이상이 반전시위에 운집했다. 

이후 전쟁 명분이 된 증거자료가 날조된 것임이 하나둘 밝혀졌다. 2008년 6월 미 상원 조사위원회 최종보고서는 부시 행정부의 침공 명분이 모두 사실무근임을 확인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미 행정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라크의 군사시설과 각종 무기는 모두 미국이 지원하고 감독했기 때문이다.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연관성도 신빙성이 없었다. 부시는 “이라크 정부 고위층과 알카에다 요인이 서로 만났다고 말했지 연관되었다고 말한 적은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궁지에 몰린 미국 정부는 1988년 3월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쿠르드족을 학살한 전력을 트집 잡았다. 그러나 당시 이라크의 쿠르드족 학살을 지원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탄저균, 보툴리누스균, 브루셀라 등이 1980년대 초부터 1989년 11월 말까지 미 상무부의 승인 아래 이라크로 수출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유엔 안보리에서 생화학무기 사용문제로 이라크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려 하자, 미국은 후세인을 감싸며 결의안 통과를 저지했다.(243~247) 

▲민주주의 재건과 인도주의 : 미국에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 전쟁을 수행하여 호메이니 혁명을 견제하고, 이슬람 국가들의 반미 정서를 분산시키는데 기여한 충견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자국의 충견인 후세인을 제거했는가? 이란과의 전쟁 후 이라크는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떠올랐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는 후세인을 방관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원유대금을 유로화로 받겠다는 이라크의 발표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침공 넉 달 전인 2002년 11월8일 미국은 이라크 무장해제를 골자로 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1441호를 상정했다. ‘이는 결코 이라크 침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외교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미국 대사는 말했다. 막상 침공 후에는 ‘이라크의 민주주의 재건과 인도주의 정신’을 강변했다. 

이후 3년 동안 공습과 분쟁 등으로 이라크 민간인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 주민 400만 명이 이라크를 떠났다. 불법구금, 고문, 포로 학대 등이 미군에 의해 자행됐다. 하지만 유엔은 미군과 그 종사자를 국제형사재판소 소추대상에서 면제시켰다. 국제형사재판소 협약의 소급적용도 금지했다. 미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미국을 기소 대상국에서 제외하는데 동의하지 않는 나라는 경제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편 미국은 애국법을 제정하여,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은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안 때문에 지금도 용의자로 분류된 이들은 미군 수용시설과 관타나모 해군기지 등에 수감되어 있다. 수감자 명단은 고사하고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미국은 중동계 유럽 시민도 테러범이라는 누명을 씌어 납치·고문을 자행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민주주의 재건’에 힘쓰는 동안 미국 내 ‘민주주의’는 무너져갔다.(247~250)

▲제국의 오만 : 전혀 뿌리가 다른 아랍족과 쿠르드족, 시아파와 수니파 등 각기 정서와 이념이 상충하는 집단을 한 우리에 몰아넣고 채찍과 당근으로 이들을 다스리려 한 제국의 무지와 오만은 이라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점령 후 미군 부상자가 3만 명을 넘었다. 전쟁 비용은 1조 달러를 넘었다. 괴뢰정부 지원비용까지 합치면 3조 달러를 소모했다. 여론조사에선 75%가 이라크 침공에 부정적 의사를 표출했다. 이라크는 점점 제2의 베트남과 같은 꼴이 되었다. 과거 맥나마라 전 국방부 장관은 베트남전 실패의 원인으로 미국의 무지와 오만을 꼽았다. 하지만 제국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제국은 21세기 벽두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자신의 치부를 전 세계에 드러냈다.(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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