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잣집 고학생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 아들 안영민 씨(오른쪽)를 통해 안재구 선생님의 대학 시절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진 민족21]

읽어주고 받아 적는 강의지만 그런 강의라도 듣기 위해서는 학비가 필요했다. 그래야 학점도 따고 졸업장도 받을 수 있다. 가족을 떠나 대구에 홀로 나온 나는 먹고 입는 돈도 필요했고, 잠자리도 있어야만 했다.

대학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은 어머니가 여름 내내 머리카락이 빠져 훤하도록 물동이를 이며 물주고 가꾼 고추농사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다. 가을햇볕이 좋아 곰팡이도 안 피고 빨갛게 잘 말린 고추를 구지 장날에 좋은 값으로 내다 판 덕으로 수월하게 장만할 수 있었다.

하지만 2학기 등록금부터는 내가 직접 해결해야만 했다. 사범대라서 등록금이 다른 학생의 3분의 1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나는 여름방학 동안 경북 북부지역에 있는 초등학교를 돌면서 공책, 연필, 그리고 자질구레한 학용품을 팔아 이문을 남겼다. 이때는 초등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대구국민학교에서 교육실습을 하면서 사귄 동기 선생님들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역을 돌 때마다 서로 식사 대접을 하고 재워준 선생님들 덕택에 나는 2학기 등록금은 물론 자취방을 얻는 여유도 누릴 수 있었다. 참으로 따뜻한 인정미가 넘쳐나는 시절이었지만 세월이라는 지우개가 지워버려 그 선생님들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모습도 떠올릴 수 없다.

1952년 2학기부터 나는 대구 대봉동 경북중고등학교 동편에 있는 신천 제방 가에 자취방을 구해 생활했다. 신천을 끼고 널찍한 채소밭이 펼쳐져 있던 이곳은 두어 달 전부터 판잣집들이 들어서더니 어느새 제방 가를 가득 메웠다.

당시 전선이 두 번이나 밀고 당기는 통에 38선 이북 동포들이 피난을 왔고, 서울이 비록 수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전선이 안정치 못해 나라의 통치기관들도 환도하지 못하고 대구에 그대로 많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 묶여 있는 사람들과 국방부 직할부대 및 산하 기관의 사람들이 대구에 적지 않았다. 또 정세가 안정되어 생산 공장도 많이 생겨나자 노동자들도 대구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주택문제가 날로 심각해졌다. 특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구주택을 세울 수는 없더라도 임시나마 살 수 있는 주택이 필요했다. 그래서 도심 주변으로 판잣집 동네가 이루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대봉동, 봉덕동, 신천동, 칠성동, 원대동의 판자촌이었다. 이러한 판자촌의 형성은 대구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대전 등 일거리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드는 주요 도시마다 이루어졌다. 또 미군이 주둔하는 부대 곁으로는 미군들의 전용 위안소, 이른바 ‘양공주’ 동네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 판잣집은 대개 두 치 각목이 기둥이고, 벽체는 사과상자로나 쓸 판때기였다. 온돌은 부엌아궁이부터 비스듬히 구들돌을 배열해서 윗목 골을 두고, 그 위에 미군 부대에서 나온 석유나 경유 드럼통의 뚜껑을 떼고 판으로 펼친 철판을 덮었다. 그 위에 다시 흙을 두 치 두께로 덮은 뒤 황토로 초벽을 치고 온돌을 놓았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장판을 깔거나 풀로 발라서 온돌을 완성했다.

이런 어설픈 온돌은 초저녁에는 방구들이 자글자글 끓다가 좀 지나면 싸늘한 냉돌로 되고 말았다. 그리고 군불을 많이 때면 종종 벽체 나무판자에 불이 붙어 집이 타고, 이웃으로 번져 온 판잣집 동네가 대화(大火)를 겪기도 했다.

38선 이북에서 넘어온 동포들이 이룬 판자촌 마을에는 이북 취향이 물씬 나는 냉면집과 만두집이 많아 이남의 동포들도 애용하고 있었다. 특히 이북 동포들은 미군 부대 물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시장을 중심으로 절박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대구에는 주로 교동시장이 이북 동포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이들의 근면하고 강한 생활력은 남녘의 동포들에게도 큰 삶의 배움을 주었다.

