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예술로 읽다] 북한 무용 (2)
전설의 무용수인 최승희는 당대 세계적인 스타였다. 일부 스타가 그러하듯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인품과 덕성이 그 수준에 달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비판을 싫어했고, 독선적이었으며, 사치도 즐겼다고 한다. 이는 자아가 강한 예술가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 성향인데, 예술적인 고뇌와 그 성취감 속에서 커온 나르시시즘(自己愛)의 영향일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 최승희가 아니라 예술가 최승희로 평가할 때 단연 무용계의 전설적인 인물임은 분명하고, 특히 북측 무용의 시작과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자명하다.
현재까지 북측 무용계를 일구어 온 상당수의 무용가가 그녀의 그늘에 있다. 아동무용의 권위자인 강천옥, 무용조곡 <보천보의 홰불>을 창작한 김금주, 4대명작 중 하나인 <조국의 진달래>를 창작한 김락영, <까투리 타령>을 창작한 김령옥, 무용조곡 <계절의 노래>를 창작한 김해춘, 무용표기 중 “상대관계표기방법”의 권위자인 리병길, 최초의 스타 남자 무용수인 리종린, 소년아동무용의 권위자인 심복순, 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서기장 장웅환, 영화배우 전순옥, 조선무용연구소 소장 조한국, 무용극 <메콩강반의 아침>을 창작한 주혜덕, 4대명작의 하나인 <눈이 내린다>를 창작한 차예진, 무용극 <불멸의 노래> 주인공 최영애, 최승희무용극장의 현송숙 등이 최승희무용연구소 출신이다.
최승희가 캐스팅해서 무용계에 족적을 남긴 이들도 다수이다. 개성 공연에서 발굴해 평양음악무용대학 음악무용연구소 민족무용연구실 실장이자 대표적인 무용이론가로 성장한 리만순,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원 성악 유학 시절 캐스팅해 추후 무용극 <락락공주>를 창작하였으며, 북측의 발레무용의 토대를 형성한 리석예, 개성시 예술소조에서 캐스팅해 헬싱키 제8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송학무>와 <무녀춤>으로 금메달을 수상한 리희진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최승희가 “우리 선조들이 남겨 주신 아름답고 우수한 무용예술을 계승하면서 세계의 무용예술 속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널리 받아들이며,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것으로 조선무용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수 있다”며 발표한 <조선민족무용기본> 1권과 2권은 “30여 년간 무용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 무용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미약한 것을 강화하고, 없는 것은 창조하여 우리 조선무용 예술의 새로운 부흥을 바라면서 창조한 것”으로써 조선춤의 교과서로 여전히 유효하다.
<조선민족무용기본>의 특징을 살펴보면, 구성이 체계적이고 기본기법이 자세히 분류가 되어 있으며 동작에 있어서도 완성도가 높고 예술적인 형식도 갖추고 있으며. 입춤(立舞)의 경우에는 기본 동작이 다양하게 정리 소개되어 있다. ‘발의 위치’ ‘몸의 방향’ ‘팔의 자세’ ‘손의 표정’ 등이 적혀 있으며, ‘발의 밟기’에서는 뒤축에서 발바닥 전체, 앞 축까지 섬세하게 움직이는 “3단 보법”으로, 상반신과 팔의 움직임, 몸자세, 공간의 흐름이 주로는 곡선을 그리면서 자연스러운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전통춤의 기법을 채용하고 있다. 입춤 기본동작은 걷는 동작부터 시작해 작은 움직임에서 큰 움직임으로 완만한 동작에서 폭 넓고 빠른 동작으로, 속도 역시 점차 힘든 움직임으로 구성되어 있어, 인간의 운동법칙이나 생리학적인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11종류의 조선의 독특한 소도구를 활용하는 기본동작이 그 기본자세와 쥐는 방법, 사용 방법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해설이 되어 있으며, 특히 그림이 있어서 쉽게 배울 수 있게 구성이 됐다.
구성은 아래와 같으며, 각권에는 반주곡 악보가 첨부되어 있다. 1권에는 예비동작(하반신 10동작, 상반신 8동작)과 기본동작(여자 15동작, 남자 18동작, 공통 11동작)을 소개한 입춤과 부채춤 4동작, 탈춤 12동작, 수건춤 5동작, 소고춤 8동작, 칼춤 10동작이 설명되어 있다. 2권에서는 한삼춤 10동작, 북춤 7동작, 바라춤 9동작, 상모춤 6동작, 장검무 10동작, 장고춤 8동작이 기술되어 있다.
