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이론과 쟁점⑥] 내부 민주주의의 혁신을 위한 제안들

이제까지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에서 시작해 자유주의적 대의제와 독재라는 두 가지 형태의 왜곡, 정당 내부 민주주의를 둘러싼 이론과 쟁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정당 내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기발하고 참신하며 새로운 제도를 기대하는 독자들은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당 내부 민주주의를 위한 하나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집단이 가진 문화적 관습과 전통, 정당의 목표와 대중전략 등에 따라 다양한 형식과 제도가 가능하다. 어떤 제도와 형식을 택할지는 철저히 그 집단 성원의 심의와 판단에 달려 있다. 여기서는 그동안 제안되었던 몇 가지 방안을 간략하게 검토해 본다.

수평적 차원의 민주주의: 정치세력간 관계

우선, 수평적 차원의 정당 내부 민주주의에 대해 언급되어 온 정책들을 살펴보자. 대표적인 것은 정파등록제와 같이 당내 정파를 양성화하는 제안과 대의원 선출의 비례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① 정파등록제와 정책명부 비례대표제

그동안 가장 많이 거론되어온 내부 민주주의 방안은 아마도 정파등록제와 정책명부 비례대표제일 것이다. 브라질 사례를 바탕으로 간간이 논의되어 오던 정파등록제는 분당을 앞둔 2008년 2월3일 이른바 ‘심상정 비대위’에서 임시당대회 안건으로 제출하면서 현실적인 안으로 등장했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와중에 혁신계(신당권파) 주도로 설치된 ‘새로나기 특위’에서도 도입이 적극 검토된 바 있다.

▲정파등록제와 정책명부 비례대표제는 2008년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와 2012년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위에서 제안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분당 이후 제안세력이 주도한 정당에서도 시도되지 않았다.

2008년 제안된 정파등록제는 당내 정파가 핵심 구성원과 입장을 중앙당에 등록하고 정파 행사와 선거 출마자 명단을 공개하며 당은 등록된 공식 정파에게 당 공간과 매체 사용 등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이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 등록된 정파에게 더 높은 수준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미등록 정파에게 패널티 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정파등록제를 변용한 정책명부 비례대표제가 제안되기도 했다. 이 제안은 선거에 참여하고자 하는 당원들이 임기 동안의 주요 정치활동 방향을 적시한 문서를 제출하고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집한 후 권역별로 해당 명부에 대한 투표를 진행해 득표율에 따라서 명부별 대의원 의석수를 배정하자는 것이다.

이 제도들은 공공연한 비밀조직인 정파를 양성화한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당원 중심의 시각에서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반론은 정파등록제가 정파와 정파 간의 1차원적 권력관계에만 주목할 뿐 일반 당원의 당내 정치참여를 촉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가로막게 된다는 것이다. 정파등록제는 기존 정파조직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일반 당원이 당내 정치에 참여하려면 기존의 정파조직을 통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만들 가능성이 크다.

정책명부 비례대표제 또한 정파보다는 정책 차이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대의원을 배정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정책명부 작성 주체와 이 명부에 대한 투표를 조직하는 행위가 당내 정파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정파등록제와 동일한 효과를 낳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이 방안은 하나의 정당 내부보다는 비교적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집단 간 연합의 전술적 도구로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즉, 선거법상 이중당적이 허용되지 않는 조건에서 각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되, 최소한의 공동목표로 결집해 현재의 선거법 문제를 우회하면서 정치적 실리를 분할하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하나의 정당이지만, 사실상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정당이 연합을 이루는 방식이다.

그러나 가설정당으로 일단 합류하면 차후에 불만이 발생해도 재분리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당이 가설정당에 합류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지금은 진보정치진영의 대중적 영향력이 점차 줄고 파편화되어 있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공동행동을 위한 해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또한 이 구상은 철저히 전술적 입장에 입각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각 정당이 추구하는 전략적 지향 간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도 과제다. 물론 이것이 현실화하더라도 가설정당에 포함된 각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은 여전한 과제로 남는다.

