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시인의 야매詩발관] 연재·1

1987년 11월 초,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시경체포조에 검거된 그는 가까운 옥인동으로 끌려가 24시간 동안 관절꺾기와 물고문을 받으며 온몸이 해체됐다. 자기 몸에 관절이 그렇게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하루에 평생 먹을 물을 다 먹으면 세포가 분열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체포에 실패한 안기부가 당장 남산으로 이첩하라며 시경을 협박하고 추적하는 바람에 그는 눈을 가린 채 계속 시경 대공분실을 옮겨다니며 취조를 받았다.

어느 날 그가 성장한 부산의 대공과 체포조 형사 5명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면담을 했다. 그때 27살의 짧은 생애 중 가장 긴 악몽 같은 나날 속에서 그는 농담반 진담반처럼 얘기하며 딱 한 번 긴장을 늦추고 웃었다.

“아이고- 이왕 이리 잡힐 바에야 우리한테 좀 잡혀주면 얼마나 좋노.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 누이는 뭐고 매부는 뭡니까?”

“아-따, 우리가 남이요?”

“그라머 짭새가 남이지, 내 동생이요?”

“어허- 쯧쯧쯧, 아, 우리 저-기 같은 부산 갈매기들 아이요!”

“예? 부산 갈매기요?”

“하모!”

“저-기 인천 갈매기들이 골 때린다고 웃심더. 지들도 짭새라고….”

“아따, 누가 골수 빨갱이 아이랄까봐 정 떨어지는 소리만 해쌌네.”

“근데 잡혀버렸는데 말라꼬 이까지 우르르 왔어예?”

“아, 우리한테 안 잡혀준 기 하도 억울하고 열불이 나서 당신한테 따지러 왔다 아이요! 현상금에다 2계급 특진까지 걸려 있는데, 에휴….”

“쯧쯧, 그물을 좀 잘 치시지….”

“말도 마이소! 우리가 당신 한번 잡아볼라꼬 몇 년 간이나 새빠지게 고생하며 별 지랄을 다 떨었다 아이요.”

“현상금이 그렇게 탐났십니꺼?”

“허허- 국가를 위해 불철주야 충성하는 우릴 뭘로 보고…. 글치만서도 솔직히 특진은 쪼께 아깝다 아입니꺼… 하하.”

“마, 지도 안 잡힐라꼬 새빠지게 고생했네요.”

“뭐, 그거야 우리 쌍방의 운명인데 우짭니꺼.”

“근데 뭔 지랄을 그렇게 떨었십니꺼?”

“말도 마이소. 나중엔 부산, 경남에 신통방통하다는 점쟁이들을 모조리 뒤져 점까지 봤다는 거 아이요!”

“예? 점을 봐요? 허허- 소매치기 잡범도 아이고 빨갱이를 잡는다카는 대공과 요원들이 과학수사는 안 하고….”

“아, 암만 과학수사를 해도 안 잡히는데 우얍니꺼. 점이라도 봐야지.”

“아, 암만 그래도 그렇지! 그래서 이 나라가 제대로 서겠십니꺼?”

“허허- 이 양반이 꼭 우리 서장님 같은 말씀을 하시구마. 당신 빨갱이 맞아요?”

“내 이 대갈삐에 뿔따구 보입니꺼?”

“아, 그거야 옛날 얘기고 요새는 마 골방 깊숙이 감췄삔다 아입니꺼.”

“그라머 저기 야구방맹이 가져와 이 골방 한번 뽀개보이소.”

“아따, 거 쪼깬한 양반이 듣던대로 골 때리네….”

“듣던대로? 여기 수사관들? 그래, 뭐랍디까?”

“보들보들한 독, 쫑이라고 합디다.”

“독종이 다 썩었구마…. 참, 그 점쟁이들은 뭐래요?”

“절대 못 잡는대요.”

“왜요?”

“빨갱이 주제에 인복, 여복이 억수로 많다고….”

“우하하하…!”

“근데, 진짜 점쟁이들 말대로 여복이 많았어예?”

“그건 마… 국가기밀이라예.”

“헛 참, 별놈의 기밀이 다 있구마. 그나저나 우찌 잡혔십니꺼?”