당시는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입학시키려고 하는 세상이었다. 부모나 당자 학생이나 대학으로 못 가서 안달이었다. 물론 향학열이 대단히 높아져서 그렇기도 했지만 전쟁 통의 현실이 더욱 그러하도록 만들었다. 당시에는 누구나 만 20세가 되면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고, 병정이 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진단이 나오지 않은 한 군에 입대해야 했다. 병역법이 그랬다. 그런데 대학 공부를 하는 학생은 그 학업을 마칠 때까지 징집을 보류해주었다. 그래서 모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결사적이었다. 전선으로 끌려간 자식의 사망통지서를 받고 통곡하는 이웃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월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공부는 선후를 세워놓고 조금씩 체계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기초를 충실히 다지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실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부다. 그런데 설렁설렁 고등학교 졸업장이나 따려고 하다가 뒤늦게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자니 곤혹스런 노릇이었다. 그러니 다들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보다는 벼락치기로 시험에 나올 만한 것들만 가르쳐주기를 원했다. 학업이 이 지경이 되면 교육의 본래 의미는 없는 것으로 되고 만다. 그래서 대학 입시 합격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사설 강습소(학원)들이 번창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구에는 학원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수요가 넘쳐나다 보니 학원은 문을 열기가 무섭게 번창했다. 그러니 고등학교 선생이나 대학 강사, 심지어 교수들 중에서도 부업으로 학원에서 수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예 학원 강사로 전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수입이 좋았다.

당시 대구에서 유명한 학원 강사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요즘 말로 ‘스타 강사’라고 할 수 있겠다. 한 사람은 김해룡 선생으로 수학강사였다. 김해룡 선생은 원래 대륜고 수학선생이었다. 부업으로 학원에 나가 수학을 가르쳤는데 강의를 아주 잘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학교를 때려치우고 직접 학원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영어강사로는 단연 양주동 선생이 첫손에 꼽혔다. 당시 YMCA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양주동 선생은 와세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해방 이후 동국대 교수로 재직했던 분이다. 전쟁 통에 대구에 내려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학원에서 강의를 했는데, 특히 농담도 잘하고 강의방식도 독특해 인기가 아주 많았다.

이런 학원 강사 자리가 내게도 주어졌다. 한날은 영남고 이원복 선생한테서 연락이 왔다. 급히 좀 보자는 것이었다. 이원복 선생은 내가 영남고 3학년에 편입했을 때 수학교사로 재직 중이셨던 분이다. 나중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영남고에서 교편생활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셨다. 학교로 찾아가 뵈니 대뜸 자기가 하고 있는 YMCA학원 수업 중 일부를 내게 넘겨주시겠다는 것이다.

“안 군. 나는 고등학교 교사이고 생활도 안정되어 있어서 학원의 강사료가 그리 탐나지 않네. 대학에 입학해 여러 가지로 생활이 어려울 텐데 이번 학기부터 내가 맡고 있는 과목 중 일부를 안 군이 대신 수업해보도록 하게.”

“네? 학원 강의를요? 선생님, 저는 아직 학원에서 수업을 할 만큼 실력이 되질 않습니다.”

“하하, 안 군의 실력이 안 된다면 누가 실력이 되겠는가. 걱정 말게. 대학 입시 준비할 때처럼 준비해서 강의하면 될 걸세.”

“그래도 선생님 하시던 수업하고 차이가 많이 날 텐데요….”

“이미 YMCA학원 쪽에도 이야기를 했네. 그랬더니 ‘선생님이 추천하시니 마음 놓고 맡겨보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일은 어려서부터 해야 질이 난다고 하지 않나. 잘 부탁하겠네.”

나는 주저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원복 선생만큼 강의를 잘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원복 선생은 학원에서도 인기가 많은 명강사였다. 당시 이원복 선생이 내게 넘겨준 강의는 해석기하학과 삼각법이었다. 고등학교 수학 과목 중 그래도 내가 수월하게 강의할 수 있는 과목을 찍어서 주신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 이원복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나도 학원 강사를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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