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이념과 실제] (7) 소비에트 국가사회주의의 발전③

3) 대숙청의 정책 목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1931년에 스탈린이 “선진 국가들을 10년 만에 뛰어 넘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분쇄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자본주의 국가들로 포위된 소련의 강박적 위기의식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1933년 초 독일에서 등장한 히틀러 정권이 신속히 독재체제를 구축하면서 스탈린의 위기의식은 보다 고조되었고 구체화되었다. 독일 민족사회주의의 경전이 된 『나의 투쟁』 등에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이 파기되어야 하며 모든 독일인이 민족자결권에 입각해 “대독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독일의 대외정책이 인구 규모와 영토 면적 사이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건전하고 자연적인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민족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데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궁극적으로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활공간(리벤스라움)을 동쪽으로 확장하겠다는 “동방정책”을 예고하였다. 서방의 자본주의 열강들이 드러냈던 나치 독일에 대한 정책적 근시성과는 대조적으로 볼쉐비키는 역사적 혜안을 과시했다.

스탈린, 기회주의적 관용 및 우익 편향주의 숙청

1934년 제17차 당 대회에서의 총괄보고에서 스탈린은 “사태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독일에 대한 소련의 불신이 증폭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독일이 파시즘을 선택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일 지도부가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는 동유럽에 대한 침략계획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속히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소련이 전쟁에 휘말려드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화해 불가능한 모순들을 잘 이용한다면, 다가오는 전쟁을 제국주의 진영 내부의 전쟁으로 국한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부하린도 연단에서 전쟁문제를 언급했는데, 그의 어조는 스탈린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나의 투쟁』에서, 그리고 다른 나치스트 및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저술에서 발췌한 여러 구절을 직접 읽어가면서 부하린은 그들이 1억6000만 명에 달하는 소비에트 인민들을, 독일은 시베리아로, 일본은 시베리아에서 몰아낸다는 계획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어 슈펭글러 같은 나치즘 이론가가 서술한 인종주의적인 역겨운 구절들을 일부 인용한 다음,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계급의 적이 지닌 야수의 얼굴입니다! 이들이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동무들! 이들이야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맡긴 사상 최대의 역사적 전투에서 우리가 필히 대적해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역사의 진보세력이 구현한 유일한 나라이며, 그리고 우리 당과 개인적으로 스탈린 동무는 우리 지구상의 경제적 발전뿐만 아니라 기술적, 과학적 진보의 강력한 선포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운명을 위해 전쟁터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 전투를 위해 단결이 필요하며, 또 다시 단결, 그리고 단결이 필요합니다. 모든 파괴분자들은 물러가라!”

혁명투쟁의 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음모와 배신을 목격했고, 한때 그 자신이 유명한 첩자 말리놉스키의 공작에 희생되기도 했으며, 1928년 여름에는 그래도 호감을 가졌던 부하린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던 스탈린은 음모론의 지지자였다. 따라서 그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철저하게 검증된 대상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정치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계급, 분파, 그리고 투쟁의 논리에 따라 개념적으로 사고했으며 자신의 추론이 현실에서 그대로 입증되리라고 확신했다. 

1934년 12월1일에 발생한 레닌그라드당 제1서기 키로프 암살사건은 스탈린에게 음모론을 환기시켰다. 자신의 충복 키로프는 훌륭한 볼쉐비크였고, 레닌그라드는 과거 지노비예프의 영지였다. 보안기관은 스탈린의 의중을 실천하였다. 며칠 후 옛 지노비예프파 인물들이 검거되기 시작했으며, 곧 이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체포되었다. 12월 말에 소위 “레닌그라드 센터”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는데, 여기에서 키로프 암살범과 테러 가담 혐의자 14명 전원에 대해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또한 키로프 사건을 수사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건이 줄줄이 적발되었다. “지노비예프 그룹”에는 모두 77명이 연루되었는데, 그들은 특별심의회의 결정에 맞춰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나 유형지로 보내졌다. 또한 1935년 1월에는 “모스크바 센터”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며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비롯한 총 19명의 피고인에게 5년에서 10년 사이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이 재판이 끝난 후 스탈린은 「키로프 동무 암살 사태의 교훈」이라는 제목의 서한을 전국의 각급 당 조직에 발송했다. 그 서한에는 “레닌그라드 센터”를 자칭하는 지노비예프파 그룹에 의해 암살이 자행되었으며, 그의 이념적, 정치적 지주는 바로 지노비예프파의 “모스크바 센터”였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노동계급 출신이며 1913년에 볼쉐비키 분파 소속 두마의원을 지낸 말리놉스키는 결국 첩자가 아니었던가? [중략] 예전에 레닌의 가까운 제자이며 동지였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1917년 10월에 봉기를 앞두고 스스로 우리 당에 대한 배신자처럼, 변종처럼 굴지 않았던가? 그리고 봉기 이후에도 부르주아지의 면전에서 공공연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스승인 레닌과 그의 당에 대항하지 않았던가?” 

