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작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1

조국과 역사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을 작가와 책을 펴낸 ‘박종철출판사’의 동의 아래 연재한다. 작가는 ‘일흔한 분의 헌걸찬 어르신들께 바치는 한 점 향불’을 올리는 마음으로 6년여 간의 발품과 작업과정을 거쳐 원고를 완성했으며, ‘혁명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허물어진 혁명가들의 삶을 떠올려 보는 마음’을 보태고자 펴낸 책이라고 밝혔다. 소개되는 혁명가는 책의 순서와 달리, 작가의 동의 아래 민플러스 임의대로 선정 소개함을 밝혀둔다. 첫 번째 혁명가는 몽양 여운형 선생으로 이번이 마지막 편이다. [편집자]

 

 “사람의 머리는 늙을수록 희어지고 혁명은 늙을수록 붉어진다.”

▲ 1921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 참석한 여운형(좌측 높은 의자에 앉은) (사진출처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몽양은 더없이 직수굿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데다 또 더할 나위 없이 실쌈스러운 사람이었다. 박헌영과 쌍구슬을 이루는 ‘세계사적 개인’이었다. <여운형론>을 쓴 김오성은 말한다.

“우리나라에 박헌영 씨와 같은 투사형 지도자와 여운형 씨와 같은 정치가형 지도자가 있음은 원칙과 정책, 전략과 전술의 쌍벽을 가진 것으로 민족적인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분이 들이친 뒤에 다른 한분이 어루만져 수습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좋은 콤비이냐? 두 지도자는 서로 상이한 부면을 담당하면서 원칙적인 일치를 얻어 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오성은 그러면서도 몽양이 타고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마음결을 높이 꼲아 매기며(잘잘못을 따져 매기다) 몽양이 한 말을 든다.

“내 주장이 정당한 줄 의식할 때에도 여러 사람이 반대하거나 또는 다른 주장에 찬동할 때에는 내 주장을 포기하고 그 여러 사람의 주장을 따르겠다.”

1919년 4월 1일쯤이었다. 상해 불란서 조계에 조동호ㆍ이동녕ㆍ이시영ㆍ조완구ㆍ조성환ㆍ김동삼ㆍ조용은ㆍ신규식ㆍ신석우ㆍ여운홍ㆍ현 순ㆍ최창식ㆍ이광수ㆍ신익희ㆍ유치진ㆍ이규홍 같은 수십 명과 함께 독립운동 받침돌을 세우자는 뜻을 맞출 때였다. 몽양은 세 가지에 생각을 달리하였으나 수가 적어 맞설 수 없었다.

첫째, 사람들이 모두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하였는데 몽양은 ‘정부’는 안 되고 ‘당’으로 해야 된다고 하였다. 아무리 임시정부라고 하더라도 쳇것이 ‘정부’가 되면 정부 얼굴값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데 셈평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백성들 뜻을 다지르고 일본에 내버티는 뜻이 크므로 ‘정부’로 해야 된다는 것이었으니, 몽양 내댐은 현실론이고 다른 이들 내댐은 추상론이었다.

둘째, 나라이름 ‘대한민국’의 ‘대한’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였다. ‘대한’이라는 나라이름은 조선에서 오래 쓴 적이 없고 잠깐 있다가 곧 망해버린 이름이므로 되살려 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한’을 내세우는 이들은 “대한으로 망하였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몽양은 대한제국 황실을 잘 받들겠다는 것에 죽어도 맞섰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태왕(李太王)이 죽은 뒤 대한문 앞에 인민의 곡성이 창일하였다. 이것을 보면 민심이 아직도 황실에 뭉쳐 있으니 민심수습상 황실을 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대한민국임시헌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문을 넣었다. 이처럼 봉건사상과 관료주의에 전통관념 껍질을 벗지 못한 상해임정이었다. 그들은 대한문 앞 인민들 울음소리를 잘못 들었던 것이다. 망국의 울음도 아무 때나 울면 잡혀가므로 참고 있다가 고종 인산이라는 때를 얻어 터져 나왔던 울음이었지, 황실을 그리워한 울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만규(李萬珪, 1882~1978)가 쓴 『여운형선생투쟁사』에 임정 엉망진창이 나온다.

