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남는 사람]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의 고 곽동의 6.15해외측위원장 추모의 글

지난 2004년 10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고국방문단이 광주 5.18국립묘지를 찾았을 당시 곽동의 위원장(오론쪽 두 번째)과 오종렬 의장(왼쪽 첫 번째)이 박승희 열사 묘역에서 박석무 당시 5.18기념재단 이사장(오른쪽 첫 번째)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사진 : 시민의소리 안형수 기자]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쳐오다 지난 10일 오랜 투병 끝에 타계하신 6.15해외측위원회 곽동의 위원장을 추모하는 글을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이 보내와 올립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집자] 

곽동의 의장님 영전에 올립니다. 

갑작스러운 부음을 듣는 순간 땅을 쳤습니다. 

가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두 번 아닌 단 한번이라도 뵙고 손잡아 봤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봉 길에 나설 날을 손꼽으며 병 깊은 몸을 추스르며 설마설마 하다가 그예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떨쳐내도 아쉬움과 그리움은 되살고, 생각은 실마리를 이어갑니다.

선생님은 침략자 왜적을 몰아내느라고 남해바다를 피로 물들이던 경상남도 노량 건너 남해도(南海島)에서 태어나 진주대첩의 혼이 서린 진주남강 촉석루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조국해방의 꿈을 안고 소년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일본 땅으로 건너가 재일동포의 권리쟁취와 우애친선을 위한 시민운동을 비롯하여 민족의 정체성과 참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청년운동에 온 힘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민(民)의 자발성에 의한 4.19혁명정신을 해외에 확장하던 중 이를 짓밟고 들어선 군사쿠데타에 분노 저항하였습니다. 마침내 군정통치의 영구화를 획책한 유신정권이 들어서자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뜻 있는 재미‧재일 동포들이 나라의 민주회복과 민족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한민통’을 건설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 했습니다. 유신정권이 김대중 선생을 납치하자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판단하고 유신반대와 김대중 구출투쟁에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역량을 총동원하였습니다. ‘한민통’ 조직을 개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이름으로 새 출발하는 데서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장에 더욱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고베 한신 대지진 때 한통련 성원의 총의를 모아 불구덩이에 빠진 현지동포를 구출 구휼하자는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모두들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지진이 어디 일본인 조선인을 가려봅니까? 국적과 국경을 넘어서 재난 당한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구원하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민족주의는 범세계 범인류적이라는 것을 역사 앞에 증명해 보여준 전설적 미담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6.15남북공동선언이 선포되자 우리의 생존과 번영의 철학과 전략전술이 여기에 있음을 투시하고 민족과 계급계층을 가리지 않는 세계화 인류화 운동의 선봉에 서셨습니다.

훗날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라는 멍에가 대법원 판결에 의해 해소된 다음에도 한민통-한통련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고립화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범죄적 수수께끼는 산 자들이 반드시 풀어야겠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한민통-한통련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고립화정책을 풀어주지 않은 데 대하여 수많은 강골전사들이 배신 운운 매도하는데도 선생님은 “옳은 일 좋은 일이라고 해서 사람이 다 할 수는 없는 것 아니오? 그래도 김 대통령은 6.15남북공동성언의 남측 당사자인 만큼 역사적인 민족민주 업적을 인정하고 기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이르셨습니다. 아량과 이해심, 역사의 정도를 밝히는 통찰력을 우리 모두들 배우고 싶습니다.

선생님, 꿈에 그리시던 조국산하에 새 날이 밝아옵니다. 그럴듯한 수사가 아닌, 올린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시고 고개 끄덕이시리라 믿습니다. 가실 길을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는가봅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사랑하는 내 형님!

이제 고단한 몸을 누이시고 통일조국의 붉은 넋으로 밝게 높이 오르소서.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오종렬 올립니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