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와 패배주의 역사관 청산을 위하여 (3)

1. 계속되는 미국의 조선침략

이상하게도 우리 역사가들은 미국의 근대 조선 침략에 대하여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않는다. 《고종실록》과 미국에 분명한 기록으로 있는데도 우리 역사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록 잠시 외세를 몰아내보았자, 더 큰 침략의 빌미만 주고, 결국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뜻인가? 전형적인 역사 허무주의이다.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본질을 분석하는 일을 하지 않다보니, 미국을 ‘아름다운 은인의 나라’로 오인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우리 국민들이 이웃 나라의 침략과 횡포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도 현대 제국주의의 주범 미국에게 왜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가? 이웃 강대국은 사이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 들어왔다! 남연군묘 도굴 역시 미국의 조선침략 공작이었다.

《셔먼》호 소식을 궁금해 하던 미국은 그 해 8월 말 한강일대를 정찰하고 귀환한 프랑스인들로부터 대동강에서 서양 배 1척이 소침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국은 곧 《셔먼》호로 단정하고 조선 굴복의 구실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청을 통해 조선에 《셔먼》호 행방과 선원들을 돌려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낸 결과, 그것은 영국 배이며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는 답신을 받았다.《고종실록》 미국은 《셔먼》호 행방을 직접 알아본다며 《와츄세트》호를 황해도 앞바다에 보내 5일간 조선 해안일대를 정찰, 측량 후 돌아갔다. 이 정찰자료에 따라 미국의 조선 침공이 추진된다. 이때 아시아 정세를 보면 프랑스는 《선교사 살해는 10월 로즈함대의 조선원정(병인양요)으로 징계되었다》면서 미국의 공동출병 요구를 거절한다. 미 국무장관 시워드는 《영국은...큰 이해관계는 없으며... 북독일은 아직 동방에 별다른 정책이 없다...우리 단독으로 조선을 개방하려고 하는 시도는 잘 될 것》이라고 했다.《미합중국정부의 대외관계사료》 하와이 뿐 아니라 조선까지 포함하는 태평양 침략계획이 작성된 것이다.《테오도로 루즈벨트와 로일전쟁》

이 무렵, 상해 미국 총사령관 통역, 젠킨스는 천인공노할 계획을 꾸민다.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유골을 미끼로 불평등 조약을 강요한다는 것! 오페르트는 이렇게 썼다. 『조선인들에게는 완고한 조상숭배에 대한 미신이 있다.... 대원군은.... 유물을 모두 자기 아버지의 묘에 묻어두고.... 매장물을 손에 넣으면 우리 요구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쇄국한 나라》 미국은 이 계획을 승인하고 젠킨스에게 《셔먼》호 승무원 중, 생존자는 구할 것, 《셔먼》호 배상금을 받아낼 것,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약체결 등을 지시하였다. 도굴 후에도 협상거부 시, 여름에 대규모적 무장간섭을 협박하라고 하였다.《은둔국 조선》 미국은 젠킨스를 총책임자로, 조선에서 10년간 활동한 프랑스 신부 페론을 통역으로, 독일계 상인 오페르트를 비롯한 140여명으로 된 도굴단을 조직하고 선박 등, 일체를 보장해주었다. 이 사건은 「독일계 오폐르트」와 「프랑스 신부 페롱」을 주범으로, 미국인 제킨스는 자본을 댄, 『국제도굴단』으로 알려졌지만 미국 통역사였던 제킨스에게 큰 돈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배후는 미국이며 구미 각국 출신을 끼어놓음으로써, 공격의 화살이 미국에 돌아오지 않도록 술수에 불과하다.

2. 침략선 《셰난도어》호의 대동강 침입과 격퇴

미국은 이와 함께 《셔먼》호의 행방을 알아본다는 구실로 군함 《셰난도어》호를 조선에 보냈다. 이 배에는 1문의 대구경포와 8문의 보통대포가 설치되었으며 230명의 미군이 타고 있었다. 제킨스 일당보다 먼저 《셰난도어》호를 보낸 것은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각종 소동을 벌리면서 이목을 대동강 일대에 집중시켜 놓고, 남연군묘 도굴을 성공하려는 것이었다. 《셰난도어》호는 1868년 3월18일 청나라 어선 3척을 나포하고, 길 안내를 받아 오리포 앞바다에 정박하였다.《고종실록》 20여명이 상륙, 닭 돼지 양 등을 요구하였고 5명은 마을로 가서 약탈하였다. 21일 수군방어사가 검문하려고 배에 접근하자, 대포를 쏘면서 막은 후 또 다시 상륙,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까지의 거리, 알곡과 목화 산지 등을 물어보고, 기독교 유인물들을 던져놓고 돌아갔다. 22일, 조선 관리는 편지를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23일, 작은 배로 편지를 가져간 저들은 24일, 강을 거슬러 정박하였다. 25일 《셰난도어》호는 조선 관리의 배를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오리포로 끌고 가서 대동강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대동강 수심이 낮아 큰 배가 항해할 수 없다고 하자, 《셰난도어》호로 돌아가 총포사격을 가하였다. 26일에야 저들은 편지를 보내, 「대동강에서 없어진 배를 조사하기 위하여 정부의 지시로 왔다면서 우의룰 두텁게 하려는 것이니 귀국 왕이 잘 의논하여 두 나라가 길이 화목하게 지내기 바란다.」고 하였다.《고종실록》 27일 조선은 《셰난도어》호가 보는 앞에서 《셔먼》호 승무원들 4명이 살아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침략의 구실을 준 김자평을 처형하였다.