스탈린은 당원들에게 “기회주의적인 관용” 및 “적들이 조금씩 사회주의로 기어들 것이라고 마구 우겨대는 무방비의 우익 편향주의”를 청산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서한 말미에서 “당이 어떻게 입헌민주당, 사회혁명당, 멘쉐비키, 무정부주의자들과 투쟁했으며, 또 그들을 어떻게 이겨나갔는지를, 뿐만 아니라 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 민주집중파, 노동자반대파, 지노비예프파, 우익 편향자, 그리고 우익­극좌적 변종들 등과도 어떻게 투쟁했고 또 어떻게 그들을 극복했는지를 모든 당원들이 숙지하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의 시선이 머문 곳마다 사건이 적발되었다. 1935년 봄 “모스크바 반혁명조직­노동자반대파 그룹”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쉴랴프니코프, 메드베제프 등 모두 18명에 징역 5년 또는 같은 기간의 유배형이 선고되었는데,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당시 인쇄 매체들은 “조국 반역자에게 용서는 없다!”는 슬로건을 거두고 대신 “근로자 복지를 더 한층 향상시키자!”는 호소에 주력하였다. 그럼에도 옛 반대파 인사들 관련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폭로되었으며, 이는 1938년 3월 “우파­트로츠키파 블록”에 대한 재판이 열려 부하린, 릐코프 등 블록 가담자 18명에 법정 최고형이 선고되고 즉각 총살형이 집행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러시아 제3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시민들이 스탈린 간판 밑을 지나고 있다. 나치가 항복한 5월9일 유럽 전승일을 맞아 현지 공산당 지부가 세운 간판이다. [사진 : 뉴시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스탈린은 1935년 5월 군사아카데미 졸업생들 앞에서 당 정책의 주된 방향을 규정하였다.
“전에 우리는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했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것은 너무 부족합니다. [중략] 기술을 지배하는 사람이 없으면 기술은 죽은 겁니다. 기술을 지배하는 사람이 선두에 있는, 그런 기술이 기적을 가져올 수 있으며 당연히 가져올 겁니다. [중략] 바로 그 때문에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바로 사람이고, 간부이며, 기술을 구사하는 노동자들인 겁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기술 분야에서 궁핍했던 이미 지난 시절을 반영하는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낡은 구호는 이제 마땅히 새로운 구호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구호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유능한 간부의 육성을 당의 당면 과제로 선언하고 스탈린은 각급 당 조직에 “볼쉐비키식 질서를 확립하라”고 요구했다. 1935년 5월에서 10월까지 숙청작업이 진행되었고, 1만5000명 이상의 간부들이 당에서 제명되며 체포되었다. 

1936년 8월 《프라우다》는 “파시즘은 전쟁! 사회주의는 평화!”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극히 심각한 불안감이 점점 더 세계의 근로자들을 짓누르고” 있으며, “세상에 전쟁의 먹구름이 감돌고 있다“고 알렸다. 스탈린이 잡고 있던 화두는 전쟁이었다. 스탈린은 전쟁 대비에 전력을 경주했다. 

