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10) 평가와 전망(마지막회)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가?
R. 데카르트 이후 근대 합리주의적 전통에서 ‘이성(reason)’이란 계산능력을 의미한다. 반면 독일 관념론은 이성의 의미를 인식론적 범주 너머로 확장시켰다. I. 칸트에게 이성은 자율적인 도덕적 실천의지를 포괄하는 것이었으며, G. 헤겔은 이성(정신)을 절대자와 등치시켰다. 역사를 절대자의 자기전개과정으로 이해한 헤겔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내밀었다. 절대자는 자기 본질을 역사과정에 실현함에 있어 유한자로서의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매개로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표제와 함께 헤겔 철학은 곧 보수주의 철학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는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된 독일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유념하며 헤겔을 헤겔의 언어로 비판하는 청년헤겔학파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L. 포이어바흐는 1841년 출간된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헤겔의 “신학”을 거부했다. 포이어바흐에게 신이란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소외형태였다. 그것이 보기에 인간은 선험적 선의지를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윤리적 존재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성심(聖心)으로 살아가는 종교적 존재도 아니었다. 그에게 인간이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수용능력, 즉 감성(sensibility)을 통해 객관적 외부 세계를 파악하며 그것에 지배되고 그것에 경배하는 가련한 세속의 존재였다. 헤겔이 규정한 이성적 인간과 이에 대해 포이어바흐가 “관조적 유물론”으로 묘사한 감성적 인간에 관한 논의를 보고 K.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맑스와 레닌의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

물론, 맑스는 존재가 사유를 결정한다는 유물론의 기본 명제를 부인하지 않았다. 포이어바흐의 “신”을 물신(物神)으로 대치한 그는 인간노동의 자기소외 형태인 물신(자본)의 타파를 통한 유물론적 역사의 종식을 요구했으며, 이는 물신을 독점한 부르주아지의 지배, 즉 자본주의적 지배 질서의 청산을 의미했다. 그를 위해 인간은 감성적 존재성을 극복하고 역사의 주인이 되는 실천적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러한 소외 극복의 계기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 인식이었으며, 사회변혁을 위한 맑스의 이론과 실천은 자본주의적 사회경제구조와 계급적 현실 및 정치운동세력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내지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데 집중되었다.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은 대개 다소 공상적이고 관념적인 성향을 노출했는데, 그들에겐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결여되어 있었다. 반면 맑스는 인간 사회를 고유한 발전법칙을 갖는 유기체로 취급하며 물질적 생산관계 속에서 사회변혁의 수단과 목표를 “머리의 힘을 빌려 발견”하려 했다. 그의 이론들은 사회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도 사회주의를 위한 진단에 있어서도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나아가 P. 프루동이나 M. 바쿠닌의 교의에 비해 훨씬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포괄적이었다. 특히 자본의 자기존재 지양성을 논증한 『자본』과 더불어 맑스 철학은 사회주의를 대표하게 되었는데, F. 엥겔스는 맑스가 이루어낸 두 가지 발견, 즉 유물론적 역사관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을 폭로한) 잉여가치설에 의해 사회주의가 “과학”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 모두가 엥겔스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E.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맑스주의)란 다가올 사회에 관한 학설이며, 따라서 그것에 내재된 특성은 엄격한 과학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학의 초석은 경험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선택된 윤리적 가치 내지 이념으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개량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던 그는 맑스의 자본주의 이론과 그 실제 발전이 꼭 부합하지 않음을 지적했으며, 나아가 노동계급이 맑스 덕분에 지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진보를 이루긴 했으나 정치권력을 넘겨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전했다고도 믿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보통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부르는 것이 내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게는 운동이 모든 것이다.”

이후 맑스주의가 과학으로 인정됨에 있어 레닌의 공헌은 절대적이다. 그는 맑스주의를 과학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면서 이를 부인하는 이른바 수정주의자들에게 배신자의 낙인을 찍었다. 1909년 봄 그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출간했던 것은 얼마 전까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 볼쉐비키 분파에서 자신의 주요 협력자였던 A. 보그다노프의 “반동철학”을 비판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를 온전히 지키기 위함이었다. 1905년을 전후하여 『경험일원론』 1권, 2권, 3권을 차례로 출간한 보그다노프의 철학적 입장은 당시 러시아 노동운동권 내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보그다노프는 객관적 세계의 존립을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 즉 집단적 경험으로 설명하려 했다. 실재는 인간의 조직된 경험이라는 것이다. 레닌이 보기에, 주체(인간)와 객체(물질세계)의 대립을 인간의 경험으로 일원화하려는 그런 입장은 맑스주의의 근간인 유물론과 변증법을 부인하는 반동적 관념론에 다름 아니었다. 레닌에 따르면, 물질이란 객관적 실재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며 인간 의식은 물질세계의 반영이었다.