“아마 프락치 덫에 걸린 것 같십니더. 쯧쯧, 형사님들도 점쟁이 대신 프락치를 썼으면 잡았을지도 모르는데, 아쉽네요. 다음엔 그렇게 해보이소.”

“다음? 어, 언제요?”

“허- 참, 이 양반들이….”

“아, 그기 아이고 기냥 농담 한 번….”

“근데, 점 보고 복채는 다 내십니꺼?”

“아, 그건 마… 국가기밀이라예!”

- 이산하 <‘국가기밀’> 전문

 

 

★ 작년 가을, 개작해 새로 개정증보판이 나온 내 성장소설 <양철북>의 발문은 이문재 시인이 썼다. 이 시는 그 발문 속의 한 대목인데, 편집상 아쉽게도 빠졌다. 중이 제 머리 못 깎기도 하지만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시이기도 하다. 그 대신 시의 배경과 관계된 이문재 시인의 발문 일부를 인용한다.

앞으로 연재할 이 <야매詩발관>에서는 먼저 내 머리부터 깎은 다음, 손님들의 머리를 깎아나갈 것이다. 한때 경기불황을 대비해 부업으로 익힌 미용기술 덕분에 여성손님들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 다만, 이 이발관은 손님의 주문을 무시하고 주인 마음대로 깎는 원칙 때문에 ‘시발관’이라 야유를 받고, 또 단골도 사양하기 때문에 조만간 폐업될지도 모른다. 그나마 비교적 ‘종북좌파(從Book坐破)’스러운 유동인구가 많은 길목이라 통일전야까지는 연명하리라 믿는다. 그때는 내가 ‘詩다바리’로 나서 페친 여러분들을 모시고 청와대에서 아침 먹고, 평양에서 점심 먹고, 저녁은 멀리 백악관에서 먹으며 뒤풀이를 할 생각이다. 믿으시라. 이 야매詩시발관보다 대한민국이 먼저 폐업해 신장개업하는 그날을 위하여~!

“1983년에 시작된 나의 1980년대는 양극이 있었으니 한 극이 바로 이산하였고, 그 대척점이󰡐시운동󰡑동인, 즉 미성년자들의 언어유희라고 지탄받았던 상상력주의였다. 독자들은 믿지 않겠지만, 내가 기자 시절 ‘이산하’의 정체를 알게 된 것, 다시 말해서 ‘한라산’을 쓴 이산하가 바로 시인 이 륭이나 절친한 후배 이상백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1987년 9월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한라산 필화사건󰡑과 ‘인천지역 노동자 학습소조 사건’의 ‘수괴’로 TV 9시 메인뉴스와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됐을 때였다. 산하의 대학 운동권 시절, 비밀리에 그의 수많은 유인물들을 타자로 쳐준 내가 신문을 보고서야 알게 되다니!

이 사건은 안기부가 1987년 당시 노태우 후보의 소위 대선용 ‘용공조작사건’의 하나로 기획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산하는 그 ‘수괴’답게 2계급 특진에 보너스로 현상금 500만원까지 걸린 특급수배자가 돼 체포망은 더욱 좁혀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이런 파격적인 포상이 걸렸으니, 각 기관의 대공요원들은 체포조를 짜 더욱 검거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11월 중순에 결국 그 힘겨운 오랜 수배생활을 접고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된 이산하는 모처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있었고, 바로 그 시간에 부산의 아버지는 아들의 구속통지서를 받자마자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 비보를 장남인 산하도 취조가 끝나고 서울구치소로 넘어간 뒤 어머니의 면회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문수사 도중에 알게 되면 진도(?)가 나가는 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란다.”(시인 이문재, <양철북> 발문 중에서)

 

시인 이산하 경북 영일 출생으로 부산 혜광고 및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필명 ‘이 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면서 등단, 그해부터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 1987년 ‘제주 4·3항쟁’의 학살과 진실을 폭로하는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석방 이후 10년 절필 동안 전민련과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 실행위원, 국제민주연대 인권잡지 <사람이 사람에게> 초대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한라산>, 성장소설집 <양철북>, 산사기행집 <적멸보궁 가는 길>, 번역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프리모 레비 지음) <체 게바라 시집>(체 게바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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