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에서 대구로 나온 가족들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
YMCA 대학입시학원 강사와 또 여기에서 얻은 인기로 경북여고의 수재급 학생들로 구성된 ‘그룹과외’까지 하면서 나는 학비와 생활비 걱정을 덜게 됐다. 하지만 대학 2학년인 1953년에 들어서 나는 난전에 글장사격인 학원 강사와 여학생 그룹지도를 그만두었다. 대신 이원복 선생과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석종구 선생의 강력한 추천으로 영남고등학교 야간부의 수학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낮에는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밤에는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생활이 비록 고단했지만 보람도 컸다. 더구나 이때 봉급이 정식교사 월급에 준했기 때문에 생활에 여유도 생겼다.
그래서 구지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아우 재두를 대구로 불러올렸다. 재두를 대륜고등학교에 입학시킨 뒤 함께 하숙을 했다. 당시 하숙은 문리대 수학과 조용 선생의 주선으로 그의 누님 집으로 정해 두 형제가 한방에서 거처를 했다.
하숙을 정해놓고 보니 조용 선생의 누님께서는 ‘경주 최부자집’의 종손이신 최식 선생님의 제수였다. 더구나 최식 선생님의 부인은 나의 어머니와는 이종이었다. 그러니 우리한테는 아주 가까운 친척처럼 느껴졌다. 그 집에서 우리 형제는 재두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몸도 마음도 편하고 따뜻하게 보냈다.
고등학교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재두는 좀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소년답게 놀기도 하면서 나름 보람 있게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재두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또래 친구들의 리더 격이 되어 바쁘게 쏘다니곤 했다. 때론 말썽을 부리고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건 인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리 많은 돈은 아니지만 월급을 받으면 먼저 하숙비를 내고 남은 돈은 내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재두에게도 필요할 때는 언제든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 돈이 떨어지면 아무리 쓰고 싶어도 못 쓰게 되니 돈 귀한 줄을 알고, 절약할 줄도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와 같은 하숙방에서 지낸 재두는 놀 때는 실컷 놀면서도 공부할 때는 무섭게 집중력을 발휘하더니 3년 뒤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에 입학해 나를 흐뭇하게 해주었다.
재두가 대구로 올라온 뒤에는 온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가 구지에 있는 어머니와 누이 향아(재향)와 남동생 용아(용웅), 재주, 그리고 태중에 있던 나의 작은 누이 재숙이까지 거느리시고는 불쑥 대구로 올라오신 것이다. 다섯 식구의 거처는 대명동 언덕배기에 두 칸 방과 바깥부엌이 딸린 초가집에 정하셨다고 한다. 갑작스런 이사를 두고 아버지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구지중학교도 사람 좋은 장 교장이 계시고, 또 면장인 최종대 씨가 재단이사장으로 계실 때는 서로 말도 잘 통하고 해서 외롭지 않게 지냈는데, 새로 면장으로 온 작자가 재단이사장이라면서 어찌나 무식하게 설쳐대는지... 내가 교사자격이 없다나! 나 원 더러워서! 장 교장마저 더럽다고 그만두고 해서 나도 때려치워 버렸다.”
새로 온 면장이 할아버지의 일로 아버지가 중앙고보를 중퇴한 일을 들며 괴롭힌 것 같았다.
“장 교장이 이번에 대구의 대성중학교 교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영어교사 자리가 하나 비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해서 올라왔다. 너거 숙모는 너거 아재비가 제대할 때까지 친정에 있기로 했고.”
나는 구지에 남아계신 할아버지가 걱정이 됐다. 올봄부터 자주 편찮으시던데 큰 걱정이 되었다.
“아니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은 어쩌시고요.”
“너거 숙모가 곁에서 잘 보살필 게다.”
아버지는 대구로 오셔서 장 교장의 추천으로 대성중학교에 취임은 했지만, 속 좁은 교원들 속에서 시달리다 얼마 안 있어 그만두었다. 자격이나 따지는 학교에서 더 이상 더러운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며 이참에 다른 일을 찾으셨다.
아버지는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일본군에 억류되어 있던 연합군 포로 관리업무를 맡았다. 그래서 연합군 포로들한테서 익힌 영어에 능통하셨다. 또 당시 절박한 처지에 놓인 연합군 포로들에게 인도적인 도움을 주고, 위급상황에서 그들을 구조한 일로 영국군 사령관이 직접 쓴 소개장도 갖고 계셨다. 아버지는 일본이 패망하고 1년여가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로도 사정이 절박할 때는 미군 부대에 가서 그 소개장을 보이며 여러 번 도움을 받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대구의 미군 부대를 찾아가셨다. 아버지의 영어회화 실력에다 그 소개장이 합쳐지자 대번에 일자리가 마련됐다. MISP(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Platoon), 즉 군사정보부대의 통역관 일이었다. 1953년 봄부터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하셨다. 덕분에 다급한 여섯 식구(그새 뱃속의 재숙이도 태어났다)의 생활도 점차 안정될 수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미군 부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늘상 “미국놈 일은 그저 급할 때만 이용하고 될수록 빨리 손을 씻는 게 낫다”고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 있다 보니 이런저런 정보가 많았다. 당시 아버지를 통해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이 이승만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해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을 했다는데, 이미 6월 들면서 미군들한테서 들었던 정보야. 이에 대해 여론조사 한 것을 번역하는 게 바로 내 일이었지. 남쪽에서 이승만의 명령으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군사작전은 모두 미군 사령부에서 계획하고 실행할 뿐이야. 물론 필요에 따라 이승만이 한 것으로 발표하기도 하지만, 모든 건 미군이 결정한다고 봐야지.”
나와 재두가 따로 하숙집에서 지내느라 다같이 모여 살지는 못했지만 온가족이 대구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밀양과 구지를 오갈 때 잠시 들렀던 대구가 어느새 고향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렇게 대구는 내 20대 청춘의 중심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