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 무자헤딘, 탈레반, 알카에다 

들어가며 : 제국이 뿌린 씨앗 

두 번의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까지 20세기는 전쟁의 세기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떨까? 인간성 상실, 환경파괴, 핵전쟁 같은 파멸적인 전망을 제외하면, 21세기는 전쟁의 세기를 날려 보내고 인류에게 평화·공존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됐다. 뉴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세계는 희망과 낙관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21세기는 시작과 함께 굉음을 내며 추락했다. 2001년 9월 11일 8시 46분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을 들이받았다. 

맙소사, 이슬람이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서구 문명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냉전과 핵 위협을 극복하고 이제 겨우 새로운 도약을 꿈꿨는데 ‘야만인’들에게 발목이 잡혔다. 9·11테러는 이슬람이 세계를 야만의 시대로 이끄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 갈등, 인종청소, 영토분쟁 등 끊임없는 갈등은 중동을 근대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전근대적 세계로 여겨지게 했다. 즉 이들은 문명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정말로 몰지각한 야만인들이 문명인들의 새 세기를 초를 쳤는가? 냉전이 끝나자 걸프전이 발발했다. 다국적군이 이라크로 들이닥쳤다. 사고와 오인사격으로 미군 294명이 죽는 동안, 이라크인 수만 명이 죽었다. 핵 위협으로부터 해방, 민주주의 승리로 포장되는 냉전 종식은 도대체 누구의 해방이고, 누구의 승리인가? 자유 진영의 승리는 미국의 승리를 뜻했다. 걸프전은 승리의 축포였다. 미국은 새로운 세기를 자축하며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자신들이 뿌린 씨앗은 까마득히 잊은 채로 말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세속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고 탈레반 정권이 세워지도록 했다.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부추겼다. 쿠르드족 학살은 이 과정에서 일종의 덤이었다. 또 두 번의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키웠다. 미국은 야만이라는 이름의 씨앗을 세계 곳곳에 뿌렸는데, 중동은 좀 더 신경 쓴 듯하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중남미가 스페인 제국과 미 제국의 공동작품인 것처럼 중동·아프리카 또한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과연 중동·아프리카는 종교, 종족, 인종 따위에 집착하는 야만의 대륙인가? 서구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수호자인가? 이제 우린 제국이 뿌린 씨앗을 추적함으로써 진짜 ‘야만’의 기원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  


아프가니스탄 : 무자헤딘, 탈레반, 알카에다 
19세기 중반 무렵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 침공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영토 일부를 잃는다. 이후 2차 침공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프가니스탄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1919년 8월에 독립하게 된다. (203)

▲내전 배경, 무자헤딘의 탄생: 독립 후 반 세기간 지속한 입헌군주제는 1973년 다우드의 쿠데타로 무너진다. 그는 공화제를 수립하고, 미국 패권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을 이용하려 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중동의 맹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으면서 한편으론 이란과 파키스탄 같은 친미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양면정책은 국내 친미·친소파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다우드는 점점 공산파를 배척했다. 1978년 4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PDPA은 좌익쿠데타를 일으킨다.

인민민주당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토지개혁은 물론 종교의 자유, 여성의 참정권 보장, 여성의 부르카(베일) 착용 금지 등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소련과 우호선린조약을 체결하고 원조도 받았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친소정책은 이슬람 보수세력과 친미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다. 이 기회를 놓칠 미국이 아니었다. CIA는 이들 세력을 모아 반정부 무장세력을 조직했다. 무자헤딘(‘성전용사’라는 뜻)이 탄생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자유의 투사’라 불렀다. (203~205)

▲미국이 유발한 제1차 내전 : 무자헤딘 게릴라의 무차별적 파괴와 학살로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정부는 소련에 파병을 요청한다.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미국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라며 파병에 부정적 의사를 내비쳤다. 미국은 소련의 개입을 더욱 부추겼다. CIA와 M16이 손잡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무자헤딘에게 자금과 무기를 공급했다. 소련은 국경을 맞댄 아프가니스탄에 반소정부가 들어서는 걸 좌시할 수 없었다. 결국, 소련은 1979년 12월 24일 지상군을 파병한다. 

미 안보보좌관 브렌진스키는 “우리의 비밀공작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드디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이란 덫에 걸렸다.”며 쾌재를 불렀다. 미국과 유엔은 불법 침공이라며 소련을 규탄했다. 도덕적 판단과 별개로 소련군 파병을 불법 침공이라 규정하기엔 모호했다. 아프간 정부는 거듭 파병요청을 했고, 소련은 우호선린 조약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무자헤딘의 테러는 더욱 격화되었다. CIA와 M16이 43개국에서 모집한 무자헤딘은 무려 3만 5000명에 달했다. 10만의 무자헤딘이 관공서와 교육·의료시설을 파괴하고 의사와 교사를 살해했다. 10년간의 내전으로 2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피난민은 500만 명에 육박했다. 정말 미국의 바람대로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베트남이 되었다. 1989년 2월 소련군이 철수했다. 1992년 4월에는 인민민주당 정부도 무너졌다. (205~208)

▲탈레반 정부와 빈 라덴 :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살인, 강간, 약탈 그리고 군벌들 간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파슈툰족 수니파와 군벌들이 만든 정치·종교집단 탈레반은 이런 혼란스러운 정국을 평정했다. 물라 오마르가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그는 무자헤딘 출신으로 다른 군벌들을 물리치며 국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여기엔 미국의 역할이 컸다. 1991년 CIA는 탈레반 조직 강화를 위해 파키스탄을 통해 30억 달러를 지원했다. 탈레반은 극단적인 신정일체정책을 펼쳤다. 이슬람 율법을 어긴 자는 공공장소에서 돌로 쳐 죽이거나 사지를 절단하는 식으로 사회를 통제했다. 여성은 반드시 부르카를 착용했다. 중등 과정 이상의 교육도 금지되었다.

