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1

조국과 역사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을 작가와 책을 펴낸 ‘박종철출판사’의 동의 아래 연재한다. 작가는 ‘일흔한 분의 헌걸찬 어르신들께 바치는 한 점 향불’을 올리는 마음으로 6년여 간의 발품과 작업과정을 거쳐 원고를 완성했으며, ‘혁명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허물어진 혁명가들의 삶을 떠올려 보는 마음’을 보태고자 펴낸 책이라고 밝혔다. 소개되는 혁명가는 책의 순서와 달리, 작가의 동의 아래 민플러스 임의대로 선정 소개함을 밝혀둔다. 첫 번째 혁명가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편집자]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에서의 몽양 선생

[사진출처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1940년 2월 창씨개명을 뿌리치고, 12월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왜경에서 잡혀 2년 6개월 징역을 살았다.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얽었고, 10월에는 옛살라비 양평에서 「농민동맹」을 얽었다. 8ㆍ15를 맞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얽어 위원장이 되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족전선」의장단이 되었고, 4월 평양으로 가서 김두봉ㆍ김일성과 회담하였다. 5월 근로인민당을 세웠고, 10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 첫발을 내딛었으며, 11월 사회로동당 임시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7월 19일 세울 혜화동 둥근네거리에서 총알을 맞아 염통이 고동을 멈추었다.

1919년 12월 27일, 동경 제국호텔에 안팎 신문기자와 일본 여러 쪽 이름난 이들 500명이 모여 있었다. 조선독립이 왜 되어야 하는가를 부르짖는 몽양 연설은 두 시간 넘어 이어지고 있었다. 장강대하로 흘러가는 물너울처럼 거침없는 웅변이었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당연한 요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조선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과거의 약탈살륙을 중지하고 세계를 개척하고 개조로 달려 나가 평화적 대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들 조선(祖先)은 칼과 총으로 서로 죽였으나 이후로 우리는 서로 붙들고 돕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신은 세계의 장벽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꼭 전쟁을 하여야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싸우지 아니하고는 인류가 누릴 자유와 평화를 못 얻을 것인가? 일본인들은 깊이 생각하라.”

대일본제국 척식국장 코가(古賀)는 몽양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대의 의지에 나는 동의한다. 내가 만일 조선에 태어났다면 나도 그대와 같이 하겠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총독부에 불을 지르겠다. 내 계책이 성공되지 않는 데서 그대에게 가장 높은 경의를 가지고 있다.”

몽양이 동경을 떠날 때 배웅 나온 코가는 “몽양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水野)가 동경에 와 있었는데, 몽양이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며 한 말이다.

“경성역에서 강우규 의사 폭탄에 얼마나 무서웠는가?”

다짜고짜 찌르고 들어오는 몽양 덮치기에 놀란 미즈노는 얼굴이 시뻘개졌다고 한다.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는가?”

미즈노가 묻자 몽양이 되물었다.

“그대는 일본이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는가?”

체신대신으로 있던 노다(野田)는 그때 일제 각료 가운데 머리가 좋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몽양 일행을 모셔들어 점심을 함께한 다음 노다가 말하였다.

“그대에게 솔직히 말하면 그대의 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일본이 살려고 먹은 것이다. 조선을 내놓으면 일본은 죽는다. 일본의 생사가 달린 조선을 일본은 그대로 내놓을 수 없다. 그대의 일은 망상이다. 그대의 연설이 얼마나 웅변이요 그대의 연설이 얼마나 철저하여도 일본은 할 수 없다. 조선이 독립을 하려거든 실력으로 싸워라. 생명을 희생해서 찾아라. 거저는 안 내준다.”

“내가 동경 와서 오늘까지 낙망하였다. 아무것도 볼 만한 것이 없어서 허행을 하게 된다고 하였더니 오늘 이 자리에서 인물을 하나 발견한 것이 내가 동경에 온 소득이다. 그대는 과연 인물이다. 일본인 중에 오직 그대가 인간적이요 양심적인 거짓 없는 참말을 하였다. 내 마음이 상쾌하다.”

노다가 기가 막혀서 “내가 밑졌다”며 머리를 흔들었다고 한다.

▲ 1936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재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사진출처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일본제국 천황 별장으로 아카사카별궁(赤坂離宮)이라는 곳이 있었다. 외국인은 나랏손님이 아니면 조금도 보여주지 않고 일본사람 가운데도 대신 급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는 곳이었다. 몽양에게 이곳을 둘러보게 한 것은 나랏손님으로 모신다는 뜻이었다. 궁성 안에서 점심까지 대접받고 돌아오는데 기자가 느낌을 물었다. 그때 몽양이 했다는 말이다.

“맹자에 보면 예전에 주문왕(周文王)이 70방리 동산이 있었는데 꼴 베는 이가 들어가고 꿩 잡는 이가 들어가서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동산이 작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선왕(濟宣王)이 40방리에 동산을 가졌는데 사슴 죽인 사람을 살인죄와 같이 벌하며 임금 혼자서 즐겨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동산이 너무 크다고 하였다. 만일 일본에 성군(聖君) 정치가 있다면 이런 것을 다 백성에게 개장해야 할 것이다.”