그를 불안케 한 것은 키로프 암살사건 이후 더욱 활발해진 “제국주의 스파이들의 암약”이었다. 1937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 생활의 결함과 트로츠키파 및 기타 양면주의자들의 박멸 방법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문서를 들고 단상에 오른 스탈린은 당원들이 “경제 캠페인과 경제건설 전선에서 거둔 큰 성공”에 몰두한 나머지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볼쉐비키에게는 첫째, 자본주의적 포위가 존재하는 동안 “외국 요원들이 소련 후방에 잠입시킨 파괴암해분자, 스파이, 교란분자 및 암살자들”이 국내에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 둘째, “파괴암해분자, 스파이, 교란분자, 암살자들의 흉폭하고 무원칙한 도당”으로 변신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외국 첩보기관의 명령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의 적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가진 힘은 그들이 당원증을 갖고서 신뢰를 악용하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기만하고, 소련의 적들에게 국가적 기밀을 제공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권리가 없었다. ‘인민의 영도자’는 “당 지도간부들의 이데올로기적 수준과 정치적 단련성을 높이고, 등용을 기다리는 젊은 인재들을 간부진으로 합류시킬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우리의 길이 있으며, 그를 통해 우리는 진정 레닌식으로 우리 간부들을 양성하고 또 양성해야 합니다. 당의 말단조직에 있는 10만2000명의 제1서기, 3500명의 지구당 서기, 200여 명의 시당 서기, 100여 명의 주당 서기, 그리고 민족공산당 중앙위원회야말로 재교육되고 완전무결하게 되어야할 지도간부들입니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각급 당서기 전원에게 유능한 부(副)서기 두 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차례로 당 교육기관으로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1937년 5월까지 “모든 당 조직에서 서기 선거를 실시할 것”도 의결했다. “볼쉐비즘을 숙지하자!”는 슬로건과 더불어 “간부의 단련”을 위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1937년 5월 실시된 당 서기 선거 결과는 60∼70%대의 재선률로 나타났다. 그것은 “당 간부들의 근간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것이라 평가되었고, 결국 선거가 “볼쉐비즘의 위대한 힘”을 입증했다고 선전되었다. 

작전명령 제00447호, ‘인민의 적’과 투쟁

당 간부들의 점검을 성공적으로 마친 스탈린은 곧 사회 내 “불순분자들”의 제거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1937년 7월2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반소(反蘇) 분자들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고 그것을 각 민족공화국 및 주(州)의 당 서기들에게 전문으로 보냈다. 그것의 내용은 첫째, 각 유형지에서 형기 만료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옛 부농 출신자 및 형사범들이야말로 각지에서 자행되는 각종 반소비에트 범죄 행각의 주모자들이며, 둘째, 그들 중 소비에트 권력에 아주 적대적인 자들은 즉각 체포 총살하고 덜 적대적인 자들은 체포 추방할 수 있도록 각 서기들은 자기 관할구역 내에 있는 그들의 실태를 파악할 것이며, 셋째, 반소 분자들을 심사할 기구로 “3인회”를 구성하는데, 각 서기들은 이 “3인회”에 들어갈 인물의 명단 및 총살되거나 추방되어야 할 반소 분자들의 인원수를 파악 집계하여 5일 내에 중앙위원회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국의 지시는 곧 이행되었고, 위 전문에 의거하여 1937년 7월30일자 내무인민위원부 작전명령 제00447호 〈옛 부농 출신자와 형사범 및 그밖에 다른 반소 분자들에 대한 탄압 작전에 관하여〉가 발령되면서 ‘인민의 적’과의 투쟁이 본격적 국면으로 진입했다. 

작전명령 제00447호는 탄압 대상을 두 범주로 구분하였다. 소비에트 권력에 아주 적대적인 첫 번째 범주는 “3인회”의 심의를 거쳐 즉시 총살케 했으며, 두 번째 범주는 8∼10년 동안 교정노동수용소나 감옥에 가두게 했다. 또한 거기에는 각 지역별로 탄압 대상 인원수가 두 범주로 나뉘어 구체적으로 명기되었고, 각 민족공화국과 자치공화국 및 주에 설치될 “3인회” 구성원 명단도 포함되었다. 

“작전”은 8월부터 시작되었다. 대개 “3인회”는 민족공화국, 자치공화국, 자치주, 주(州)의 내무인민위원부 각 단위지역 책임자, 해당 지역의 당 서기와 해당 검사로 구성되었다. 이들 3인은 아무런 제한 없이 “판결”을 내렸으며 형의 집행을 명령했다. 

많은 소비에트 인민들은 권력의 선전과 선동에 부응하여 ‘인민의 적’을 색출하는 데 열중했다. 투서와 밀고가 난무했다. 각 지역의 “3인회”는 탄압 대상 인원수를 늘리겠다고 경쟁적으로 요청했다. “작전”에 이른바 사회주의적 경쟁이 이루어지면서 체포자 수가 급속히 증가되었다(내무인민위원부 작전명령 제00447호에 원래 규정된 체포 대상 인원은 총 26만8000명으로서, 첫 번째 범주(총살)가 7만5950명, 두 번째 범주가 19만3000명이었다). 고문을 합법화한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 덕분에 “작전”은 고도의 생산성을 과시하며 전개되었다. 희생자는 정치국의 〈결정〉이 규정한 “반소 분자들”에 그치지 않았다. 탄압은 최근 정비된 당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경우에 따라 “3인회” 구성원도, 당 중앙위원도 체포되어 자신이 ‘인민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입증해야 했다.

