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의 민족 이야기] 민족성과 민중성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1. ‘공무도하가’가 왜 귀중한 민족문학의 역작인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에 있었는데 요즘도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고조선에서 불렸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와 노래! 처음 들었을 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물속에 빠진 임이나, 말리지 못하는 여인이나... 공무도하가의 배경설화는 더욱 아리송하다.

▲ 곽리자고(藿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 공후인(箜篌引)의 공무도하가
고조선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아침 일찍 배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백발인 사람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술병을 들고 물을 건너고 있었다. 뒤쫓던 그의 아내가 소리치며 막았으나, 결국 그는 물에 빠져 죽었다. 그의 아내는 공후를 뜯으며 슬프게 노래를 부르고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그 장면을 자신의 아내 여옥에게 일러 주자, 여옥이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이웃에 사는 여옹에게 알려졌으며 점차 널리 펴졌다.

이런 으스스한 공무도하가가 중국 역사책에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아 고조선에서 그만큼 널리 보급되었다는 건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공감하기 어려웠다. 오딧세이나 일리아드 같은 서사문학도 아니고, 인간의 가치를 형상화한 철학적 소재도 아니고, 한 부부가 물에 빠져 죽은 이야기? 이렇게 소박할 수가... ???

그런데 고조선을 공부하다 보니 이 시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고조선은 노예제 국가였다. 노예제 국가란, 국가의 생산과 발전이 주로 노예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던 사회, 생산물을 전부 노예 소유주들에게 빼앗기고, 결국 무덤까지 끌려가 순장당할 수밖에 없던 사회였다. 노예들만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것은 아니다. 소농이나, 하호(농토가 없는 평민)들도 가혹한 삶을 살아야 했다. 중세 봉건시대나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도 기득권 계층이 아닌 일반 민중들의 경우 삶이 팍팍하고 가혹한데,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야 오죽했을까! 고조선의 8조 범금을 보면 도둑질을 하면 ‘단순한 금전적 배상이나 감옥행’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노예로 전락되는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도둑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조선 민중들을 생각해보면 삶의 고달픔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물에 들어가 자살한 부부! 고조선 민중들의 고통의 무게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인 문학과 예술은 해당시대의 삶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하는데, 공무도하가는 고조선 민중들의 삶의 고뇌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뛰어난 문학임을 철이 들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즈음 공무도하가가 주는 감동이 노래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관련 설화에서 보듯이 노래가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과정이 고조선 민중들의 ‘공감능력과 소통능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에 나오는 뼈아픈 장면을 듣고, 고조선 사람들은 자기의 삶과 일치시켰으며 함께 슬퍼했다. ‘곽리자고’나 ‘여옥’, ‘여옹’은 고조선의 평범한 민중이며 물에 빠져죽은 부부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공무도하가는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창작된 것으로 사회적 불합리로 인해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는 가난한 백성들의 비극적 운명을 반영하고 있다. 또 남의 불행과 슬픔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공감을 표시한 고조선 사람들의 정신세계, 진실한 표현과 생동성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 민중들의 공감능력, 소통능력, 이웃과 고통을 나누고 함께 슬퍼할 줄 아는 능력은 지금도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비록 살기 팍팍한 노예제 사회였으나, 민중들의 마음은 따뜻하며 공동체 의식도 강하다. 우리와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이 사회가 비할 바 없이 오염되어 있으나, 공동체 의식이 뛰어나고 공감능력과 따뜻한 마음을 감성으로, 시와 노래로, 춤과, 미술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공감과 소통능력이 공동체와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결집, 촛불로, 민족의 힘으로 거듭날 수 있는 원천이다. 

2.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 - 고조선 문화의 창시자는 민중이었다

나라의 문화는 기득권층이 아니라 민중들이 만든다. 고조선 문화도 마찬가지이며 일상적으로 자연을 개조하기 위해 노동을 했던 이들, 고조선의 소농, 하호, 노예 등 민중들이 만들고 개척한 문화이다. 사람의 시신을 다루면서 인체의 구조를 알게 되었고, 그런 경험 속에서 세계적 첫 침치료인 고조선 <돌침 치료법>을 발견했다. 고조선 때 이미 우리민족만의 고유한 <온돌문화>를 창조하였으며, 농사를 짓기 위해 천문을 연구하여 고인돌에 정확한 별자리를 새겨 넣었다. 또 우리 고유의 누에인 석잠누에 치기로 비단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익숙하면서도 의외로 그 가치를 잘 모르는 우리 민족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고조선의 대표 유물인 청동기 문화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우리 청동기는 발상지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보다 시기적으로 뒤지지 않는다. 