미국의 파렴치한 행위는 조선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백성들의 기세에 고무받아 의병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이 나돌고 의병대들이 모여들었으며 민중들은 원호사업에 나섰다. 대동강 연안 요충지들인 동진, 보산, 정이산 등 에도 방어진지가 꾸려졌다. 이런 분위기 에서 30일 다시 관리를 《셰난도어》호에 보내 나가라고 하였으나 미국은 물러가지 않았다. 결국 철도포대에서 경고 사격을 받고 평양 침입을 포기한 후 4월 1일 안악경내로 물러섰다. 8일 비련도에 상륙, 대원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선의 정당한 방위조치를 비난하면서 만일 자신들이 《셔먼》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면 곧 대규모적인 무력간섭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하였다.《고종실록》 그 후에도 20여 일 동안 우리 연안을 측량하는 불법행위를 계속하였다.

▲ 차이나호의 침입과 퇴각경로

3. 침략선 《챠이나》호의 침입과 남연군묘 도굴사건

《셰난도어》호가 남포 앞바다에서 소동을 피우던, 4월 8일 젠킨스 일당은 680톤급의 《챠이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였다. 나가사끼에 들러 연료, 식량, 무기를 보충한 다음 16일 아산만에 들어왔다. 18일 홍주 행담도에 들어온 젠킨스 일당은 빼앗은 배 2척과 《그레타》호 등에 나누어 타고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러시아 군대로 가장하고 숨어있던 카톨릭 신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관청을 습격한 다음 남연군의 묘로 쳐들어갔다. 그들이 남연군묘로 접근하자 이를 본 민중들은 호미와 괭이를 들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총 칼을 휘두르면서 민중들의 반항을 제압하고 묘를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고종실록》 19일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묘의 한 귀퉁이를 파헤칠 수 있었다. 그러나 썰물시간이 다가온 데다, 조선군이 몰려오면 생명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도굴을 포기하고 도망가고 만다. 젠킨스 일당은 도굴 실패 분풀이로 4〜5호 밖에 없는 덕산군 후포 마을로 들어가 약탈한 후 22일 영종도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여기서 프러시아 수군 제독 명의로 대원군에게 협박장을 보냈다.

▲ 남현군묘 도굴 장면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보다 나으므로.... 원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정도가 지나친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도덕에 어긋나는 일 이라고 하겠는가... 귀국의 안녕과 위태로움이 귀하의 처리에 달려있으니.... 협상하자.... 계속 우유부단하다가 나흘이 지난다면 우리들은 돌아갈 것이니 지체하지 말 것이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면 천만다행이겠다.”《고종실록》 영종첨사는 23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반박편지를 보냈다. “귀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원래 서로 연계도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 인간의 도리로써 차마 할수 있는 일이겠는가? 뿐만 아니라.....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빼앗고,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다만 있는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몇 달 뒤에 설사 싸움배가 온다고 하더라도...방비할 대책이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오는 서양각국의 배에 대해서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 《고종실록》

젠킨스 일당은 분풀이로 4월 25일 영종진을 공격하였지만 조선 군사들은 그들의 공격을 좌절시키고 2명의 목을 잘라 동쪽 성문에 달아매고 공포를 주었다.《고종실록》 그들은 “완강하고 억센 조선 사람들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은둔국 조선》며 상해로 달아났다, 《차이나》호에 큰 기대를 걸고 20여 일 동안 황해도 연해를 다니며 정세를 긴장시키던 《셰난도어》호도 같은 시기 상해로 도망갔다. 그린피스는 이 사건으로 조선의 반미감정이 높아진데 대하여 이렇게 썼다. 「이제 한국인들은 외국인이 침입하려는 목적이 시체를 강탈하고, 가장 신성시하는 인간의 본성까지 유린하려는데 있다는 의혹을 목전에서 생생하게 확증하였다. 결국 외국인은 모두가 야만인이요, 대부분 절도나 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1871년 들어온 미국의 군함이나 국기에 대해여서도 꼭 같은 눈초리로 흘겨보게 되었던 것이다.」 《은둔국 조선》

비록 속셈은 식민지 개척 일지언정, 모든 침략국가가 겉으로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걸기 마련이다. 통상의 자유? 약소국 보호?, 전쟁을 선포할 때에도 선전포고의 구실을 찾으려고 갖은 조작을 다 하기 마련이다. 이 사건은 최소한의 요건마저 무시하고, 힘도 안들이고 한 나라를 집어삼키려던 파렴치의 극치이다. 사자의 유골까지 파내어 흔들어대면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무지하고 야만적이며 천박한지... 그것이 바로 미국의 본 모습이다.

조선정부는 제킨스 일당의 만행에 대해 청나라에 알리면서 관계 인물 국가 영사들에게 사건해명을 요구했다. 상해 주재 프러시아 영사는 오폐르트, 폐롱 신부, 젠킨스 등은 프러시아 사람이 아니며 선주 뮐러와 선원들은 음모 사실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응분의 처분을 내렸다. 개인이 사사로이 국가 공무원을 사칭하여 외교적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였다. 결국 오페르트는 본국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미국 총영사 슈워드는 젠킨스를 불법적이고 수치스러운 원정을 준비했다는 등 8개의 범죄 조항을 들어 상해 미국 영사 재판에 기소했다. 미국 영사 재판소 판사도 이 사건을 세계 침략사상 있어보지 못한 대단히 엄중한 사건이라고 하였다. 미국은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재판을 하는 척 하다가 미국 법상 해당 조목이 없다는 이유로 석방하게 된다. 이 사건이 개별적 해적집단의 범죄행위가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침략 정책에 따라 감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기만적인 재판으로 위기를 벗어난 미국은 대규모적이며 모험적인 조선침략 전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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