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2)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

‘조총련’의 정식명칭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다. 남한에서는 이를 줄여서 흔히 조총련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 쓰는 공식 줄임말은 ‘총련’이다.

일제시기 일본은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징용이라는 미명 아래 국가총동원령을 앞세워 일본으로 끌고 가 강제노역을 시킨다.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72만 명에 이르고 일제 전 기간 동안에는 50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에게 찾아온 해방은 분명 기쁨이었지만 그들이 돌아갈 조국의 현실은 남북 분단과 함께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선택을 강요하였다. 그들은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였고 처음 그들이 들어올 당시 국적인 조선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다만 총련에서 진행한 교육사업 등에 자금을 지원한 북한에 대의적인 지지를 결의하였다. 반면에 당시 이승만 정권은 해방 이후 일본 징용자들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였다.

총련의 출신지역 비율을 보면 이들의 대부분이 경상도와 제주도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단순히 총련을 북한의 하부조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 남았던 대부분의 징용 재일조선인들은 총련에 가입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과 남한이 수교한 이후 총련은 남한 정부에게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재일동포 사회에서 북한과 가까운 총련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박정희 정권은 영주권신청운동을 전개하면서 친남한 성향의 '민단'을 대한민국 재외동포의 지위로 격상시켜 참여를 유도하는 등 민단 강화를 꾀했다. 그 일환으로 1970년대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는 총련계 1세대를 겨냥한 적극적인 고향방문사업을 전개하였고, 이윽고 1975년 일부 총련계 1세대가 포함된 재일동포 고향방문단을 꾸리는데 성공한다. 이런 재일동포 고향방문단에 대한 사회적 관심 속에 히트한 노래가 바로 가수 조용필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이다.

▲사진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런데 이 노래는 조용필이 처음 발표한 1972년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4년 뒤인 1976년 공식 취입하자 당시 10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현해탄 건너 일본에서도 히트하며 일본 최고의 엔카 가수인 미소라 히바리 등 수많은 일본 가수들이 리바이벌하기도 한다.

이런 일본에서의 열풍 때문인지 이 곡은 곡절을 겪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1945년 해방으로 한반도에서 쫓겨난 것을 만회해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려는 속내를 담아 불렀기 때문이라는 풍문이었다. 이 소문은 박정희의 관동군 경력 등 친일 행적과 함께 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지면서 일부 대학가에서는 이 노래 부르기 자체를 꺼렸다고도 한다.

그런데 조용필이 노래를 처음 부른 시기는 앞서 밝혔듯 1972년이다. 당시 조용필이 처음 부를 때에는 가사도 조금 달랐다. 특히 1절의 마지막 대목이 “목 메여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로 끝나는데 첫 취입 당시에는 “목 메여 불러봐도 말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님아”였다. 더욱이 이 노래의 원곡은 1970년에 김해일이라는 가수가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란 제목의 노래라는 사실이 1990년대 후반에 공개되었다.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가수 김씨의 유가족들이 작곡가 황선우씨를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사도 “목 메여 불러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였다.

이 노래의 제목과 가사가 바뀌게 된 배경에는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총련계 고향방문단 사업이 자리하고 있다.

 

* 최현진 담쟁이기자는 단국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매체인 ‘코리아포커스’ 기자로 일했으며 통일부 부설 통일교육원의 교육위원을 맡기도 한 DMZ 기행 전문해설사다. 저서는 <아하 DMZ>, <한국사의 중심 DMZ>, <DMZ는 살아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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