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작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2

조국과 역사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두번 째 연재는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혁명가 약산 김원봉 편이다. [편집자]

▲ Kbs다큐멘터리에서 켑쳐

“아무래도 여기를 떠야 할 것 같구려.”

“뜨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인민공화당 당직자들을 바라보던 김원봉 당수는 구슬픈 목소리로 말하였다.

“여기서는…… 왜놈들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오.”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북반부로?”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대륙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1947년 4월 9일. 며칠 전 미군정청이 군정포고령을 위반하였다며 묶어두었다가 풀어준 인민공화당 사무실이었다. 조국 광복의 큰 꿈을 안고 「의열단」을 세웠던 22살 때부터 해방을 맞아 귀국한 48살 때까지 26년 동안 강도 일제와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창피였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끈덕지게 뒤밟아 오는 왜경이었으나 한 번도 붙잡히지 않았던 김원봉 장군이다. 그런데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 부림을 받는 친일 경찰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이른바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은 독립투사들이 다 그랬듯이 김원봉 또한 인간적 업신여김과 함께 심한 족대기질을(견디지 못할 정도로 볶아치다) 겪었다.

미국 기자 마크 게인이 『해방과 미군정』에서 그린 경찰서 유치장 모습이다.

나는 경찰이 각이 날카로운 나무 몽둥이로 사람들의 정강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들은 사람 손톱 밑에 뾰족한 나무 조각을 쑤셔넣기도 했지요. 또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물고문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입에다 고무 틈으로 계속 물을 퍼부어 거의 질식할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또한 경찰들이 쇠몽둥이로 한 사람의 어깨를 갈기고 쇠고리에 매달아놓는 것도 보았어요.

김원봉이 철장 속에 있는 동안 두 번째 아들을 보게 된다. 철창 안에서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철근(鐵根)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큰소리로 울었다. 「민족자주연맹」대표였던 송남헌(宋南憲)이 쓴 『해방3년사』에 그때 꼴이 나온다.

▲ 왼쪽 사람이 김원봉에게 치욕을 안겨 준 노덕술 이다. 노덕술(盧德述, 일본식 이름: 松浦鴻(마쓰우라 히로)은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출처 : 한국어 위키백과사전)

“김원봉을 붙잡아간 사람은 노덕술(盧德述, 1899~?)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모지락스런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 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항일결사 의열단 칠가살(七可殺) 발기에 올라있던 자였다.”

“김원봉이를 반드시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린 사람은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張澤相)이다. 송남헌의 증언이다.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이 군자금을 모집하던 광복회원에게 불응하다 살해됐는데 장택상은 이 원한 때문에 ‘진보적 해외 지도자’ 김원봉을 수도청에 구금하였다는 설이 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였다. 두둑한 포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풀어 있던 노덕술은 “하이!”하고 입에 벤 왜말을 뱉으며 차렷 자세를 취하였다. 하늘같은 청장님이 꽥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자야! 정중히 모셔 오랬지 이렇게 불경스럽게 하라고 했나?”

그러면서 짐짓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손수 묶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이승만 정권 때 초대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하였으며 77살로 죽자 국민장을 치러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6월항쟁 때 국본에서 이른바 두 김씨를 불러 “존경하는 역사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한사람은 ‘녹두장군’이라고 하였고 한 사람은 ‘창량 선생’이라고 하였다. 창랑(滄浪)은 장택상 아호였고 그 김씨는 창랑 장택상 비서로 정치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작가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지효대선사 상좌가 됐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단편 <목탁조>가 당선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으나 그에게는 승적이 없었다. 1978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 <만다라>가 당선됐고 이듬해 장편으로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됐다. 중편 <황야에서>로 소설문학작품상을 받게 됐으나 주관사측의 상업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창작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집>, <국수>, <꿈>, 우화소설<염소>, 산문집 <미륵세상 꿈나라>, <생명기행> 등이 있다. 지난 3월에는 제1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