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와 패배주의 역사관 청산을 위하여 (4)

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략으로 발생한 신미양요를 ‘조-미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에서 일어난 해프닝’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손돌목 조선 군사들의 우발적인 포격에 대한 미국의 즉자적 보복조치’라는 견해이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2007년)’도 비슷한 주장이다. 미국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강제개항 시키지 않고 철수한 것은 애당초 침략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셔먼》호 사건 진상조사차 조선에 왔다가 일어난 우발적 사고에 대한 즉자적 대응이었다는데…. 정말 그럴까? 

▲ 1871년 조미전쟁(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포사격으로 희생된 의병

미국은 신미양요를 ‘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라고 부른다.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뜻이다. 미국은 국가정책으로 전쟁을 감행했다. 뚜렷한 목적이 있어 조선을 침략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패배했기 때문이다. 한번의 전투에서 이겼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진상조사도, 강제개항도, 조미수교도 달성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갔다. 1871년 조-미 전쟁은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미국을 《은둔의 나라, 조선》이 물리쳤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조차 믿지 않기 때문일까?

《셔먼》호의 실패, 또 2년 뒤 남연군묘 도굴 사건 실패 직후인 1868년 8월 미국은 조선을 간교한 술책이 아니라 무력으로 침략하기 위한 첫 작업을 시작한다. 청나라 주재 미국공사, 일본 주재 미국 공사와, 청나라 주둔 미 사령관 로완 제독이 모여 미 국무장관에게 ‘조선 개항을 위한 무장간섭 건의안’을 제출한다. 조선에 대한 무력 개입이 불가피한데 로안 제독의 병력으로는 부족하므로 해군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건의안에서 『동아시아 연안의 중심에 위치, 외국 선박들이 길게 뻗은 해안선을 통해 오고 가며… 조선은 미국 상품의 훌륭한 시장일 뿐 아니라 중국과의 무역에도 상당히 유리… 태평양 상업의 경로이며… 러시아 영토가 인접… 다량의 석탄이 생산될 것이며, 해운에 필요한 물자를 희망봉을 우회해 운반하지 않아도 된다.…(미국정부의 대외관계문헌집)』라고 했다. 조선을 아시아 침략의 경제, 군사적 기지로 만드는 효과에 대해 강조한 내용이다. 

이 계획에 따라 1869년 《콜로라도》호, 《알래스카》호, 《베니치아》호, 《팔로스》호, 《모노캐시》호가 미국 아시아함대에 편입되어 청나라에 도착하였다. 미국이 파견할 수 있는 최대 숫자의 함대였다. 또 미국은 1869년 말 로우를 청나라 주재 미국공사로 임명하고 조선 침략의 전권을 주며 조선 침략계획을 하달하였다. 

- 국무성은 조약체결을 목적으로 조선과 담판을 진행할 담판의 전권을 위임한다.

- 조약의 원칙적 목표로 1854년 가나가와, 1858년 에도에서 체결된 조약을 따를 것.

- 원정은 1871년에 할 것.

- 일체 경비는 런던은행과 바링그 형제 상회에서 인수할 것.

일본에게는 조선에 대한 자료 제공과 길잡이로 나설 것을 요구하며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보급, 수리, 정탐기지로 이용하였다(「일본외교문서 4권」). 또 청나라 정부를 통하여 무력침공에 앞서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전달하였다. 일본에서 미국 선원이 1명 죽은 것을 계기로 페리 함대가 일본을 굴복시킨 사실을 상기시키며 《셔먼》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2〜3개월 내에 대표를 파견한다는 통지였다(일성록 고종 신미년). 이를 통해 미국의 침략 의도를 알게 된 조선은 회답을 보냈다. ‘《셔먼》호가 수장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학대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외국 배가 조난당하면 필요한 물품을 내주고, 순풍이 불 때를 기다려 돌려보내거나… 배가 파손된 경우 육로로 호송해주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따로 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없다,… 쌀과 천은 넉넉지 못하여… 다른 나라와 유통하여… 고갈시킨다면 조그마한 강토는 위기에 빠질 것’이라며 통상요구를 거절하였다. ‘다시 함부로 멸시하고, 학대한다면, 방어하고 소멸해 버릴 것’이라며 침략시 정면대응 의지도 밝혔다. 이에 미국은 나가사키에서 침략준비를 끝냈다. 80여문의 각종 포로 장비된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미군이 집결하였다. 로우는 1871년 3월 미 국무성에 『동방정부와 백성에게 관대해진다면 정책상의 오류(미국정부 대외관계 문헌집)』라고 큰소리까지 쳤다. 1871년 3월27일 미 함대는 ‘서울로!’라는 깃발을 달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침입 경로