그 변천과정을 영상 자료로 살펴보면, 1960년과 1962년 조선과학영화촬영소가 최초로 영상을 제작 보급한 이후 1973년 만수대예술단이, 1987년과 1996년, 2005년에 걸쳐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조선민족무용기본> 영상을 제작 배포하였다. 복권 후 많은 토론과 연구를 통해서 2011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원본에 충실하게 일부 수정 보완이 되어 여자 17동작, 남자 21동작이 소개가 되었다. 최근에는 2012년 조선문학예술가동맹에서 해당 영상을 제작 배포하였고. 현재에도 평양무용대학과 피바다가극단 부설 조선민족무용연구소 등에서 조선무용 기법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재일 무용가인 김유열은, “조선민족무용은 독특한 팔의 움직임과 발동작을 민족음악(장단)에 맞추어 상체는 우아하고 부드럽게, 하체는 단단히 무릎을 부드럽게 굴신을 줄 수 있도록 상체를 끊임없이 끌어 올리면서 사람들의 사상 감정을 예술적으로 형상하는 춤”이며 “그래서 춤을 세련시키고 아름답게 추고 무대예술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 몸가심세를 바로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초 훈련 속에서 발레 기초를 단단히 거쳐 하체를 든든히 하고 상체를 부드럽고 우아하게 온몸에 반작용의 힘을 느끼면서 추어야 합니다.”고 최승희로부터 이어온 조선무용을 설명하고 있다.
북측 무용의 초기 형성 과정에서 월북 무용수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최가야와 그의 무용연구소 출신의 강원옥, 림안제, 최경애, 리정심, 정옥순과 초기 발레 역사의 대표적인 인물인 리달하, 조익환, 정지수, 한동인, 현대무용을 수용한 장추하, 함기봉 그리고 최초의 무용평론가인 문철민 등이 자의 혹은 타의로 북행을 하였다.
해방부터 사회주의 조국 건설 시기인 1960년대에는 이들이 중심이 된 3개의 단체가 북측 무용의 토대를 마련했다. 최승희무용연구소가 신무용의 본산이었다면, 정지수와 부인 리석예가 주축이 된 국립예술극장 무용단이 발레 무용의 토대를 만들었고, 서울발레단을 만들어 한국의 발레 역사를 새롭게 쓴 한동인과 부인 나숙희 및 최가야무용단 출신이 포진한 인민군협주단 무용부는 현대무용의 수용을 이끌었다.
이들 중 리석예(본명 리영숙)는 이력이 독특하다. 평북 선천군 출신으로 일본 무사니노 음악학원에 성악 전공을 하였는데, 졸업 후 최승희에게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최승희무용연구소에 입소해 그녀의 총애를 받았으며, 매력적인 용모와 무용 재능으로 일본과 중국까지 인기가 대단했다. 이후 전통무용을 배울 생각으로 서울행을 하였고, 여기서 정지수를 만나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전선에서 최고의 무용수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고, 이후 구소련에서 발레 유학을 하기도 있다. 발레극 <심청전>, 무용조곡 <락원의노래>와 무용극 <락락공주>를 안무하였다.
1960년대 인민의 혁명화와 유일사상 확립기를 거쳐 1980년대 초반 주체사상 완성기까지는 고난의 행군기와 맞물리며 천리마 시대에 걸맞는 무용의 창작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혁명무용과 주체무용이 피바다식 가극 무용과 함께 북측 무용으로 확립이 되면서, <눈이 내린다>, <조국의 진달래>, <사과풍년>, <키춤>의 ‘4대 명작’이 발표가 되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주체무용 건설에 있어서 민족적 특성을 살릴 것, 새로운 춤가락을 적극 탐구할 것, 생활과 밀착해 생활적인 것으로 만들 것, 무용을 소품화 하여 그 예술적인 수준을 높일 것, 무용의 형상 수준을 높이며 여러 가지 형상 수단들을 다양하게 살릴 것을 지침으로 내리기도 했다.
