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22)

▲ 2014년 국립 고려극장 무용공연

최근 개봉한 영화 ‘박열’에서 최승희가 부른 노래 ‘이태리의 정원’이 OST로 나오면서 다시금 최승희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친일파, 월북무용수, 숙청 등 그녀에게 따라 붙은 부정적인 수식어가 여전하지만 그래도 민족예술사에서 최승희는 무용수 혹은 안무가 이상의 의미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2010년 11월 25일 새롭게 문을 연 평양무용대학을 찾은 김정일 위원장은 "최승희 선생은 우리나라 민족무용발전에 공로가 있는 선생"이라고 말했으며, 사망 전인 2011년 12월 최승희 무용 보급을 유훈으로 남겼다. 그 결과 조선무용의 기초를 만들고, 배구자와 더불어 한국근대무용의 효시가 되었던 최승희는 영원한 “조선무용예술의 1번수”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생으로 1926년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카프 활동을 하던 오빠인 영화제작가 최승일의 권유로 경서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바쿠(石井漠)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도일, 약 3년 만에 주역급 무용수로 성장해 천재성을 드러냈다. 1929년 8월 서울로 돌아와 11월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신작 발표회와 다양한 공연을 가졌다. 1931년 문학가 안막과 결혼해 1932년 5월 장녀 안성희를 출산했다.

1936년 10월 댄스영화 "반도의 무희"의 주연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인 그녀는, 당시 마라톤 대회 우승자인 손기정과 함께 최고의 유명인으로 인기를 누렸다. 모던한 단발머리는 최승희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화장품, 의상 등 각종 광고의 단골 모델이었다.

이 시기에 동양무용과 발레를 접하면서 현대무용의 신세계를 예감한 그녀에게 민족춤을 지도해준 이가 바로 ‘한국무용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정준이다. 일제강점기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우리 전통춤을 예술의 경지로 반듯하게 살려낸 한성준으로 부터 배운 춤은 최승희의 민족혼이 되어, 우리의 전통춤을 서양춤 기법으로 살려 “전통무용의 현대화”를 이룬 최승희 춤의 근간이 되었다. 한성준으로부터 배운 태평무와 한량춤을 새롭게 재해석해 창작한 <에헤라 노아라(1933)>가 지금도 그녀의 출세작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왜색왜풍의 탁류 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민족적인 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모대김이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던 때였다. 바로 이 시기에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민간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무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 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현재조선민족무용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의 민족무용은 무대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장무대에 성악작품, 기악작품, 화술작품이 오르는 례는 있어도 무용작품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최승희가 춤가락들을 완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현대인들의 감정에 맞는 무용작품들을 창작해 내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무용도 다른 자매예술과 함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94년 5월에 나온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있는 관련 내용이다.

전통의 재창조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신무용이라는 양식을 정립해 가는 과정에서 최승희는 해외 공연을 결행한다. 1937년 12월 도미해 첫 해외공연을 가진 이래, 1939년 상반기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터키 등 유럽 순회공연, 11월 중남미 공연과 1941년 2월 일본 순회공연, 만주를 포함한 중국 순회공연을 거쳐, 1944년 1월 동경 제국극장 20일간 23회 공연 전회 만석의 기록을 거두기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굳건히 했다. 1938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마리 비그만(Mary Wigman),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이 되기도 했다.

170cm의 큰 키에 검은 머리 단발, 그리고 속이 훤히 비치는 복장을 하고 파격적인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에 서양인들은 매료가 되었고, ‘동양의 진주’‘동양의 이사도라 덩컨’‘반도의 무희’라는 수식어가 생겨난 것도 이때였다.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게리 쿠퍼, 로버트 테일러 등이 그녀의 공연을 관람했고 팬을 자청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레리나로 불리는 ‘안나 파블로바’에 비견될 만큼 전세계적으로 찬사와 명성을 얻은 것이다.

그렇지만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그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일제에 부역하게 된다. 1941년 11월 동경 공연 수익금의 일본 육군성 기부, 1942년 조선군사보급협회 주최 공연 수익금의 기부, 일본 전통무용을 소재로 한 작품 공연, 중국 위문 공연 등을 이어오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게 되었지만, 결국 친일 행적이 문제가 되자 남편과 오빠와 함께 1946년 7월 20일 월북을 하였다.