4월3일! 아산만 풍도 앞에 미군 함대가 나타났다. 7, 8일에는 《팔라스》호와 4척의 작은 함정으로 연흥도, 작약도 부근을 측량하였다(고종실록). 9일 미군은 전날 남양부사의 문정 내용에 대한 회답을 보냈다. 『우리는 미국 배인데, 전권대사가 조선국 사이에 협의하기 위하여 왔으니 만족스러운 처리를 볼 때까지 이 해안 일대에 정박할 것이다.』 10일 그들은 나흘 동안의 측량을 종합하고, 프랑스 함대가 작성한 해도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날 조선 정부는 통사 3명을 전권위원으로 보낸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12일부터 미군은 작약도 주변에서 전투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13일 조선 정부가 3품 관리 등을 전권의원으로 보냈지만, 미군은 서기관 대리를 보내어 조선 대표의 관직이 낮고, 위임장이 없다며 담판을 거절했다. 첫날부터 「화목하게 지내려고 왔다」면서 기만해 온 미군의 침략적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14일 한강 진입이 가능한 《모노캐시》호 등 4척의 소함정이 강화해협에 대한 <측량>을 핑계로 강으로 들어왔다. 동원된 병력은 1230명 중 650명이었다. 그들은 침략의 구실 마련을 위해 먼저 조선 군대의 포사격이 시작될 것을 기대하면서 강을 따라 서서히 거슬러 올라 왔다. 손돌목은 중요한 요새지였다. 조선은 병인양요 이후 이곳을 중시하여 군사를 늘이고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조선 배도 통행증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았다. 손돌목에 미국 함선들이 나타나자 광성진, 덕진진, 덕포진의 수비병들은 일제히 포사격을 시작했다. 불의에 타격을 받은 미군은 《모노캐시》호 등이 침수되기 시작하자 황급히 후퇴하였다. 이날 조선에서는 강화도 방어를 위한 긴급조치를 내렸다.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 임명하고, 각 군영에서 군사와 무장장비, 군량을 준비시켜 강화도에 보냈다. 15일에는 훈련도감과 수어영의 군사를 보내 방어군을 증강하였다. 17일 대원군은 로우에게 ‘손돌목 전투에서 우리 군대가 벌린 투쟁은 정당하다’는 것을 밝히고, ‘협상할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도 미군은 20일 서기관 대리 드롤의 명의로 「3〜4일 이내에 협상의 확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미군은 손돌목에서 조선군의 포 사격으로 파손된 배들을 수리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전쟁을 최종 승인받았다. 《콜로라도》호, 《베니치아》호, 《알래스카》호 3척은 한강을 봉쇄하고 《모노캐시》호, 《팔라스》호 등 소함정과 20척의 단정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큰 함선의 함포들을 일부 해체, 소함정에 설치하여 화력을 강화하였다. 4월23일 미군은 강화도 공격을 개시하였다. 2시간 이상의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히 파괴하고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는데 로우는 『제2차 아편전쟁 시기 대고 포대 점령보다 더 큰 전투였다』고 하였다. 24일 아침 덕진 포대를 점령하고, 함포 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안개를 이용해 산발을 타고 광성진 포대로 진격하였으며 다른 한 부대는 광성진 서남쪽으로 공격하였다. 3면에서 쏘아대는 포탄에 조선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조선군의 항전의지는 대단했다. 중군 어재연의 지휘 밑에 광성진 70여명은 몸이 새카맣게 타버렸거나,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동료의 시신을 보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버텼다. 포격이 끝나자 미군의 공격으로 살벌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조선군은 쓰러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군의 눈을 멀게 하려고 흙을 집어 얼굴에 뿌리며 죽기를 각오하고 한치 한치의 땅을 지켜 싸웠다. 많은 전투를 치러온 미국이지만 낙후한 무기를 들고 이렇게 민족과 국가를 위해 결사적으로 맞서는 적은 처음 보았다고 한다. 로우는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군사는 다시 찾아볼 수 없다(함대기 밑에서의 45년)』고 하였다. 중군 어재연 등 조선군은 거의 모두 전사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목을 찔러 자결하거나 바다로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비록 광성진 전투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조선군의 헌신적 투쟁은 조선에게는 승리의 신심을, 미군에게는 공포를 주었다. 미군은 망연자실했다. 신식 포탄 몇 개면 항복할 것으로 예상하고, 느슨하게 가져왔던 무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초지진을 내주고 물러섰던 첨사 이임은 기습적으로 미군을 습격한다. 이때부터 미군은 『서울공격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조선잡기. 일문)』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은 광성진 포대를 점령하고도 다음날 이른 아침 작약도 앞바다로 철수했다. 악착같이 달려드는 조선군을 다시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25일 광성진 함락에도 굴하지 않은 대원군 역시 『…예의의 나라로 이름난 우리가 어찌 개돼지 같은 놈들과 화친할 수 있겠는가….(고종실록)』라며 종로와 각 지방에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1866년에 이 글을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27일 부평부 도호부사의 항의와 물러가라는 공문이 왔지만 미군은 여전히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미국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번 사건은 귀국 지방관의 잘못으로 생겨난 것』이라며, 『우리의 함포는 원거리 사격을 할 수 있으며 모두 명중된다.…』는 위협적 내용의 편지를 고종에게 보내려했으나 부평부 도호부사는 수신을 거부했다. 끝까지 항전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5월1일 로우는 『화친』을 하자며 다시 국왕에게 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미군은 16일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18년 전인 1853년! 불과 4척의 전함과 300명의 병력을 이끈 페리에게 별다른 저항도 없이 무릎 끓은 일본의 굴욕적 자세와는 극명히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후 미국은 직접적인 조선 침략을 포기하고 일본을 앞세워 조선에서의 이권을 추구하는 방식을 모색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으며, 러일전쟁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을 앞세운 대아시아 구상을 확인한다. 《가츠라-테프트》 밀약은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조선 지배를 상호 승인하는 신사협정인 듯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필리핀은 이미 미국의 식민지였고, 더구나 약체국 일본에게 양해 받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밀약의 본질은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포함해 아시아에서 미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놀랍게도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처음부터 미국과의 결탁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번 칼럼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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