몽양을 구슬려 독립 뜻을 꺾으려던 일제는 다짐하였던 총리대신 하라(原敬)와 천황 만나보는 것을 푸지위하였다.(예전에, 이미 명령했던 것을 취소하고 중지시키는 일) 몽양을 모시고 다녔던 최근우는 이렇게 꼲아매기었다. (잘잘못을 가려서 평가하여 정하다)

몽양의 당시 연령이 34세였다. 전중(田中, 다나카) 육상(陸相)과 만나는 자리는 군사령관 회의 중이었기 때문에 우도궁(宇都宮, 우쓰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하여 관동, 청도, 대만 각지 군사령관과 수야(ヲ) 정무총감과 야전(노다) 체신대신 등, 고하(코가) 척식국장 등 정계ㆍ군계의 거두들이 열석하였다. 내가 전중이와 몽양을 속으로 비교하여 보니 저편은 연장자요 주권국 대신이요 군국권위의 배경이 있는 이요, 여기는 나이 젊고 식민지 한민(寒民)이요 피압박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좌석은 몽양 혼자 압도적으로 압력을 내어 내리누르며 정의로 싸우는 데 나는 처음 느끼는 통쾌감이었고, 정의가 무섭다는 것을 그때 목도하며 깨달았다. 수야가 강우규 의사 폭탄 인사를 받을 때에 수야의 꼴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고 통쾌하다. 그때 수야의 거동은 몽양 앞에 어린애 같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최근우(崔謹愚, 1892~1961)는 일교(一橋)대학 앞몸인 도쿄고상에 다닐 때 3ㆍ1운동 불심지가 된 2ㆍ8운동에 이름을 올린 조선인 유학생 11인 가운데 하나였다. 상해임정 초대 경무국장을 지냈고, 프랑스ㆍ독일에서 공부했다. 여운형과 함께 「건국동맹」을 짜는 데 들었고, 해방 뒤 건준 총무부장이 되었다. 이승만 시대에 이승만의 구슬림을 왼고개 쳐 여러 차례 동여지는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민족의 본마음을 지켰다. 4ㆍ19혁명 뒤 혁신세력을 모아 사회당을 얽어냈다가 박정희 반란군에게 붙잡혀 70이 되던 196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같이 가서 통역을 하였던 장덕수(張德秀, 1895~1947)는 상해에 있는 동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여운형 씨 투쟁은 극도로 만족하였다. 씨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국사(國士)이다. 여러 벗들도 만족히 알고 선투하기를 바란다.”

몽양은 이뉘를 떠날 때까지 수없이 죽여버리겠다는 울골질에 시달렸으니, 큰 것만 골라도 열두 번이다. 겨레 큰 별이 떨어진 애잡짤한 그날 하오 1시. 몽양이 탄 차가 혜화동 둥근네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경찰관 파출소 앞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 나와 몽양 차를 가로막았고, 급하게 멈출 수밖에 없는 차 속에서 몽양과 신변보호인 박성복(朴性復) 그리고 《독립신보》 주필로 건준 간부였던 고경흠(高景欽, 1910~?)과 운전수가 어리둥절해 하는 순간, 두 방 총소리가 나면서 풀썩 쓰러지는 몽양이었다. 한지근(韓智根)이라는 19살짜리 모진 놈이 몽양이 탄 자동차 앞뚜껑 위로 올라가 권총 두 방을 쏘았다고 발표되었는데, 범인은 21살 짜리 테러단 「백의사(白衣社)」단원 이필형(李弼炯)이었다. 이기형 옹 돌아봄이다.

 

▲ ‘현대철봉운동법’에 실렸던 몽양선생

(사진출처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일본옷 하카마를 입고 불상을 차려놓고 아이들과 일본말을 주고받는 춘원 이광수를 보고 노여워하였고, 만해 한용운을 만나고 나올 때는 그의 높은 절개에 경복함과 동시에 가난과 병중에 있는 그에게 연민의 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몽양을 만나고 나올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은 넘어져가는 고래등 기와집을 떠받치는 큰 기둥을 찾아 붙잡는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몽양의 용모에 대해 말해본다면-빛나는 두 눈, 넓고 반듯한 두드러진 이마, 우뚝한 코, 복스럽고 큰 두 귀, 처지지도 빠지지도 않은 아래턱 윤곽 등 어느 하나 빠지는 데 없고 빈틈없는, 원로 언론인 김을한의 표현을 빌면 그야말로 ‘미스터 코리아’였다. 그의 조부가 한번 보자 ‘왕재(王才)’라고 탄성을 올린 것도 과찬만은 아니었다고 수긍이 갔다. 키는 보통이 훨씬 넘고 골격은 굵고 운동으로 다져진 짜임새 있는 몸매에 더할 데 없이 당당한 체격이었다. 누구는 그 얼굴, 그 체격을 한마디로 ‘우람하다’고 표현했다. 몽양은 길을 걸으면 길에 꽉 찼고 연단에 오르면 단상에 꽉 찼다. (다음 주에 계속)

 

작가 김성동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지효대선사 상좌가 됐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단편 <목탁조>가 당선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으나 그에게는 승적이 없었다. 1978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 <만다라>가 당선됐고 이듬해 장편으로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됐다. 중편 <황야에서>로 소설문학작품상을 받게 됐으나 주관사측의 상업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창작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집>, <국수>, <꿈>, 우화소설<염소>, 산문집 <미륵세상 꿈나라>, <생명기행> 등이 있다. 지난 3월에는 제1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