임시정부로 거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안창호가 오고 이동휘가 오고 이승만이 왔다. 이승만이 오기 직전에 그이의 위임통치 문제가 상해 여론이 물 끓듯 하였다. 그가 민주국민회의 명의로 조선을 위임통치하여 달라는 청원을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던 것이다. 이 말이 나자 신채호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북경 기타 지역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였다. 몽양은 이 일을 안창호에게 물었다. 안창호는 “이승만의 하는 일을 나는 모른다”고 하였다. 몽양은 다시 “듣건대 국민회의 명의로 보냈다면서 회장은 모르느냐?”고 반문하니 안이 역시 “모른다”고 하였다. 몽양은 다시 안더러 “그렇다면 이승만의 일은 오해를 풀 수가 없지 않은가. 민단 주최로 환영회를 할 터인데 그 석상에서 설명을 구하고 다시 재신임을 요청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승만은 민단 주최 환영회에 출석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몽양이 손중산(孫中山) 혁명의 일로 광동에 간 동안 민단 총무 장붕(張鵬)이 주최한 민단 환영회에는 출석하여 화관 씌우는 영예를 받았다.

몽양은 모택동과 몇 번 만났는데, 모택동혁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며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은 주대(周代) 800년 간에 원시공산주의 유속으로 정전법(井田法)을 써서 농민의 생활을 풍유하게 하였다. 진(秦)이 흥하자 전환하여 정전법을 폐하고 지독한 세를 많이 받아 농민생활에 위협을 주다가 2세에 망하고 동한(東漢)에 와서 유수(劉秀)가 농민의 인심을 얻어 혁명을 하고 주원장(朱元璋)이 또한 농민의 아들로 농민의 마음을 얻어 혁명을 하였으니, 지나의 혁명은 농민의 마음을 잃고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제 모택동의 혁명이 그 기초가 농민에 있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과 서있는 몽양선생

(사진출처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몽양은 레닌과 두 번 만나보았는데, 첫 번째는 일본공산당에서 손꼽히는 사람인 카타야마(片山潛)와 함께였고 두 번째는 손문 몸받은 구추백(瞿秋白)과 함께였다. 몽양이 본 레닌 느낌이다.

“관대한 덕량, 원만한 기질, 광박한 지식, 평범자약한 의표, 그리고 혁명가의 열정 모두가 과연 고대(高大)한 인물이었다.”

“동무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여 투쟁하겠는가?”

레닌이 편산잠에게 묻고 몽양한테도 물었다.

“동무는 일본혁명을 위하여 투쟁하겠는가?”

둘 다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레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와 소련과 폴란드 사이에는 소련의 우월성으로 저편의 감정을 도발시키고 의구가 생기며 같은 공산당끼리도 원만치 못한 일이 더러 있다. 비록 혁명가라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감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일본과 조선이 악수를 한다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터이니 힘쓰라.”

몽양이 소비에트식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조선에 일으켜야 한다고 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데, 레닌이 말하였다.

“조선은 농민의 나라이니 공산당운동이 먹혀들기 어려울 것이다. 농민들이 지니고 있는 민족주의를 공명시켜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그대로 지지할 게 아니라 개조시킬 필요가 있다.”

트로츠키와도 회담하였으나 트로츠키 영어가 서툴러서 많은 이야기는 못하였다. 손문을 만난 몽양이 “선생 머리가 벌써 희어졌다”고 하자 손문이 말하였다.

“사람의 머리는 늙을수록 희어지고 혁명은 늙을수록 붉어진다.”

공산주의에 대한 몽양 생각이다. 1931년 경성부심법원에서 진술한 것이다.

▲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미국대표와 함께 한 몽양선생 (사진출처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맑스의 이론에는 찬성하나 그대로 실행은 불가능하다. 조선 같은 데는 노농독재를 실행하여서는 아니 된다. 맑스주의는 소련에서는 레닌주의가 되고 중국에서는 삼민주의가 되었으니 조선에는 두 나라와 달리 하여야 한다.

