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이론과 쟁점⓹] 3차원적 권력과 내부 민주주의

2000년 민주노동당의 출현은 한국 정당체제에 결코 작지 않은 파장을 던졌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 출현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일반 당원에게 결정권을 부여한 민주노동당의 내부 민주주의는 당시까지만 해도 계파 보스를 정점으로 한 위계적 질서에 머물러 있던 낡은 정당 운영방식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가장 혁신적인 내부 민주주의 제도를 보유했다는 민주노동당은 내부의 갈등관리에 실패해 결국 분당으로 이어졌고, 2012년 통합진보당은 또 한 차례의 파국적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진보정당의 당원 직접 내부 민주주의는 갈등관리에 무용한, 보기 좋은 장식물이었을 뿐일까?

▲ 왜 가장 혁신적이었던 진보정당의 내부 민주주의는 파국적 결말을 막는데 그토록 무력했을까? 사진은 민주노동당 분당의 기점이 된 2008년 임시당대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당내 민주주의의 새로운 혁신을 위해서는 정당 내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에 대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몇 가지 이론을 통해 정당 내부의 권력관계를 파악해 본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3차원적 권력

권력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있어 보이는 것은 “A가 B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 시키는 것”이라는 대답일 것이다. 이것은 막스 베버의 권력 정의를 계승한 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념이다.

이런 권력개념은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내부 민주주의를 말할 때 종종 언급하고 있는 패권주의라는 개념도 ‘다른 정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를 지속적으로 관철시키는 정파’로 읽힌다. 이런 권력은 주로 ‘갈등상황’에서 발견되며, 권력의 움직임이 ‘눈에 보인다.’ 그동안 패권주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당 내부갈등의 진단과 처방은, 모두 이런 권력시각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이처럼 눈에 보이는 갈등만 권력일까? 그럴 리가. 권력은 서로 다른 의사가 표출된 두 집단이나 개인 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작동한다.

우선 권력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 A는 어떤 의제를 자신에게 해롭지 않은 방식으로 세팅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부여하지만, 어느 선택이든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다. B의 눈에 이런 A의 의도가 빤히 읽힐 수는 있다. 그렇지만 B는 불만이 있어도 말할 수 없다면? 겉으로는 아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이런 권력의 속성을 포착했던 것은 바흐라흐와 바라츠라는 학자들이다. 이들은 권력은 어떤 의사를 결정하는 상황만이 아니라 A가 자신에게 무해한 이슈로 정치과정의 범위를 제한하는 ‘비결정(결정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행사되며, 이때 A는 자신의 이해관계나 선호조차 제기하지 못하는 B에게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스티븐 룩스라는 학자는 두 집단이나 개인 간의 가시적 권력투쟁을 1차원적 권력관계라고 한다면, 이처럼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만이 억눌려 있는 권력관계를 2차원적 권력이라고 불렀다. 만일 자신의 불만을 표출조차 하지 못했던 B가 용기를 내어 A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2차원적 권력관계는 1차원적 권력관계로 전환될 것이다.

룩스는 여기에 또 하나의 권력개념을 덧붙인다. 어떤 권력은 관찰할 수도 없고 불만이 드러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불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3차원적 권력’으로 불렀다.(사실 바흐라흐와 바라츠 역시 개인이나 집단의 권력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책갈등이 공식적으로 부상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을 만들거나 강화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룩스의 3차원적 권력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3차원적 권력개념은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도 권력에 지배당할 수 있다는 것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흔히 ‘자발적 복종’이나 ‘헤게모니’, ‘이데올로기’(허위의식)와 같은 개념으로 불렀던 많은 현상들은 ‘3차원적 권력’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권력이 바로 최고 수준의 권력일 것이다.

물론 3차원적 권력개념은 많은 측면에서 공격받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이해관계와 다른 선택을 내리는 것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본질적 이해관계가 특정되어야 하지만, 많은 경우 본질적 이해관계는 증명하기 어렵다. 사람의 행위는 특정한 경로가 정해져 있다기보다(즉, 이해관계가 고정되어 있다기보다) 매우 다양한 요소와 관계들의 복잡한 실타래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 우리는 ‘권력관계’를 말할 때, 흔히 눈에 보이는 권력관계만을 주목하지만,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거나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작동한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는 이처럼 비가시적이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권력을 폭로하여 드러내고, 데모스를 권력주체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2차원적, 3차원적 권력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지금껏 1차원 권력관계에 국한되어 있는 정당 내부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을 넓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정당 내부 민주주의가 1차원적 권력의 분석에 머물렀다면, 2, 3차원적 권력에 종속된 이들은 누구였을까?

권력의 작동: 양자관계와 삼자관계

이 문제를 파악하기 전에, 먼저 세력 관계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가시적 권력 갈등의 주체인 조직화된 정파 이외에 새로운 행위자를 하나 더 포함시키는 것이다.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기 위해 ‘A와 B’를 1차원적 권력관계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로, 그동안 배제되었던 새로운 행위자를 ‘C’로 보자.

새로운 행위자의 출현이 기존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사회학과 정치학의 관심주제였다. 이를테면 짐멜이라는 학자는 양자관계(dyadi)는 서로가 서로에 의해서만 대면하게 된다는 점에서 한 사람의 소멸은 곧 전체의 붕괴를 가져오지만, 양자관계에 단 한 사람이 추가되는 삼자관계(triad)가 형성되면 매우 중요한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다고 봤다.