보그다노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결핍이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분열과 혁명운동의 실패를 야기했으며, 그 원인은 바로 맑스주의 철학에, 특히 토대와 상부구조 관계의 모호성에서 드러나는 과학성 부족 및 사적 유물론에 내재된 역사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맑스주의 철학에서 헤겔의 유산을 걷어내려는 그의 작업은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런 까닭에 그는 마흐주의자라는 레닌의 낙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충실한 맑스주의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징후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객관적 모순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 그는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육성과 발전이 사회주의를 전망하는 운동세력의 주요 과제임을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1917년 2월혁명 이후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고 외치면서 10월혁명을 준비하는 레닌을 비판했다. 노동자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체계적으로 충분히 구축하기 전까지 정치권력을 장악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의 비판에 대한 답변을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해두고 있었다. 1902년에 출간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계급의식이 없다고 단언했다. 노동계급은 단지 ‘빵과 버터’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트레이드-유니온이즘적 의식 정도를 자주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뿐이며, 사회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계급의식은 과학적 지식을 가진 인텔리겐치야-혁명가당에 의해 오직 외부에서 노동자들에게 주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만사는 레닌의 구상대로 추진되었다. 맑스주의 기본 이론들을 노동자들에게 주입하기 위한 문화혁명이 추진되었으며, 인민들을 감성적 존재에서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개조하기 위한 선전-선동이 전개되었다. 맑스주의가 과학이라면 그로부터 도출된 레닌주의 이론들도, 맑스-레닌주의에서 도출된 스탈린의 이론들도 과학이 되어야 했다. 맑스-레닌-스탈린주의라는 “과학”으로 무장하여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확신한 소비에트 인민들이 흘린 ‘땀과 피’는 스탈린 시대에 소련이 과시했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역동성의 원천이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국가사회주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과학”을 부정하거나 조금이라도 회의하는 분자들은 역사의 도상에서 도태되었다.

소비에트 인민들은 “과학”을 독점한 당에 의해 지배되는 감성적 존재였다. 과거에 비해 당의 지배력이 현저히 유화되었던 브레즈네프 시대에 그들이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기왕에 구축된 사회경제적 성과에 더하여 “과학”에 담겼던 진보적 가치들이 정책과 제도로 구현되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1992년부터 러시아연방에서 추진된 자본주의 혁명은 많은 러시아 시민들에게 극심한 경제적 궁핍과 인내를 강요했으며, 이후 V. 푸틴의 등장과 함께 러시아는 맑스-레닌주의의 지배와 이에 대한 자유주의적-민족주의적 반동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구속을 탈피하고 권위주의적 색채의 보통국가가 되었다.

소련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체제 목적으로 하여 맑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의 팽창을 추구했던 ‘이념의 제국’이었다. ‘제국’이 유지되지 못했던 것은 소비에트 인민들이 유물론적 인간, 즉 감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붕괴는 인간 본질의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지, 냉전에서의 패배가 그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없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 앞에 세워져있는 레닌 동상. 레닌의 손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러시아혁명이 가져다준 진보적 가치

