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이론과 쟁점③] 어떤 민주주의 2 : 칼 슈미트의 정치이론

지난 연재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대립될 수도 있음을 살펴봤다. 지금부터 살펴볼 또 하나의 ‘어떤 민주주의’는 단순히 반민주적 악의(惡意)를 갖진 않았더라도 다양한 적과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정치유형을 살펴본다.

이런 정치행위의 민주주의적 변형과 왜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 슈미트의 정치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88년에 태어난 칼 슈미트는 독일에서는 ‘봉인’된 법학자다. 독창적인 주권이론과 정치이론을 설파하면서 법해석의 최고 권위자로 군림했지만,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면서 히틀러 독재체제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 7~1985. 4)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의회주의

연재 1편에서 보았듯이 인민의 자기지배를 핵심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의 동일성을 핵심 가치로 한다. 칼 슈미트는 민주주의의 동일성을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 국가적 권위의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 국민과 의회 대표와의 동일성, 국가와 투표할 때 국민과의 동일성, 국가와 법률과의 동일성, 양적인 것(다수결이나 만장일치)과 질적인 것(법률의 정당함)과의 동일성”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정의는 지난 연재에서 살펴봤던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변형과는 사뭇 다르며 민주주의의 근본원칙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일하기 위해서는, 더구나 지배자의 범위가 데모스에 비해 좁을 수밖에 없다면, 데모스 자체가 동질해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슈미트가 활동했던 당시처럼, 항상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예외상황)에서 데모스가 동질적이지 않다면, 긴급하게 내려지는 정치적 결단이 민주적 정당성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민은 결코 동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각각이 접하는 정보가 다르며 취향도 제각각이고, 어떤 사안에 대한 시각도 같을 수 없다. 세계관이 유사한 정치공동체라 할지라도 동일한 진단이 항상 동일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인가? 인민의 동질성이 불가능하다면, 긴급한 상황에서의 결정은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인가?

슈미트는 이에 대한 해법을 일반의지의 수호자, 루소에게서 발견한다. 루소가 한 말을 짚어 보자.

“인민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어떤 문제를 의결하려고 할 때, 시민들이 사전에 어떤 편파적인 이익을 담합하지 않는다면, 그들 간에 생기는 작은 의견 차이의 총계에서는 항상 일반의지가 생겨나고 따라서 그 의결은 항상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루소는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갈등과 균열의 모둠을 의회에 반영한다는 자유주의적 해법은 ‘일반의지’를 저해하는 ‘특수의지’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루소는 일반의지의 형성을 위해서는 편파적인 이익을 위한 담합이 없어야 하며, 국가 내부에 부분적 사회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슈미트가 루소의 이런 생각에 동의했음은 명백하다. 그는 지난 연재에서 살펴봤던 자유위임적 원칙이나 토론, 합의 따위는 ‘각 당파의 이해관계를 근거로 한 거래에서 이루어지는 타협’일 뿐이라고 냉소한다. 자유주의적 대의제는 실제로는 아무 효과도 없지만 사람들에게 마치 지대한 효과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하다.

“의원의 독립과 회의의 공개성에 관한 규정은 불필요한 장식 같은 역할만하고 무용할 뿐만 아니라 보기 싫기까지 하며,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훨훨 타오르는 불의 환상을 환기시키기 위해 근대적인 중앙집중식 온실의 방열기에 붉은 불꽃을 켜놓은 것과 같다.”

슈미트가 보기에, 정당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자유주의자, 의회주의자들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갈등도 만들어내며, 의회에 모여 앉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을 둘러싸고 한참동안이나 치고 박고 싸운다. 즉, 의회는 동질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동질성을 해체하는 존재다.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적과 동지의 구분

원래 인민(데모스)이 동질적이지도 않고, 의회가 인민의 일반의지(동질성) 형성에 기여하지도 못한다면, 슈미트가 생각한 방법은 뭘까? 그의 대안은 인민 스스로가 동질적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의 적’이다.

▲슈미트의 관심은 전쟁이나 계엄 상황처럼 예외상태에서 주권의 문제였다. 지도자가 예외상태에서 초월적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적’에 대한 인민의 동질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도자는 갈채로 승인되는 인민의 일반의지에 따라 민주적으로 정당화된 독재권력을 행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주권론은 점차 법률에 따른 것(위임적 독재)에서 미래에 도래할 어떤 상태를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것(주권적 독재)으로 경도된다.

여기에서 칼 슈미트의 가장 유명한 정의가 나온다. 바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누가 적인지, 누가 친구(동지)인지 먼저 구분하면서 시작하며, 이 둘 간의 최종적 화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토론과 합의를 모토로 삼는 자유주의(의회주의)는 정치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상이다. 정치적 성격을 갖는 영역에서는 항상 대립적 요소가 존재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한편으로는 데모스의 동질성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제하고 섬멸해야 할 이질적 대상’, 즉 적이 존재한다. 결국 데모스의 동질성은 공동의 적에 대한 ‘동일시’로 가능하며, 이질적인 것은 배제하거나 섬멸함으로써 동일성이 유지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외부의 적에 동조하는 ‘내부의 적’을 만난다. 데모스를 관리하는 이들의 임무는 인민의 동일성을 해치는 내부의 적을 발견하고 이들을 추방하거나 섬멸하는 것이다.