따라서 주체무용은 인민대중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여 자주성 실현을 위한 투쟁에로 힘 있게 고무 추동하는 대중 교양의 힘 있는 수단이라는 주체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사람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뚜렷한 사상 정서적 내용을 담는 특징과,
아름답고 세련된 민족적인 춤가락으로 일관된 무용이라는 특징, 작품의 사상적 내용을 형상적으로 감명 깊게 표현 전달하기 위해서 방창과 같은 음악적인 형상 수단과 무대장치, 환등, 배경막 등 여러 가지 무대미술적인 형상 수단들을 적극 배합하여 다채롭게 활용한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주체무용에서 강조한 민속무용은 율동뿐만 아니라 민족의상과 소도구 등 무대미술의 형상 수단들도 작품이 반영하는 생활과 인물들의 성격을 조형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등 민족적 특성을 시각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음악 역시 자진모리, 굿거리, 안당살풀이, 만장단, 염불, 진양조 타령, 당악 등 전통 장단 외에도 북측만의 고유한 장단인 고창춤가락, 삼동등가락, 두레놀이가락, 넑두리가락, 새맵시가락, 돈돌라리가락, 회양가락, 용강기나리가락 등이 주로 사용이 되었다.
“문화와 예술이 전면적으로 개화 발전하는 로동당 시대에 우리의 우수한 민속예술들을 모두 발굴하고 개화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의 응당한 의무입니다”란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에 의해 북측이 발굴하고 재형상화 작품을 정리한 “우리나라 민속무용”(예술교육출판사, 1991년)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동북지방에는 “돈돌라리춤, 북청사자춤, 야장춤, 룡북춤, 삼삼이춤, 넉두리춤, 방천춤”이 있고, 서북지방에는 “봉죽놀이, 새맥씨춤, 상동동어깨춤, 왕바구니춤, 닭춤, 몰이군춤, 등불춤, 수박춤, 채북춤, 석전무, 홰불춤”이 있다. 중부지방에는 “봉산탈춤, 강령탈춤, 산대놀이, 자라병춤, 고창춤, 박판춤, 손맵시춤, 황춤, 회양닐리리춤, 어랑타령춤”이 있으며, 남부지방에는 “강강수월래춤, 쾌지나 칭칭 나네춤, 옹헤야춤, 오광대놀이”가 있으며, 전국적으로는 “농악무, 사당춤, 칼춤, 부채춤, 장고춤, 한삼춤, 두레놀이”가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조선민족제일주의”를 주창한 시기에는 북측 무용을 정의하고 현재와 미래로의 지향을 밝힌 김정일 위원장의 ‘무용예술론’이 발표가 되고, ‘자모식 무용표기법’이 완성이 되며, “우리식 사회주의”가 선언 된다. “사회주의 현실 생활을 반영한 낙천적인 무용작품을 창작할 것”과 “민속무용을 현대적 미감에 맞게 형상하는 사업의 심화”에 대한 방침이 서고, 민속무용조곡 <계절의 노래>, 전설무용극 <봉선화>, 무용소품 <내나라 제일로 좋아>, <돈돌라리>, <쟁강춤> 등이 발표가 되었다.
2000년대 전후부터는 강성대국 건설 시기로 “선군정치와 선군혁명문학”이 강조가 되었고, 혁명주체무용과 민족무용이 두드러졌는데, 이 시기에 가장 강렬한 작품은 체육과 교예 그리고 무용의 성과를 집대성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그것이다.
전 기간에 걸쳐 관철된 무용 창작의 이념은, 첫 번째가 민족적인 특성을 옳게 살리는 것이다. 이는 무용 전반에 짙은 민족적인 정취가 흘러나오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무용을 생활과 밀착시켜 생활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인민의 생활 속에서 테마와 소재를 가져온다는 의미이다. 북측만의 독특한 무용 갈래인 ‘생활무용’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무용에서 중요한 동작의 경우 생활에서 찾은 것이 그래서 많은데, 걷는 동작의 경우 종종걸음, 보통걸음, 곱질러 걸음, 비켜 걸음, 무릎을 굽히는 걸음, 발뒤꿈치나 앞꿈치로 걷는 걸음 등이 있다. 생활 동작으로는 몸 단장을 하는 동작, 절을 하는 동작,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작, 빨래하는 동작, 실을 뽑고 천을 짜는 동작, 과일 따는 동작, 베 짜는 동작, 농사짓는 동작,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캐는 동작, 말 타고 달리는 동작 등이 있다.