J. 리드는 러시아 10월혁명을 “세계를 뒤흔든 열흘”로 묘사했지만, 그것은 당시 세계 자본주의 변방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나비의 날개짓”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치적 투기 내지 모험주의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 권력, 즉,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그들을 기다린 것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들이 천신만고 끝에 내전에서 승리했을 때, 그들의 역사 전망은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세계 혁명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네프(신경제정책)가 도입되었고, 볼쉐비키당 내에서는 “후퇴”의 범위와 한계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후퇴”의 지속, 즉 네프 확대를 합리화하는 것이었고, 볼쉐비키는 스탈린의 이론에서 영구혁명론으로 궁지에 몰린 레닌주의로부터의 출구를 발견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를 계승하고 있었는데, 양자는 역사적으로 상이한 개념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1922∼23년경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치적 입장이 일치했다는 연구자들의 의견은 충분한 사실적 근거를 갖는다. 그들은 그러한 일치를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의 역사적 대안이었다고 주장하는 논거로 삼는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와 영구혁명론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정치적 적실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물론 늘 스탈린이 레닌의 제자임을 자처했다는 사실로 스탈린주의의 레닌주의로부터의 계승성이 승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계승성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이 레닌의 지도하에 10월혁명에서 승리한 “볼쉐비키-노동자들”의 혁명 에너지를 보존하면서, 그것의 발전을 위한 장기 전망을 제공하고 또 그것을 실현시켰다는 데에서 확인된다. 그런 뜻에서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의 발전형태였던 것이다. 몰로토프는 자기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업적이 게으른 러시아인을 일하게 만든 데 있다고 했다.

소비에트 체제의 비민주성은 선험적으로 규정되었다. 레닌이 10월혁명으로 수립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이었고, 소비에트 인민에 대한 “설득과 강제” 및 ‘인민의 적’의 색출과 탄압에 의거하여 “사회주의의 승리”를 이뤄냈던 스탈린주의는 혁명의 시대에 소련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재체제를 확립하고 그를 강화하기 위한 자코뱅적 의식의 표현이었다. ‘전 인민의 국가’라는 개념으로 소련에서 계급모순이 완전히 해소되었음을 선전한 ‘발전된 사회주의’ 시대에도 공산당의 지도와 정치독점은 전혀 의심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혁명이 선전한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의 이념은 지구상의 노동자들과 피압박 민족들을 각성시켰으며, 해방을 원하는 세력들은 볼쉐비키의 이론과 경험에 대한 학습에 나섰다. 또한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저열한 파시즘의 발흥을 저지하며 민주적 가치를 지켜냈으며,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성공은 “제국주의자들”을 긴장시켰다. ‘발전된 사회주의’ 하의 소련에서는 맑스­레닌주의가 허위의식화 되는 가운데 국내적으로 체제 비판이 확산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소련공산당의 경험과 세계 혁명에의 지향은 자본의 지배에 도전하는 지구상의 노동운동 세력들에게 이론적, 실천적 모범을 제공하면서 그들을 고무시켰으며,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의 안티체제로 존재하면서 서방 국가들이 사회정책적 진보를 이루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소련의 몰락은 냉전에서의 패배나 체제적 비효율성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유물론적 인간관이 지적하는 인간 감성의 문제로 설명될 수 있다. 결국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국제적 차원의 계급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완결성이 반증되지는 않는다. 무릇 거의 모든 정치적 이념들은 계급적, 사회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 노동계급과 계급적 “착취”가 존재하는 한 노동운동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 내지 맑스주의는 소멸되지 않는다.

러시아 혁명이 없었다면 현대 인간사회에서 노동권, 평등권, 생존권, 여성해방, 민족자결 등과 관련된 진보적 가치가, 물론 국가나 지역 별로 차이가 있겠으나, 지금과 같은 정도로 구현, 보장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의 지배”가 급격히 강화된 신자유주의라는 반동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프랑스대혁명의 경우를 예로 보면, 러시아 혁명의 인간해방 이념은 러시아 혁명의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갈 것이다. 18세기 프랑스대혁명에서 분출된 공화주의의 아이콘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 나폴레옹의 몰락 후에 유럽에서 메테르니히 체제라 불리는 반동적 왕정복고 체제가 수립되었으나, 이미 분출된 공화주의 이념은 말살되지 않았다.

유럽 계몽주의 시대에 백과전서파가 있었다. 이들은 구체제 및 구시대적 편견에 대한 투쟁의 무기로 백과전서를 집필하고 출판하였다. 지식이 이성적 각성의 모티브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지식이 디지털 정보로 집적 체계화되어 PC나 스마트폰으로 사유화되고, 그것이 SNS로 소통 공유되는 현대 사회의 정보화 환경이 정치에서 인간의 이성적 각성에 얼마나 기여할지의 문제는 인문학적 연구 주제로 그럴싸해 보인다. 그래도 문제는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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