이상으로 공산주의를 찬성한다. 실행문제에 있어서는 조선엔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 세계 각국 어디서든지 맑스주의는 그 형태를 변화시켜서 실행되고 있다. 소련까지도 신경제정책이니 5개년계획이니 하며 시대와 처소에 적응시켜 고쳐가며 실행한다.

조선해방에는 시종일관 조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나아갈 심산이다. 전체가 공산주의를 해야만 되게 되면 곧 공산주의를 실행할 것이요, 수정하여야 될 것이면 곧 수정하여 실행할 뿐이다. 결코 언제든지 일부 소수인을 위하는 운동자는 되지 않을 것이며 조선이 독립되면 나라 일을 민중 전체의 의사대로 해나갈 터이다.

박헌영이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하자고 할 때 ‘인민’이란 말이 너무 과격하니 그냥 「조선민주공화국」으로 하자던 몽양이었다. 무정 장군이 한 말이 있다.

“선생이 국내에서 혁명운동을 하기 위하여는 회색도 좋고 흑색도 좋다. 우리는 신뢰한다. 선생이 만일 혁명을 하다가 죽는다면 조선이 독립한 후 내가 귀국하여 시체라도 지고 삼천리강산을 돌아다니며 선전하겠노라.”

1945년 12월 우익 모임 「선구회」에서 한 여론조사다. 조선 지도자를 묻는 질문이다.

여운형 33퍼센트, 이승만 21퍼센트, 김구 18퍼센트, 박헌영 16퍼센트, 이관술 12퍼센트, 김일성 9퍼센트.

조선혁명가를 꼽는 갈래이다.

여운형 195표, 이승만 176표, 박헌영 168표, 김구 156표, 김일성 72표.

몽양이 쓰러졌을 때 수십만 인민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왜놈도 못했거늘 어째 선생을 죽였느냐?”

“선생의 피와 함께 인민은 살아있다!!”

“아! 우리의 지도자 몽양 선생. 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혁명에 흘리신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 있나니……. 반동의 총탄에 쓰러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위대한 죽음을 슬퍼하는 이 노래! 몽양의 유해를 둘러싸고 젊은 청년들이 흐느껴 운다. 고이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 갚으오리다. 몽양 선생 추모의 노래는 오고가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임종국이 쓴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 5)해방 후 좌파의 친일인맥 (1)건국준비위원회 어섯이다.

▲ 1947. 5. 24 근로인민당 창당시 연설하는 몽양선생 (사진출처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여운형(呂運亨) 1932년 7월의 가출옥 후 한때 친일단체에 관계하였다. 그가 관계한 친일단체는 조선대(大)아시아협회와 조선언론보국회 기타이다.

이중 조선대아세아협회는 1934년 3월 3일 서울에 사무소를 두고 발회식을 올렸다. 이 단체는 “아세아의 대세와 시국의 진상을 규명하며, 황국 대일본의 아세아 제국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전 아세아 제국의 자주적 평화를 확보하고,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실을 거(擧)하여 그 복지를 증진”한다는 목적 아래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행하였다.

1. 아세아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정세 및 아세아 제국의 국정(國情)의 연구와 그 보급.

2. 황도정신의 고취 기타 아세아 제국의 친선 단결을 위한 적절한 사업. 창립연도의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3월 6일 장곡천정(長谷川町, 소공동) 공회당에서의 가네꼬(金子定一) 대좌의 강연회, 6월 9일 조선호텔에서의 ‘아세아를 말하는 좌담회’의 개최와, ‘조선대아세아협회 팜플렛’의 발간 기타이었다.

이 단체의 역원은 회장 가또(加藤敬三郞) 이하 상담역 약간 명과 간사 10명 이내였다. 상담역은 1934년 현재 조선인 15명 일인 30명인데 회장의 추천으로 결정되며, 회의 중요사항을 심의하였다. 몽양은 여기에 상담역으로 관계하였다. 조선인 상담역 15명은 방응모(方應謨)ㆍ송진우(宋鎭宇)ㆍ여운형 3명을 제외한 12명이 최고의 친일거두들인데 참고로 이름을 밝혀둔다.