1938년 1월, 《프라우다》는 이렇게 보도했다.
“최근 한 해 동안 1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지구(地區)와 주(州)에서 연방 및 공화국 인민위원부의 지도 업무에 발탁되었다. 그야말로 10만 명 이상이! 이 수치 하나가 우리나라의 위대한 도약과 위대한 스탈린식 승리의 표현인 것이다. 인민들 가운데서 당원, 비당원 선구자들을 발탁하여 지도업무로 중단 없이 등용하는 것은 레닌-스탈린당의 정책적 기본원칙 중 하나이다.”

1937∼38년 대숙청 시기에 스탈린은 한꺼번에 세 개의 “작전”을 전개했다. 그것은 첫째, 당과 군 간부들을 신뢰 가능한 세력으로 교체하는, 둘째, 옛 반대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끝으로 후방의 “반소 분자”나 “불순분자”를 제거하는 작전이었다. 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여 “소비에트 사회의 도덕적-정치적 단결”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추구하였다. 정책 변화는 1938년 4월부터 감지되었고, 동년 8월 숙청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사회주의 승리 문제는 ‘두 개의 상이한 문제’

1938년 2월 스탈린은 자신의 일국사회주의론을 설명하는 글을 《프라우다》에 게재했다. 그에 의하면,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 문제는 두 개의 상이한 문제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 “국내적 관계의 문제, 즉 계급관계의 극복과 완전한 사회주의의 건설 문제”와 둘째, “국외적 관계의 문제, 즉 군사적 개입 및 구(舊)체제로의 복고 위험성으로부터 나라의 안전을 완전히 보장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두 번째 문제, 즉 국제적 관계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민의 영도자’는 “부르주아적 관계의 복고로부터의 완전한 보장이라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오직 국제적 규모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제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라는 전략목표 달성을 위한 또 하나의 과제가 부과되었다. 스탈린은 그들에게 자본주의적 포위를 격파하기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명하였다. 

“우리 붉은군대와 붉은함대, 붉은항공대, 국방·비행·화학·건설후원회를 전력을 다해 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 인민 모두는 군사적 침공 위협에 직면하여 어떠한 ‘우연성’도, 외부의 적들이 부리는 어떠한 간책도 우리를 불의에 습격할 수 없도록 전투준비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한다.” 

스탈린이 개진한 논리에 따르면, 대숙청의 긍정적 결과는 당이 “유해하고 적대적인 분자들”로부터 정화됨으로써 더욱 강인해졌으며, 소비에트 사회의 “균질성과 내부적 단결”이 실현된 덕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붉은군대의 후방과 전선(戰線)은 더욱 강고해질 것이라는 데 있었다. 볼쉐비키당은 “새롭고 젊은 간부들”을 등용함으로써 완전한 인적 쇄신을 이루었다. 이와 관련해서 1957년에 소련공산당 제1서기 N. 흐루쇼프는 격한 분노를 토로했다.

“제17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 중 98명이 [대숙청 기간에] 제거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41명에 불과합니다. 당 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 대다수도 제거되었습니다. 1966명의 대의원 중 반(反)혁명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1108명이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848명이 총살되었습니다.”(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조사하여 1963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37∼38년 사이 137만2392명이 체포되었고, 그들 중 68만1692명이 총살되었다) 

물론 스탈린의 입장은 달랐다. 1939년 3월 제18차 당 대회에서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제18차 대회에는 약 160만 명의 당원이 대표되어 있고, 이는 제17차 대회 때보다 27만 명이 적은 숫자입니다. 여기에 나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더 좋아진 겁니다. 왜냐하면 당이 추악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더욱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소비에트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화신이었으며, 소비에트 인민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지배한 정치적 원리였다. 대숙청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 대비 일환으로 스탈린이 기획한 참사였다. 그런데 그것이 진행되고 있을 때 소비에트 사회의 분위기는 암울하지 않았으며, 인민들이 오히려 희망의 노래를 구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시대의 패러독스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10월혁명 후 소비에트 사회는 극도의 결핍과 고난을 강요받았지만, 많은 인민들은 맑스-레닌주의 및 스탈린주의의 이론과 전술, 전략에 의해 고취되는 바를 믿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에 헌신했으며 ‘인민의 영도자’에 대한 지지와 신뢰를 표현했다. 1941년 6월 독일군의 침공이 개시된 후에는 “국가가 된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미증유의 고통을 인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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