② 단일이전가능투표제

한신대 강남훈 교수는 2011년 진보정당 내부 민주주의를 위한 방안으로 호주 상원의원 선거와 외국의 선진적인 주주총회에서 도입되고 있는 누적투표제도의 일종인 ‘단일이전가능투표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 방식은 투표시 유권자가 우선순위가 표시된 투표용지에 후보자들을 순서대로 선택해서 기입한 후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당선 기준치(quota)를 계산해 남거나 버려지는 투표를 다른 후보자에게 이전해 투표의 비례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당시 강 교수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이 방법은 그동안 패권주의 근절방안으로 도입된 1인1표제에 비해 소수파 대표를 선출할 가능성이 높으며, 당원들이 여러 정파의 후보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이 방식은 정당 내부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안이라기보다 당내 소수파도 비례적으로 대의원이나 중앙위원 자리를 할당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강조점이 있다.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가장 비례성을 보장하는 선출방식이라는 점에서 수평적 차원의 당내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로는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하다.

다만 집계방식의 복잡성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해결할 수 있더라도 바로 이 계산논리의 복잡성 때문에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단일이전가능투표방식을 통해 1인 선출하는 개표 알고리즘.

수직적 차원의 민주화: 일반 당원의 권력화

일반 당원의 권리에 기초한 수직적 차원의 민주적 대안들은 이미 많은 정당이 도입하고 있는 당원소환과 당원발의, 당원총투표제와 함께 당의 기층단위인 분회의 활성화, 지역·지구 총회 등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거나 제안되고 있다. 이 중 몇 가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③ 당원발의 총투표제

당원발의 총투표제는 일반 당원이 당내 주요 사항에 대해 직접 총투표를 제안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아마도 적지 않은 독자들은 이미 제도적으로는 당원의 다양한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데 왜 또 당원발의 총투표제를 언급하고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당내 선거를 제외하고, 당의 주요 사항에 대해 당원이 직접 총투표를 제안할 수 있는 정당은 녹색당이 유일하다. 총투표제도가 있는 다른 정당들은 대의체인 당대회에서 제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정파적 계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당대회에서 소수파가 총투표를 제안하려 해도 다수파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고, 다수파는 이미 당대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기 때문에 총투표 발의에 대한 동기가 없다.

이 제안은 과거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에서도 제안된 바 있으나 강령의 제정과 개정, 당의 합당과 해산에 관한 결정의 주체가 당원총투표가 되어야 하는지, 대의원대회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해 안건이 모두 반려되었다.

만일 현 시점에서 우리가 당원이 직접 제안할 수 있는 총투표제를 진지하게 다시 고민한다면, 단순한 투표를 넘어서는 몇 가지 대안을 덧붙일 수 있다. 사실 총투표라는 것은 해당 시점의 즉각적인 선호를 일순간에 모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제에 대한 깊이 있는 심의와 토론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유럽 신생 정당의 운영 방식은 단순히 주어진 의제를 결정하는 수준을 넘어 당원 스스로 다양한 의제를 직접 제안하고, 의제에 대한 투표와 토론을 동시에 진행한다. 참여를 촉발하는 기발한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번의 투표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행해지는 토론 결과에 따라 주어진 기간 동안 입장을 바꿀 기회가 충분히 부여된다.

즉,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대화할 때처럼 토론을 통해 ‘설득할 수 있는 기회’와 ‘설득당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결정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꼭 온라인에 국한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온-오프라인의 다양한 심의와 토론을 활성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토론을 유도하는 직접 투표’가 활성화된다면 당과 당원 간의 정보가 공유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높아져 당내 문화와 운영의 혁신도 기대해볼 수 있다.

④ 추첨대의원제

마지막으로 검토해볼 것은 녹색당이 전면 도입하고 있는 추첨제다(과거 진보신당에서도 추첨제를 도입한 바 있지만 10%만 추첨대의원으로 할당해 추첨제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추첨제는 당원을 대표하는 대의원을 선거 방식이 아니라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선발함으로써, 여론조사에서 표본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표본과 모집단의 어긋남(bias)를 최소화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대의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추첨제는 일종의 ‘양원제’의 한축을 담당하는데 당의 권력이 당내 리더십을 상징하는 중앙위원회(전국운영위원회)와 전체 당원을 상징하는 추첨대의원대회로 구분되는 것이다.