연대 측정 결과, BC 4000년기 후반기에 청동기를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고조선 성립 이후인 BC 3000년기 청동기는 다른 고대문명보다 발전된 수준이었다. 우선 고조선에서는 청동거울과 청동검, 청동방울 등 쓰임새에 따라 구리, 주석, 납의 합금비율을 달리했다. 구리는 청동기 주원료이지만, 굳기가 약하므로 주석 비율에 따라 용도가 달라진다. 유물들의 성분을 조사해보면 쓰임새에 따라 조성 비율을 정확하게 달리했다. 

또 고조선 청동기는 구리-주석-납을 기본으로 하는 3원소 합금제작법의 제작 방식이 특징적이다. 납은 잘 늘어나고 퍼지는 성질을 더해주므로 제품의 주조성을 높이기 위하여 첨가하는데 이는 오랜 경험과 축적된 기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이란의 BC 31세기경 유적에서 나온 청동기는 구리와 비소의 합금이며 구리-주석-납의 3원소 합금 기술은 BC 24세기경에 개발되었다. 시리아 초기 청동기 화학조성은 구리-비소-니켈이다. 고조선에서 이처럼 뛰어난 청동기를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들은 바로 일선에서 노동하고, 전쟁도 직접 치른 민중들이었다. 

고조선 민중들이 만들었던 청동기는 문화적으로도 우수하다. 청동거울인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은 불과 지름 21㎝정도 크기 안에 0.3㎜ 간격으로 무려 가는 선 약 1만3000개를 새겨 넣었는데 현대에서도 불가사의한 기술이다. 또 비파형 동검만 봐도 우리민족의 슬기를 알 수 있다. 청동이 귀하던 시절, 청동 칼의 손잡이를 분리해 나무로 만들어 조립할 생각을 했던 이들... 칼의 날카로움과 함께 조형미를 생각했던 이들... 고조선 민중들의 슬기는 현대까지 우리민족의 슬기로움으로 이어진다. BC 3000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원에서 발굴된 2인 청동교예 장식품을 본 적이 있는가? 바퀴에서 떨어질까봐 아스라이 바퀴를 굴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여 웃음이 절로 나온다. 특히 이 청동교예 장식품은 청동방울과 함께 출토되어 교예와 음악을 함께 순장한 고조선인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가치 있는 모든 문화와 문명은 귀족계급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시대 민중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노예 소유자,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갖가지 수구적인 사상들로 현란하게 치장하는 동안, 민중들은 실사구시하며 물건을 제작하였고 과학적으로 타산하여 생산력을 높였다. 또 민중들은 집단적으로 노동하면서 더욱 뛰어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노예 소유자, 귀족들은 민중들이 만들어낸 온갖 재부를 수탈하고, 자기들만의 것으로 독점하였지만, 민중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과 문화로 민족과 전체 인류의 진보에 실제적으로 기여하였다. 

3. 민족은 민중이며, 민중을 떠난 민족은 사이비이다

우리 민족의 경우 고조선의 성립 이후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등을 거치며 다시 고려로 통일되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면면히 단일민족을 유지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민족문화의 원형은 그 후 면면히 계승 발전됐다. 반만년 동안 발전하고 가꾸어진 우리 민족문화는 우리 민족의 특성과 슬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으며 예술, 과학, 생활문화, 그리고 나아가 민족의 얼인 정신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말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민족성과 민중성은 사실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민중성을 배제한 민족문화는 가짜이다. 일하는 사람들, 민중들의 애환 속에서 피땀으로 이루어낸 문화가 알짜배기 우리 민족문화이다. 민중성을 떠나 민족문화는 없으며 민족문화로 발전하지 못한 민중문화는 오래 보존될 수 없었다. 

우리 고대 고조선 문명의 위대함을 이야기할 때에도 또 고구려의 기상과 삼국시대의 찬란한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일구어낸 실제의 사람들, 그 시대의 민중들을 떠올려야 한다. 때로는 공무도하가의 슬픈 시로 공감, 소통하고, 때로는 슬기로운 뛰어난 문화의 창조자로, 때로는 외세의 침략에 단호하게 맞선 자주적 군대로…. 우리 민중들은 우리 민족의 삶을 지키고 발전시켜온 민족의 산 주역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기로운 민중들이 열어가는 민족 자주의 길, 진보의 길, 이 길에 서서 유난히 빛나는 올해의 가을을 정겹게 느껴본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