평양에 도착해서 북측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창작과 공연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부터 52년까지 북경 소재 중앙희극학원에 무용반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지도해 중국 무용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초대 위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하고, 1952년 공훈배우 칭호 수여, 1955년 무용부문 최초로 인민배우 칭호를 수여 받으며 1958년까지 최승희 무용학교 안무가로 활동했지만 남편 안막이 ‘제3당사건’으로 처벌을 받으면서 최승희 무용연구소도 폐쇄가 되고 평양음악무용대학 무용학부로 개편되어 평안무가로 좌천되는 등 위기를 맞는다.

그렇지만 1959년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공연인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을 창작 발표해 다시금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으로 복귀한 후, 1961년 11월 <최승희 탄생 50주년 기념공연(평양대극장)> 개최, 1962년 “민족무용기본동작” 영화화, 1964년 “조선아동무용기본” 발간, 1966년 3월 “조선무용동작과 그 기번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색” 논문 발표 등 왕성한 활동을 하지만 1967년 그녀의 나이 57세에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

최승희의 파국을 알린 것은 1967년 11월 8일자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다. 이 신문에서 최승희가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고 보도가 나온 것이다. 북측은 1967년 6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4기 16차 대회에서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 확립’을 결의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당종파분자’로 분류하고, 반대파를 색출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이 소용돌이 속에서 최승희도 유탄을 맞은 것이다.

그 징후는 이전부터 있었다. 1959년 초 남편 안막과 경쟁 관계에 있던 선전선동부 이일경 부장은 “자본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며 최승희를 비판했다. 결정타는 1958년 10월 김일성 주석이 예술인 집회에서 최승희를 공개 비판한 것이다.

“무용 대가라고 자처하는 한 예술인은 당과 인민을 위해 더 잘하라고 당에서 지도와 방조를 주었으나 그는 돈을 많이 받고 칭찬을 듣고 상을 타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을 부리고 시비질을 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논평을 신문에 내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부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자기만 잘난 체하면서 내세우던 나머지 마치 자기가 없으면 조선의 무용예술이 발전할 수 없는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다.”

2003년 탈북한 북한 무용수 김영순의 광산에서의 총살형 증언과 황장엽의 수용소 생활 중 병사라는 증언 등이 이어지며 최승희의 숙청설이 정설처럼 굳어졌지만, 여전히 최승희의 숙청과 사망에 대해서는 실체가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만 재일조선인 무용수인 리미남의 증언이나 최승희의 제자인 평양무용음악대학의 무용학부 강좌장을 지낸 김락영에 따르면 모함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무대에서 퇴출이 되었지만 1990년 중반 김일성 회고록이 나온 것이 계기가 되어 최승희의 무고함이 밝혀졌고, 2002년 11월 27일에 당의 방침을 받아 2003년 2월 11일에 발표가 되고 애국열사릉에 이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최승희는 공식적으로는 1969년 8월 8일 ‘서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릉에 있는 최승희의 묘비에 새겨진 날짜가 그날이다. 그녀 나이 59세로 무대를 떠난 지 2년만이다. 어쨌거나 북측에서 극존칭으로 사용되는 ‘녀사’라는 호칭이 따라 붙은 것으로 볼 때 사후 34년 만에 완전한 복권이 이루어진 셈이다. 묘지 앞에서 열린 추모 모임에서 그녀의 조카이자 북측의 유명한 시인인 최로사가 외친 추모사는 그래서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이다. “고모여, 최승희여! 이제는 땅을 차고 일어나라!”

2011년은 최승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2011년 11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 동안 안동춘 문화상, 김병훈 문예총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이 참석한 묘소의 화환 진정을 시작으로, 토론회와 출판, 기본동작 연구와 시연, 기념공연, 언론을 통한 재조명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11월 24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는 ‘태양의 품에서 영생하는 무용가’ (문학예술출판사) 발행식이 있었다. 이어 열린 연구토론회에서는 량창남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미라 부장, 최정렬 피바다가극단 조선무용연구소 소장, 임수향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무용부장이 참석해 열띤 토론을 가졌고, 조선무용 기본동작들을 보여주는 시범도 있었다. 여기에는 조선민족음악무용연구소의 연구자들과 무용예술부문 일꾼, 창작가, 재일조선무용가 대표단, 중국 상하이 김성무용단 총감독이 참가했다.

