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아무책 대잔치

얼마 전 광주를 다녀왔다. 스무 살이 되고부터 매년 이맘때면 망월동 묘지에서 5.18 민주항쟁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잔인함에 몸서리를 쳤다. 때론 공수부대가 보인 잔혹함은 비현실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선배, 동기, 후배들과 함께 전두환을 욕하고 공수부대를 비난했다. 저들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을 욕하는 건 쉬웠다. 그런데 한 가지 물음 앞에서 우리는,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 내가 공수부대원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해보지만 이내 무력한 대답이 이어졌다.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매년 비슷한 물음이 나왔지만 나오는 대답도 비슷했다. 37년 전, 공수부대원들의 비정상적인 잔혹함은 저 간단한 물음 앞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둔갑했다. 명령이니까, 군인이니까. 상명하복이니까, 시민들을 향해 발포할 수밖에 없다. 5.18 광주라는 극적인 상황을 빼놓고 본다면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도 자주 부딪히던 논리였다. “경찰이 무슨 죄냐?” “쟤들도 시켜서 나왔다.” 세월호 유가족이 연행되거나 밀양의 할머니들이 다치거나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명령의 불가피함’도 더 강력히 변호 되었다. 가끔이지만 누구는 강제로 끌려나왔는데, 누구는 자기 권리(이익)만 챙긴다는 서사도 보였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뀌기도 했다. ‘명령의 불가피함’이라는 상황을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저들(군인과 경찰)이 명령과 별도로 실은 악인이라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무런 ‘악의’가 없어도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게 하는 사회의 모습에 소름이 끼칠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은 꼭두각시의 운명을 타고났을까? 아니면 본래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천성일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극적인 사례를 통해 ‘악의’ 없는 ‘악행’을 가능케 하는 현대사회의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악의’와 ‘악행’의 분리는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다. 현대 관료제에서 목적과 수단의 분리는 곧 행위 ‘자체’와 행위의 ‘목적’을 분리했다. 실제 행위자는 행위의 목적, 의도와는 무관하다. 비록 그 행위가 자국민을 향해 발포하거나 유대인을 독가스실로 보내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행위는 잘게 나뉘어 분업화된다. 가스실을 설계하고,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고, 가스실로 이동시키는 모든 일이 잘게 나눠진다. 행위자들은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이들은 ‘유대인 절멸’의 열렬한 수행자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현대 관료제에서 행위자 개인의 ‘의도’는 별로 중요치 않다. 목적이 주어지면 이를 실현할 가장 효율적 수단을 찾는다는 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행위자들은 조직된다.

오히려 개인적 증오나 광기에 기반을 둔 폭력은 지양된다. 이런 폭력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절멸하기엔 비효율적이다. 부적합하다. 행위자들의 인종주의적 ‘증오’나 ‘광기’를 선동하는 것보단 ‘도덕’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게 더 주요하다.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이들에게 윤리적 책임감을 느낀다.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반유대주의 선동은 이웃에 사는 유대인에 대한 윤리적 감정마저 지우진 못했다. 나치당원들조차 지키고 싶어 하는 “일급 유대인”들을 각자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에게 그나마 남은 도덕적 이미지를 없애버리는 것이 필요했다. 유대인의 가슴에는 노란 별이 달렸다. 공공장소에서 치워지고 결국엔 보호를 명목으로 게토로 이주되었다. 사회적 유대가 끊기자 도덕의 작동도 멈췄다. 유대인은 살아있는 이웃의 얼굴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차가운 범주로 분류되었다. 이처럼 홀로코스트는 관료제적 목적과 수단의 분리, 각 행위의 분업화 그리고 도덕적 거리두기를 통해 이뤄졌다. 그 외에도 국가의 폭력독점, 도덕·윤리로부터 해방된 과학 같은 조건들도 필요했다. 비인간적 행위를 가능하게 한 이 모든 것들은 역설적이게도 사회화·문명화의 자랑스러운 성과기도 했다.

이렇게 적고 보니 꽤나 암울해 보인다. 정말 인간은 꼭두각시가 될 운명일까?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도, 37년 전 광주에서도 권력자에 맞서 양심을 우선에 둔 사람들이 있었다. 극형을 감수하며 유대인을 숨겨줬고, 목숨을 걸고 전남도청에 남았다. 아무도 이들을 강제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비인간적 행위는 수많은 사회적 조작을 해야 했다. 권위의 독점, 관료제의 확립, 도덕적 거리두기 등을 통해서만 인간은 “왜?”라는 물음을 하지 않는 권력의 부속품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맞서 싸울 기회가 부재한 상태에서 잠자고 있던 그들의 도덕적 양심은 사회적으로 생산되어야만 했던 비도덕(성)과는 달리 진정으로 그들 자신의 개인적 속성이었다.” 비인간성은 인간의 폭력성이라는 동물적 본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이라는 인간적 본능을 조작·통제한 결과였다. 만약 인간의 진짜 얼굴이라는 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37년 전 명령에 끌려왔던 계엄군보단 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시민군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이렇게 상상해보니 마냥 암울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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