세 번째는 무용을 “소품화” 한다는 것이다. 북측 무용의 독특한 구성 양식으로 인민들의 사상 감정과 정서를 하나의 생동한 이야기에 담아 집중적으로 그려내는 작은 형식의 작품으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특히 ‘속도전’과 ‘통속성’이라는 원칙에 부응해 더 많이 더 빨리 창조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무용극과 같은 큰 규모의 작품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소품 창작을 기본으로 추진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네 번째는 당 정책을 반영하고 무용의 예술성을 높이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무용의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살리는 것이다. 이는 “저속한 율동과 육체미, 무용 기교 등을 통해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관능적인 쾌감을 자아내는 퇴폐적인 부르주아 무용과 달리, 사람들을 아름답고 고상한 사상 정서로 교양하며 그들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로 지향시키고 고무 추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가장 높은 발전 단계의 예술”이 북측 무용의 지향이기 때문이다.
창작자의 요구에 호응해 무용 배우들은 당연히 배역 인물의 형상을 진실하고 생동하게 창조해내야 하며 이를 위해 연기력도 출중해야 한다. 무용수라고 불리기보다는 무용배우로 불리는 이유이다. 또 춤 형상의 예술적인 수준과 앙상블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데, 이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정확한 동작과 음악과 무대미술 등의 유기적인 조화이다.
그 기본은 무용 배우들이 춤동작에서 일치성을 보이는 것이다. 몸 자세와 놀림, 얼굴의 방향, 팔다리의 율동적인 움직임과 각도, 무용수들의 무대 위치와 동선 및 자리와 간격 등에서 일치성을 보장해 춤 형상의 형상적인 조화와 균형미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북측 무용의 커다란 강점이다.
무용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호흡의 경우에는 동작이 호흡과 연결해서 부드러우면서도 기백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조선 사람에 맞추어서 발전한 조선춤은 동작과 동작 간의 연결이 항상 자연스럽고 후리하거나 꼬여 들어가는 것이 없다. 특히 조선무용은 순간적으로 정지된 상태에서도 율동적 호흡의 지속성과 끈기가 있기 때문에 한 동작으로부터 다음 동작으로 넘어갈 때 여운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부드러운 움직임의 특징은 혁명적인 기백과 밀접하게 결부가 되어 있다. 조선무용의 부드러움은 결코 맥없고 단순한 것이 아니라 인민의 혁명적이며 생기발랄한 생활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동작에 기초하기 때문에 기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최승희의 뒤를 이어 북측 무용계를 세우고 키워온 무용인들이 있다. <내 사랑하는 꽃>,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 <나의 어머니>란 작품을 창작해 위인송가무용창작의 1인자로 불리는 백환영 외에 김락영, 엄영춘, 김해춘이 대표적인 안무가이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최승희의 대표적인 제자로 알려진 김락영(1935.9.10.)은 1949년 평양제8중학교를 졸업하고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1951년 중앙농민극단 무용배우를 시작으로 1952년 국립무용극장 배우, 1958년 국립무용극장 안무가, 1965년 국립가무단 안무가, 1973년 피바다가극단 안무가, 1992년부터 평양음악무용대학 안무이론 강좌장으로 활동을 이어가며 조선무용의 개화기를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961년 <사당춤>(이후 삼인무)>을 창작해 주목을 받았고, 1971년 4대무용의 하나인 <조국의 진달래>를 창작해 정상에 섰다. 최승희의 제자 시절 습득한 그녀의 독무 <풍랑을 뚫고>를 재현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 작품은 현재 재일 무용수인 공훈배우 박선미가 직접 전습을 받아 한국 초연을 가진 바 있다.
김락영과 함께 북측 현대무용의 새경지를 개척한 경쟁자이자 동료가 바로 국립민족예술단의 대표 안무가였던 엄영춘과 만수대예술단의 대표 안무가였던 김해춘이다.