▲ 오사마 빈라덴 사진출처 Hamid Mir - http://www.canadafreepress.com/

물라 오마르와 빈 라덴은 반제국주의 성향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동기로 결속했다. 두 사람 모두 무자헤딘 출신이기도 했다. 빈 라덴은 1984년 맥 MAK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무자헤딘에 자급을 공급했다. 1988년에는 알카에다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었다. CIA는 알카에다 출범 당시 무기와 활동자금을 지원했다. 알카에다 조직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테러단이 형성되었다. (208~213)

▲9·11 사건과 음모론 :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반부터 약 2시간 동안 민항기를 이용한 테러가 발생했다. 297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24명이 영구 실종되었다. 미국은 곧바로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발표는 많은 논란과 의문점을 일으켰다.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 되었다는 점에서 과거 쿠바 메인호 조작이나 루시타니아호 사건, 진주만 공작 등을 연상시킨다.

첫 번째 의문은 사전에 알았는지 아닌지다. 미국 정부는 이를 전면 부인해왔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의 증언이 하나둘 공개되자 슬쩍 태도를 바꿔 ‘사전 입수한 테러 정보를 국외에서 발생하던 테러 정도로만 여겨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당일 미온적인 대응은 업무 미숙‘ 이라고 변명했다. 사실 미국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9·11 테러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 

-1998년 12월, <타임> 지는 빈 라덴이 워싱턴이나 뉴욕에 대규모 테러계획이 있다고 보도했다.

-오클라호마 FBI는 중동계 청년들이 미국에서 비행기 조종 훈련을 받는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CIA도 항공기로 세계무역센터를 테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상부에 보고했다.

-2001년 6월~8월, 독일 정보기관은 중동 테러리스트가 공중납치와 미국시설 공격을 위한 훈련을 받고 있다고 CIA에 통보했다. 탈레반 정부의 무타와킬 외무장관도 미국 정부에 8~9월 빈 라덴의 대규모 테러가 있을 것이라고 은밀히 통보했다.

-2004년 1월 9·11 조사위원회에서 CIA 전 국장 테닛은 2001년 7월 10일 라이스 안보보좌관에게 빈 라덴의 테러가 임박했음을 경고했고, 그녀 역시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고 증언했다. 

두 번째 의문은 미국 정부의 석연치 않은 대응조치다.

-사건 직후 부시 대통령은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구성하자는 요구에 반대했다. 여론에 밀려 9·11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공식보고서는 언론 보도를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미연방법원 포스너 판사는 공식 보고서를 ‘문학작품으로서는 걸작’이라 조롱하기도 했다.

-공식보고서는 북미 방공사령부가 민항기 자폭공격을 가상한 도상연습을 수차례 진행했다는 사실을 누락했다. 북미 방공사령부 사령관은 훈련은 했지만, 국내 공항에서 발진한 민항기는 가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2003년 5월 9·11 조사위원회에서 미연방항공국(FAA) 테러 전담 요원 자코빅은 9·11 발생 직전 공항이나 민항기의 보안 상태를 점검하는 일을 상부에서 금지했다고 증언했다.

여러 의혹에도 불구하고 9·11 사건으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부시 정부 참모들이 대선 기간에 구상했던 사담 후세인 제거와 중동지역 패권 강화 전략이 실현되었다. (213~222)

▲아프가니스탄 침공 : 미국의 침공 명분은 ‘빈 라덴과 알카에다 제거’였다. 그러나 침공 다음 날 미 중부군 사령관은 “우리의 목표는 빈 라덴과 알카에다보다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온 탈레반 정부”라고 말한다. 빈 라덴 체포에 미온적이라는 비판에, 부시 대통령은 “솔직히 말해 나는 빈 라덴 체포에 별 관심이 없다”고 속내를 터놓았다. 빈 라덴 신병을 인도하겠다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제안도 여러 번 무시했다. 빈 라덴이 빨리 체포될 경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2001년 10월 7일부터 미·영 연합군은 재고 폭탄을 처리하듯, 도시와 산간을 가리지 않고 수만 파운드의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마을, 학교, 병원까지 잿더미가 되었다. 국제협정으로 사용이 금지된 클러스터 폭탄도 투하했다. 무차별 살상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익명의 국방성 관계자는 “우리는 민간인에게 죽으라고 그런 것이다”라고 답함으로써 의도적인 학살임을 시인했다.

아프가니스탄 포로에 대해 고문과 학살도 자행되었다. 미·영 연합군은 2001년 11월 항복한 탈레반 병사 및 동조자 3000명을 학살했다. 연합군은 화물 운송용 컨테이너 한 개에 포로 300여 명을 구겨 넣고 숨구멍을 내준다며 컨테이너에 총을 난사했다. 구멍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시체들은 사막에 버려 들개가 먹게 했다. 포로수송을 빙자한 학살은 4일간 계속되었다. 이는 전쟁포로에 관한 국제협약 위반이지만, 누가 미 제국 군대의 불법행위를 단죄하겠는가?

미국의 주류언론은 미국의 점령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평화와 발전이 앞당겨졌다고 자화자찬했다. 5만 명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 사망자는 부수적 피해일 따름이었다. (222~225)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