추첨을 통한 대의원 구성 방식은 선거방식과 원리 자체가 다르며,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개념과도 다르다. 추첨으로 선발된 대의원은 누구나 선정될 확률이 동일하고 존재 자체로 전체 당원(모집단)의 입장을 가장 근접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직접성을 띠지만 결과적으로 누군가를 대의한다는 점에서는 간접적이다.

추첨대의원제는 총투표제가 해당 의제에 대한 당원 전체의 균등한 심의와 토론을 보장하기가 어렵다면, 전체 당원을 심의와 토론이 가능한 규모로 축소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전체 5천만 국민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성별, 지역별, 연령별로 잘 할당된 500~2000개의 표본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의견을 묻는 여론조사처럼 대의원을 무작위로 추출하되 이들에게 의제에 대한 깊이 있는 심의와 토론을 통해 최종 결정을 맡기자는 것이다.

추첨제의 장점은 다양하다. 우선 여성과 소수자(파), 세대, 직업 등 다양한 모집단의 대표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 전체 당원 중 해당 부문이 존재하는 바로 그 비율대로 대의원이 선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보다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부문은 특별한 할당을 부여할 수 있다. 녹색당은 소수자에게 10%를 할당하고 있다.

추첨제는 전체 당원의 의사를 압축하여 ‘당원 전체가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토론을 진행했다면 도출했을 결론’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난 연재에서 살펴보았던 정파간 갈등을 중재할 ‘언제든 입장을 바꿀 수 있는 중간자’로서 작동할 수 있다. 추첨 방식은 먼 옛날 10개 부족에서 추첨으로 선발한 고대 그리스의 보울레에서도 사용되었고, 지금은 국민참여재판과 각종 공론조사, 정당 경선, 헌법 개정을 위한 시민의회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녹색당은 2013년부터 대의원을 모두 추첨으로 선발하고 있다(10%는 소수자 할당). 추첨민주주의는 당내 리더십과 전체 당원 의사가 권력의 양축을 구성하는 양원제에 적합하다.

민주주의는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인가? 

이런 제안들에 대한 가장 회의적인 반응은 ‘이런 제도가 있다고 해서 일반 당원들이 얼마나 참여할 것인가?’라는 반론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제도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참여’에는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이 존재한다. 우선 제안된 의제를 ‘중요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형식적인 의제를 설정하고 참여를 호소한다면 목표를 이루기 어렵다. 둘째, 참여를 수월케 하는 수단이 존재해야 한다. 여기에는 홍보의 시점과 장소에 대한 접근성도 포함된다. 온라인 툴도 참여대상자에게 익숙한 것일 때 효과가 있다. 최근 주목받은 유럽 정당의 온라인 툴은 그것이 단순하기 때문에 효과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나의 참여를 통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 즉 자기 효능감이다.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이거나 자신의 참여에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사전에 명확하게 입장이 분리되어 토론과 설득이 의미 없다면, 참여의지는 자라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양한 조건이 성숙했더라도 평범한 구성원들이 공적 문제에 적극 참여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 사안을 결정하는 민주주의는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결국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일 뿐인가?

과두제의 철칙을 설파했던 미헬스는 그의 급진적 민주주의관을 기초로 정당과 노동조합의 비민주성을 강렬하게 지적한 후 하나의 우화를 들려준다. 죽어가는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집 앞의 밭에다 보물을 숨겨놨다고 거짓말을 하는 우화다. 아들은 저마다 보물상자를 찾기 위해 밭을 갈지만 결코 보물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황금을 찾기 위한 노력은 밭을 비옥하게 만들 것이다.

민주주의도 이와 같다. 우리가 설령 ‘인민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의미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길을 향한 지속적인 노력은 현실 민주주의를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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