평안남도 남포시 출신의 엄영춘(1937.10.18.)은 평양예술대학(지금의 평양무용대학)을 1957년에 졸업한 후 여러 전문예술극장들의 무용배우를 거쳐, 1985년부터 국립민족예술단 안무가로 활동을 하였다. 독무 <공작새>로 국제축전에서 은메달을 받아 주목을 받았다. 역시 4대명작의 하나인 <키춤>을 창작해 명실공이 북측 무용의 대표 안무가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그가 창작한 무용소품 <일편단심 붉은 마음 간직합니다>는 주체무용의 대표작으로 지금도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스터디 레퍼토리이다.
김해춘(1939.5.25)은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출생하여 1960년 최승희무용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시 남다른 열정과 기교로 최승희의 각별한 지도를 받기도 했다. 1963년 졸업 후 국립무용극장 배우로 배치되었고, 1967년 평양음악무용대학 안무재직반에 입학해 전문 기량을 쌓은 후 1969년 국립가무단과 1971년 모란봉예술단 안무가로 변신, 이후 피바다가극단과 왕재산경음악단 안무가로 활약하였다. <온 세상에 만발한 김일성화>, <손벽춤>, <쟁강춤>, <아박춤> <지새지말아 평양의 밤아> 등을 창작해 90년대 최고의 안무가로 각광을 받았다. “화폭이 있고 동작들이 굵직하며 항상 우렁찬 형상들이 작품 전반을 관통”하며, 특히 “민족무용 창작에서 개성적인 춤가락을 찾아내여 현대적 미감에 맞게 하는 특기”를 인정받았다. 대표작인 무용극 <봉선화>와 무용조곡 <계절의 노래>이다.
이 외에도 유명하고 중요한 북측의 무용배우도 많이 있지만, 민속무용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김주봉(1932.1.4.)을 빼놓을 수 없다. 함경남도 단천시 출생으로 지역의 ‘불꽃극장’ 나팔수, 1948년 조선인민군 군악단 악사, 1964년 국립민족예술극장 배우란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중국 길림성 연길에서 하태일이라는 경상도 사람에게 농악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무용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귀국 후에 국립민족예술극장에 있으면서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 농악무를 결합하여 “우리식 농악”을 완성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주봉은 지난 경험과 본인의 관심을 기초로 전국을 떠돌며 지방의 민속춤을 발굴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식” 민속무용을 창작하게 된다. 함경북도 경원군 <큰 부채춤>, 함경남도 금야군 제포리 <배사공춤>과 <해녀춤>, 함경남도 단천시 <넉두리춤>과 <삼삼이>, 강원도 철원군 <강원도 농악>, 강원도 통천군 <팔뚝춤>, 량강도 백암군 <목도군춤>, 량강도 유평군 <떼목군춤>, 평안북도 룡천군 <장대춤>, 평안북도 의주군 <수건춤>, 평안북도 고창군 <고창춤>, 평안남도 룡강군 <고절춤>, 황해남도 강령군 <강령탈춤>, 황해남도 장연군 <양푼춤>, 황해남도 해주시 <접시춤>, 황해남도 배천군 <연백농악>, 황해남도 룡연군 <배따라기춤>, 개성시 만월동 <새각시춤>, 개성시 장풍군 <조막손 타령춤>, 개성시 <한량춤> 등이 주요 성과이며, 이것을 통해 창작 전습시킨 민속무용이 200 여 작품에 달한다.
이 중 가장 큰 성과는 <돈돌라리>이다. 함경도 지방에서 전래되는 민요이자 민속무용인 ‘돈돌라리’를 재형상해 완성도 높은 무대작품으로 창작한 것이다. 함경남도 북청군에 사는 탁진이라는 사람에게 채록 및 발굴한 것으로,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이후 <돈돌라리>는 여러 안무가에게 영감을 주어 다수의 버전이 존재하며 지금도 즐겨 무대에 오르고 있는 대표적인 민족무용이다.
<돈돌라리>의 어원을 살펴보면 ‘돈돌’은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동틀 날이 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일제가 멸망하고 반드시 해방을 맞이할 아침이 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남북이 같이 추는 <돈돌라리>는 ‘분단을 극복하고 반드시 통일의 아침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무용 군무 - 돈돌라리 https://www.youtube.com/watch?v=mt24cumH1Ec
무용 군무 - 사과풍년 https://www.youtube.com/watch?v=jkUH5QdgXsc&list=RDmt24cumH1Ec&index=2
무용 군무 - 쟁강춤 https://www.youtube.com/watch?v=Je_Xtz_ESj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