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와 패배주의 역사관의 청산을 위하여, 첫 번째 글

▲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에게 빼앗겼다가 136년 만에 장기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조선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 [사진 뉴시스]

1. 상선을 위장한 《제너럴셔먼》호의 정체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대동강에 들어와 교역을 하자며 행태를 부리다가 평양 관민(官民)들의 격분을 사서 소침된 미국 선박이다. 5년이 지난 1871년 미국은 이 사건을 조사하겠다며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나는 이전까지는 서양의 개항 요구에 주도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답답해하면서 “상선에 불을 질러 미국의 침략 명분만 준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미국의 한반도 개입과 지배야욕이 갈수록 노골화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시작이었던 《셔먼》호 사건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논점은 《셔먼》호가 과연 상선이었는지 여부이다. 이제까지 나는 《셔먼》호가 미국 정찰선 역할을 겸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선이라고 보는 축이었다. 이 무렵 미국이 굳이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까지 갖지 못한 단계라는 막연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셔먼》호의 정체를 알려면 당시 미국의 식민지 정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본격적인 식민침탈 단계였다면, 《셔먼》호는 미국의 조선 침략 척후대였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보통 무역선이었을 것 같다.

과연 당시의 미국은 미국이 유럽의 열강들처럼 본격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설 단계가 아니었을까? 1854년 폐리 제독이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켰지만, 1861년∼1865년 남북전쟁으로 아시아 침략은 보류되고 국내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으니 식민지 쟁탈을 본격화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킬 시간을 벌기도 했다. 그렇지만, 1850년대부터 미국이 식민쟁탈전에 나설 단계가 아니었다는 생각은 미국의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 대한 완전한 무지였다. 미국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급속히 유럽 수준의 산업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미국 남부는 아직 아프리카 노예를 기반으로 한 면화 생산 등 농업을 위주로 한 경제였지만 북부는 이미 1830∼40년대 유럽 수준의 산업자본주의로의 발전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그에 따라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한 침략 정책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이다. 1848년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빼앗은 결과 희망봉을 우회하는 항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태평양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즉 청나라를 둘러싼 유럽 열강들과의 쟁탈전에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1850년대 초 상해에 입항한 외국 선박 중 미국 선박이 47%로서 영국을 압도하게 되었다. 미국은 태평양 횡단 항로를 만들기 위해 조선과 일본을 주요 침략대상으로 삼고 부산을 <샌프란시스코–상해>간 항로를 위한 중간 기착지로 만들려고 하였다.(《가쓰가이슈 전집》Ⅰ 도쿄) 조선연해에 대한 미국 선박의 침입도 빈번해졌는데, 1853년 1월 경상도 동래부 용당포 미국 포경선 '싸우스어메리카'호 침입 사건. 1855년 7월 미국 포경선 '투 브라더즈'호 선원, 강원도 통천 난파 사건 등이 그 예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은 영국 등에 비해 늦어진 식민 쟁탈전에 적극 끼어들기 위하여 다른 열강들이 손을 뻗치지 못한 중국 동북부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조선은 중국 동북부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1860년 중.러 베이징 조약 체결로 우수리 지역이 러시아로 편입됨에 따라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인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단순한 기항지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어 미국의 대아시아 침략전쟁을 보장할 수 있는 침략 거점으로서 의미로 격상된다.

미 국무장관 씨워드는 동방과의 무역은 ‘우리를 아시아 대륙에 접근시켰으며 새로운 사태는 우리들 지위에 비상한 변화를 일으켰다. 아시아 대륙에 식민지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조우하였다.’라고 하였다.(《태평양에서의 미국》 1932년) 러시아 주재 미국 공사 크레이는 미국의 아시아 침략에서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위치를 강조하면서 이 지역에서 미국의 기지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아시아 침략에선 《육군과 해군이 튼튼히 의거할 수 있는 기지》를 창설하여야 하며 《지브로울터와 같은 의의를 가지고 있는 조선 남해의 거문도를 우선 점령하여야 한다.》고 하였다.(《짜르 궁전에서의 캔터기인》 1935년)

1866년부터 미 국회에서 조선에 대한 무장간섭을 조직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1866년 2월 《샤를》호 부산 앞바다 침입사건, 5월 《서프라이즈》호 평안도 선천포 표류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프랑스가 조선의 카톨릭 탄압을 핑계로 조선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프랑스에 조선침략 포기를 종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급해진 미국은 프랑스보다 한발 앞서 부랴부랴 남북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군함 《셔먼》호를 조선에 파견하게 된다. 이처럼 《셔먼》호의 조선침입은 우발적으로 감행된 침입사건이 아니라 183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186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실천 단계에 들어선 미국 자본주의의 조선침략정책의 필연적 산물이다.