상담역 15명 : 고희준(高羲駿)ㆍ김명준(金明濬)ㆍ민대식(閔大植)ㆍ박영철(朴榮喆)ㆍ박영효(朴泳孝)ㆍ박춘금(朴春琴)ㆍ신석린(申錫麟)ㆍ예종석(芮宗錫)ㆍ원덕상(元悳常)ㆍ윤치호(尹致昊)ㆍ조성근(趙性根)ㆍ한상룡(韓相龍)의 12명과 방응모ㆍ송진우ㆍ여운형

이후 몽양은 1935년 10월 3~4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개최된 조선교화(敎化)단체연합회 발회식에 내빈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조선에 있어서의 교화사업의 진흥 보급을 도모함으로써 목적으로” 삼았던 이 단체는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ㆍ향약(鄕約)ㆍ부인회ㆍ수양단(修養團)ㆍ보덕회(報德會)ㆍ교풍회(矯風會) 기타 각파 종교단체를 총망라한 조직으로서, 정무총감과 학무국장을 정ㆍ부회장으로 하였다. 1923년 11월 10일, 이른바 ‘국민정신 작흥(作興)에 관한 조서’가 발표되자 일본에서는 그 조서의 취지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1924년 1월 15일 도꾜 36개 교화단체의 가맹으로 교화단체연합회를 결성한 후, 이것을 전국 조직적인 중앙교화단체연합회로 발전시켰다. 그 조선판인 조선교화단체연합회는 국민정신 작흥, 경신숭조(敬神崇祖)관념의 고취 인보상조(隣保相助)에 의한 공존공영정신의 함양 기타를 달성하기 위한 전선적 교화망의 완성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교화운동은 우가끼(宇垣一成)의 심전(心田)개발운동과 표리일체가 됨으로써 1920년대의 일선융화론을 내선일체ㆍ황민화운동으로 몰고 가는 가교역할을 하던 것이었다.

이후 몽양은 1939년 4월 9일자 『국민신보』(매일신보사 발행)에 일어논설 「현대청년을 격려함」을 썼다. 1945년 6월 8일 결성인 조선언론보국회에는 명예회원으로 참가하였다. 이 동안 1940~42년 무렵 몽양은 도꾜를 출입하면서 특무장교 다나까(田中陸吉), 우익 지도자 오까와(大川周明) 기타와 접촉을 가졌다. 대중(對中) 화평공작 기타에 협력하도록 종용을 받았으나 몽양이 요구에 움직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후 몽양은 1943년 제2차 피검에서 가출옥한 후 지하단체 건국동맹을 지도하였다.

▲ 사진출처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몽양의 경우는 약간의 친일단체에 가입 혹은 출석했다고 해서 곧바로 친일 변절로 연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상당한 이유와 동기가 있었겠지만, 어쨌든 가입한 것은 가입한 것이다. 이것을 1919년 11월 적도(敵都) 도꾜에 초빙되었을 때 보여준 비타협 선명노선의 얼마간의 변절로 해석한다면 필자의 억측일까? 이것은 1945년 8월 15일 정무총감 엔도(遠藤柳作)와의 회담에서 다시 한 번 대두될 수 있는 문제이다. 비타협 선명노선을 일관하는 한, 즉 일제의 통치권 자체를 불법인 것으로 부정하는 한 정권이든 치안이든 이양ㆍ인수가 거론될 여지는 없다. 몽양이 엔도의 치안협력 제안을 수락한 것은 결과적으로 일제 통치권의 합법ㆍ정당성을 승인하는 것이다,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 아니었는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다음 주에는 김원봉 편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작가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지효대선사 상좌가 됐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단편 <목탁조>가 당선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으나 그에게는 승적이 없었다. 1978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 <만다라>가 당선됐고 이듬해 장편으로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됐다. 중편 <황야에서>로 소설문학작품상을 받게 됐으나 주관사측의 상업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창작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집>, <국수>, <꿈>, 우화소설<염소>, 산문집 <미륵세상 꿈나라>, <생명기행> 등이 있다. 지난 3월에는 제1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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