새로 등장한 제3자는 집단을 파괴할 수도 있는 둘 간의 감정을 부드럽게 함으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양자 간의 불화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찾기 위해 행동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3자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거나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할과 지배’의 방법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둘 사이에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다.

정당이론의 권위자인 샤츠슈나이더 역시 싸움의 중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소수와 어쩔 수 없이 그 광경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구경꾼을 구분하고, 이 구경꾼은 싸움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고 봤다. 즉, A와 B사이의 갈등에 C가 개입하면 갈등의 성격이 바뀌며, C가 한편을 들어 힘의 균형을 변화시키거나, 갈등을 중단시키거나, A와 B에게 자신의 해결책을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칼 슈미트의 주장처럼, 정치적인 것이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더구나 그 행위자들 간의 최종적 화해는 불가능하다면, 정치는 두 진영 간의 끊임없는 정치투쟁으로만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이 어떤 운명을 함께 해 나가야만 하는 정치집단 내부라면, 기존 행위자들의 관계 성격을 바꾸는 또 다른 권력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즉, 갈등하는 당사자의 투쟁을 종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편이라도 들 수 있고, 또 어느 편도 들지 않을 수 있는 가변성을 가진 ‘중간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권력 행위자이면서도 기존의 권력과는 차별화된, 최종적 심판자로서의 ‘C’의 존재는 내부 민주주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C를 찾을 수 있을까?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나 엘리트들이 모인 중앙위원회? 화해의 기술을 보유한 테크노크라트?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것을 ‘데모스’에서 찾는다.

▲ 진보정당 내부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시각은 조직화된 정파와 정파 간의 가시적 관계에만 주목했다. 그러나 최종적 심판자로서의 C의 존재는 내부 민주주의 문제를 푸는 열쇠다.

그동안 진보정당의 내부 민주주의는 정파A와 정파B 간의 1차원적 권력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정파의 계선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일반당원(데모스)은 정파 간 갈등에 불만이 있더라도 제대로 이를 표출하지 못하거나(2차원적 권력) 개입의 필요성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을 수 있다(3차원적 권력).

물론 이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진보정당의 내부 민주주의야 말로 보수 정당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진성당원제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가? 당원이 투표하고 소환하고, 의제를 발의할 수도 있지 않았나? 그런 제도와 절차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진보정당에서는 데모스(일반당원)가 당의 운영 과정 전반을 통제하고 있었을까?

직접 정치? 숨어 있는 ‘C’를 찾아라

민주노동당을 비롯해 이후 등장한 진보정당은 모두 당강령에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원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보장한다고 적시되었고, 다양한 제도도 갖추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제도들이 제대로 행사된 바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아래 표를 보라.

▲ 민주노동당은 당원주도형 제도들을 전면화 하면서 한국 정당체제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막상 그 제도들이 가장 절실했을 때에는 단 한 번도 작동하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직접 민주주의는 당직·공직자를 선출하는 과정에만 발휘되었을 뿐, 그들을 통제하거나 중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에 개입한 적도 없다. 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가 있지 않았냐고? 사실 그 두 기관은 전체 당원의 의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공간이었다기보다 정파적 계선을 따라 조직된, A와 B 간의 쟁투적 공간에 가까웠다.

대의원이나 중앙위원의 명부를 쫙 펴들고 출석여부만 파악하면 당대회나 중앙위원회의 박진감 넘치는 토론여부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결론을 추론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 아닌가? 이런 조건에서는 공론장의 심의와 토론보다 ‘동원’이 더 중요해진다. 진보정당은 당원이 당의 엘리트를 통제할 형식적 제도는 존재했지만, 막상 그것이 꼭 필요한 순간에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내부 민주주의 문제를 풀기 위한 시발점이다.

만일 정당이 하나의 국가라고 상상해보면 어떨까?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는 과정에만 권리를 행사하고 국가 중대사에 개입한 바가 없다면, 그것을 직접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내부 민주주의는 여전히 독재시대에 머물러 있는 기성 정당에 비해서는 ‘민주화’된 공간이었지만, 제도의 유무와 상관없이 정파를 ‘당내 당’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대의제와 좀 더 유사했다.

그래서 진보정당의 정파 간 관계는 자유주의적 대의제로 설계된 87년체제의 정당 간 관계와 매우 유사한 패턴을 보였다. 만일 이것을 당원 직접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87년체제 역시 매우 직접 민주주의적인 체제라고 부를 수밖에 도리가 없다.

잘 설계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제도의 취지대로 정당을 운영하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직접 정치’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내부에서부터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은 그동안 숨어 있던 ‘C’, 즉 그동안 진보정당의 역사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개입할 수 없었던, 또는 스스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반 당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가 1차원적 권력으로 가시화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도 실현할 수 없는 가치라면, 그것을 실현하라는 주장에 힘이 실릴 수 없다. 물론 그 방식에 대한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출발은 기존의 시각을 바꿔보는 것이다. 새로운 시각을 가질 때, 안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우리가 2, 3차원적 권력을 온전히 포착하지 못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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