2) 《제너럴셔먼》호가 국적불명의 상선으로 위장한 이유

그런데 《셔먼》호는 왜 국기도 게양하지 않은 채 상선으로 위장했을까? 그러다보니 국적불명의 해적선이 평가도 있다. 신미양요 때 미국이 《셔먼》호에 대한 진상조사를 명분으로 침략해왔지만, 사실은 미국 배도 아닌데 침략명분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분명히 《셔먼》호는 조선을 개방시키기 위한 미국의 침략정책을 관철, 집행하기 위한 척후대였다. 당시 조선이 서양과의 교역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상선으로 들어와서는 말로는 개항압력을 가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유럽 열강이 군침 삼키며 조선을 노리고 있는데 버젓이 군함을 끌고 들어오게 될 경우, 뒷감당이 어려울 수 있었다. 그런 조건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이 사실상의 군함을 국적불명의 상선으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셔먼》호는 침략 목적을 위장하기위하여 1866년 6월 천진에서 영국 메도우즈 상사와 용선계약을 맺고 유리그릇, 면포, 시계 등 서양 잡화들을 구입하였다. 6월 18일 ‘선원들이 건강회복을 위하여 경치 좋은 조선 산천 구경을 떠난다.’는 소문을 내고 천진을 떠나 6월 28일 조선 침략의 길에 올랐다. 선상에는 2문의 포가 보란 듯이 걸려 있었고, 또 2문의 포가 감추어져 있었다. 또 많은 장총들과 단총, 환도, 포탄과 탄약들이 가득했다. 자연히 조선으로 떠나는 첫날부터 의심을 받을 만했다. 프레스톤 일당도 조선 지방관들에게 ‘우리 배는 군함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자인하였다.《일성록》

협상 차 승선했던 조선 관리들의 기록을 보면 《셔먼》호에는 프레스톤, 토마스, 조반량 같은 미국인 영국인 덴마크인 중국인 등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여러 나라 해적무리들의 집합으로 보면 안된다. 선주로 알려진 프레스톤은 미국의 1등 무관이었다. 미군 해군 소속 함선은 반드시 미 국무성의 승인 하에서만 해외로 파견될 수 있었다. 황주 목사 정대식이 ‘당신들의 배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온 여부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하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해줄 수 없는데, 바로 나라 일과 관계되기 때문’이라 말했다고 기록하였다.

3. <은인의 나라>가 아닌 침략자 미국의 실체를 분명히 보아야한다.

오랫동안, 이 무렵의 미국은 식민지 침탈이 필요하지 않았으리라는 잘못된 인식이 우리를 지배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은인의 나라 美國’라는 이미지가 우리국민들에게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조선말기 에서부터 나타난다. 청나라 관리 황준헌이 써서,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홍집에게 주었다는 《조선책략》. 이 책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친중국(親中國)ㆍ결일본(結日本)ㆍ연미국(聯美國)하라’는 것인데 미국에 대한 설명이 눈길을 끈다. 미국은 정의의 나라니까 조선을 이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며 애초에 영국의 폭정에 반발하여 독립 및 건국한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조선을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은 조선 개화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고종과 지배계층이 미국에 대해 일방적인 호감을 갖는 근거가 되었다. 이웃 열강들이 모두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모략을 다 부리는데, 영토적 야심도 없이 친절을 베푸는 나라! 처음부터 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졌다고 하니 얼마나 이상적인 나라인가? 미국에 대한 환상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을 기념하여 1883년 외교사절단 보빙사(報聘使)를 통해 굳건해 진다. 고종은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 개화파 인사들로 미국을 돌아보게 했다. 또 고종은 1885년 다른 나라 경쟁자를 물리치고 미국 공사관 의사였던 알렌에게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전신)을 맡기게 된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을까? 미국은 1850년대부터 우리를 대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는데, 우리는 ‘친근하게 우리를 보살펴주는 나라’의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식민지 침탈을 대가로 만들어진 자본주의 화려한 외양>에 속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대한 환상은 커졌으며 급기야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인천항에 나갔던 환영 인파 중 일부가 미군의 총에 맞아 2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착각한 탓이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시각은 여전히 ‘은인의 나라’였으며, 결국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최고의 강자. 미국에게 기대어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만드는 치욕을 범했다.

《셔먼》호 사건에 대한 평가는 미국 사대주의적 역사관의 종말을 찍는 첫 작업이 되어야 한다. 다음번 칼럼에서 《셔먼》호의 만행과 평양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역사적 의의에 대해 다룰 생각이다. 《셔먼》호는 미국 조선침략의 첫 신호탄이었으며, 조선 민중들에 의해 전원 몰살되는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었다. 이 사건이 미국의 조선침략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첫 번째 침략을 물리치고, 이후로도 미국의 대조선 침략을 어렵게 만드는 첫 번째 투쟁이었다. 이것이 《셔먼》호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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