무소속 대변지인 <통일신보>는 최승희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장군님(김정일)께서는 생애의 마지막 시기인 2011년 12월 초에도 최승희 선생이 창작한 무용의 기본 동작들을 우리 인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널리 보급할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고 밝히며, “김정일 위원장은 최승희가 1970년 3월과 7월에 창작한 '부채춤'을 예술영화 '세상에 부럼없어라'에 넣도록 지시했으며, 무용 '환희'를 3.8 세계여성의 날 60돌 기념공연 무대에 올리도록 했다.” 또한, “딸 안성희와 함께 창작한 '농악무', '목동과 처녀', '쟁강춤', '조개캐는 처녀' 등이 무대에 올리도록 했으며, 최승희가 쓴 '조선민족무용기본(1,2)'를 학교에 보급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최승희의 춤을 '최승희춤체'라고 명명했다.”고 보도했다.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무용가 최승희 생일 100돌을 맞아 ‘은혜로운 품속에서 값 높은 삶을 누려온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승희의 행적을 반추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겼다. “조선무용예술의 1번수였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단연 1번수였으며 조선의 3대 여걸중의 한 사람으로 영도자와 인민의 추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그는 조선춤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우리 무용사에 뚜렷한 자욱을 새기였다”고 그 공적을 기렸다.

이에 앞서 2003년 2월 내각 기관지인 <민주조선>은 최승희 특집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여기서 최승희를 `세계 10대 무용가`라고 평하며 "수난당한 민족의 딸이었지만 민족의 `존엄`과 `얼`만은 언제나 잃지 않았다"며,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무용가였다는 점을 부각하고 "민족의 넋과 얼을 외세에게 절대로 짓밟힐 수 없다는 강렬한 지향은 그로 하여금 조선의 율동적인 멋과 맛이 나는 민족무용 연구에 한 몸 바치게 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대 조선민족무용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민족무용의 무대화 실현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운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 그의 유해를 애국열사릉에 안치하도록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2009년 7월에는 1956년에 최승희가 창작 초연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가 50여 년 만에 재연이 되었다. 2008년 4월부터 국립민족예술단 주최로 마련된 공연이다. 전 1시간 20분, 4장 구성으로 된 이 작품은 사도성에 침입한 왜적에 대항한 인민들의 투쟁과 그 과정에서 싹튼 성주의 딸과 한 어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림 작품이다.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11월 26일 평양대극장에서 다시금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최승희 춤이 조선무용의 출발이자 근간을 이루고 있음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민족무용의 전통적 요소와 발레의 과학적인 요소를 결합해 전통무용의 현대화를 이룩하였고, 이것은 장르적으로 무용시, 무용조곡, 무용극, 음악무용이야기 등으로 실체화 되었다. 그리고 무용의 기본 훈련체계와 대중성 및 배포에 기여한 조선민족무용기본과 그녀의 논문 등은 오롯한 성과임에 분명하다.

특히 발레나 현대무용에서나 볼 수 있는 극적 구성으로 창작된 민족무용극은 최승희의 빛나는 업적이다. 최승희는 <반야월성곡(1948)>을 시작으로 무용극 작품 9편 창작했다. <춘향전(1948)>, <조선의 어머니(1950)>, <조국의 깃발(1952)>, <사도성의 이야기(1954)>, <맑은 하늘 아래서(1956)>, <운림과 옥란(1956)>, <계월향(1961)>, <해녀이야기(1966)> 등이 그것이다.

“나는 조선의 리듬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가지고 서양으로 싸움을 하러 건너갑니다. 아! 나는 기쁩니다. 용기 백배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의심되는 것은 저는 제 자신이 확실히 조선의 호흡, 조선의 리듬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저도 제가 조선사람인 바에야 조선의 혼, 조선의 리듬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오빠! 저는 생각해요. 어떤 경우라도 민족은 망하지 않이 하고 그 민족과 예술도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고요.”

해외 공연을 떠나며 오빠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읽히는 것처럼 민족성을 고수하고자 한 최승희는 역사의 부침 속에서 거친 격랑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와 예술혼으로 민족무용의 신기원을 이룩한 무용수로 기억될 것이다. 전국의 춤꾼과 권번의 기생들을 찾아다니며, 우리 춤을 담아내려한 그녀는 결국 “조선의 무용 속에 세계를 담고자” 했던 결의를 지키며, 당대 중국의 매란방과 인도의 우다이 상카와 함께 동양의 3대 무용수로 우뚝 서서 오롯이 조선춤으로 세계인들을 매혹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영원한 조선무용의 별이 되었다.

최승희 노래 이태리의 정원(1936년) 

쟁강춤, 만수대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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