결국 긴급한 상황에서도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데모스 내부의 이질적인 것들을 제거하거나 외부로 추방해 ‘그들에 대한 적대’를 기초로 동질적인 데모스를 만들어야 한다. 어디에서인가 그 적은 국가나 종교, 민족이나 인종이었으며, 성적취향이자 이데올로기였다. 세계 곳곳의 격렬한 정치적 현장에는 데모스의 동질성을 훼손하는 위협적 존재로 규정된 ‘적’이 항상 존재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슈미트의 정치이론은 데모스 내부에서 작동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데모스 자체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읽힌다.

민주주의와 독재의 만남, 갈채 민주주의

적에 대한 동일시로 데모스가 구성될 수 있다면, 이제 그 내부에서 어떻게 국민의사가 형성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된다. 하나의 대안은 국민투표처럼 모두의 의사를 비밀투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인데, 슈미트에게 그것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그에게 비밀투표는 사적인 것과 무책임한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모든 시민의 절대적으로 일치된 의사가 확인될 수 없다면, 다수의 의지와 소수의 의지 중 어느 쪽이 국민의 의사와 동일한 것이냐는 논리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다. 이를테면 노동계급의 이해와 반대되는 정치적 결정을 선택하는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를 가로 막는 법안에 찬성표를 행사하는 여성은 자신이 투표한 법률이 일반의지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투표한 것일 뿐이다.

의회주의처럼 현실적이고 기술적인 이유로 대표를 뽑아 대의체에서 대신 결정하게 할 수 있다면, 국민의 신뢰를 받은 단 한 사람이 국민의 이름으로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동일시된 데모스에서는 비록 개인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구현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지며, 이는 곧 독재의 합리화로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현대의회주의라는 것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고 의회주의도 민주주의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재는 민주주의에 결정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도 독재에 결정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독재가 민주적인가? 슈미트에 따르면 그것은 투표보다는 ‘자명하고 부인되지 않는 표현 형식’인 갈채(acclamation)로 인증된 것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투표한 결과에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 한 사람의 인간이 투표에 의하지 않고도 국민의 의사를 구현하거나, 또는 국민이 ‘환호에 의해서 찬성을 표명’한 의사는 국민의 의사와 동일시될 수 있다. 여기에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나치당의 정당화에 기여했는지가 확인된다.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

칼 슈미트는 지배자의 위치에서 독재를 합리화한 이론을 설파했지만, 그가 주는 통찰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합의와 타협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의회주의의 주장 앞에, 그렇게 이루어진 합의와 타협은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거나 유보한 결과이지 진정한 타협이 아니라는 비판이나, 자유주의적인 정당이 사실은 갈등을 반영하기보다 조직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도 현실정치를 해석하는 데 유용하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 데모스의 외부로 추방하고 스스로 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정치행태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은 지배집단이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어떻게 민주주의를 참칭하고 오용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외부에 존재하는 거대한 적을 상정해 두고, 정치공동체 내부의 동질성을 꾀하려는 시도는 분단체제의 그늘 속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지난 10년 동안 반복적으로 목격해 온 일이다. 특히 배제와 섬멸의 대상으로서 내부의 적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를 헌법수호자로 자처한 지난 정권의 모습은 칼 슈미트가 그려놓은 ‘독재의 정당화’의 전형이다. 종북좌빨과 동성애자 등 끊임없이 배제와 섬멸의 대상을 규정하려는 현실도 익숙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로운가?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워왔던 진보정치운동에도 적을 타도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투쟁을 민주주의 자체로 인식했던 경향이 있다. 독재권력이 대항세력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했듯이, 우리의 연대도 거대한 적에 대한 동일시에 기초했고, 내부의 이견을 배제와 섬멸의 대상처럼 인식한 경향도 있다.

슈미트가 비상상황에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 법률을 정지하는 위임적 독재와 달리 미래에 도래할 어떤 새로운 정치체제를 가능케 할 상태를 추구하는 주권적 독재의 사례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미래에 대한 확신에 차 자신의 생각을 유일한 선택기준으로 간주하고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내용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와 형식을 부차화하는 경향에서 우리는 분명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슈미트가 활동할 당시에는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하나의 적이 희미해지고 다원적 적대가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의 적과 명확한 목표가 마치 일반의지처럼 존재했던 시기와 지금은 조건부터 다르다.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사고하고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집단의 선각자적 통찰에 오류가 없다는 배타성보다 적에 대한 동일시로 환원될 수 없는 다원적 적대와 이질적 공간에서 작동하는 정치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배제와 섬멸이 아니라 최소한 공론장에서 작동하는 설득의 기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훌륭한 정치의 기술, 즉 설득의 기술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질문은 조작과 위로부터의 동원이 아니라 설득에 기초한 정치가 작동될 수 있는 조건, 즉 설득의 효용가치를 높일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창출하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이제 본격적으로 살펴볼 내부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조건과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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