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정훈의 ‘여명의 눈동자’(23)

1. 산 넘어 산, 북미 정상회담

트럼프의 대북정책이 열탕냉탕의 롤러코스트다. 트럼프 취임 직후 북미관계 개선의 첫 시험대는 지난 3~4월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축소 내지 중단 가능성 문제였다. 그러나 이 훈련에서 미국은 역대 최대급 전략자산을 총동원하여 한반도 전쟁위기와 군사적 긴장을 다시 고조시켰다.

5월 들어 일련의 전쟁위기와 군사적 긴장이 잦아들자 트럼프는 지난 1일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조선) 노동당 위원장과의 만남에 대해, “나는 전적으로 영광스럽게 그것(대화)을 할 것”이라고 했다. 9일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미국은 북의 정권교체를 추구하지 않겠다며,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면 미국에서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적절한 환경 아래에 놓여있다면”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어쨌든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언급한 것이다.

트럼프는 오바마의 ‘기다리는 전략’을 폐기하고 ‘최대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 전략’이라는 새 대북정책을 들고 나왔다. 백악관 대변인의 해설에 의하면 이 전략은 ‘군사적 선택을 제외한 채찍과 당근의 양면전술’이라고 한다. 트럼프의 새로운 대북전략은 전임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전략과 얼마나 다를까? 과연 북미 정상회담은 가까운 시일에 가능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관적이다.

2. 오바마의 연장선, 트럼프의 대북전략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전략과 트럼프의 대북전략은 어떻게 다른가? 오바마 정부는 지난 수십 년 간 진전된 북한(조선)의 핵‧미사일 관련 정보를 군과 행정부의 소수 수뇌부만 공유하며 비밀로 붙여 대응해왔다. 미국 주류언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방의 소국’, ‘스탈린체제 깡패국가’가 어느 날부터 세계 최강, 최대 군사비를 지출하는 미국을 핵과 미사일로 위협한다는 말을 차마 미국은 공개적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임기 초반 이 정보를 제한적이나마 더 넓게 공유하고 위기의 심각성을 공개하고 있다. 미국이 더는 북 관련 정보를 비밀로 유지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이 국가안보위기에 이른 딱한 사정을 자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는 그간 미국의 대북정책을 실패로 규정하고는 북한(조선)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가장 긴급한 안보 현안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하며 적극 대응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북의 핵 무력에 관한 극비정보를 연방 상원의원 100명 전원에게 설명하는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 미국 정치사에서 전례가 없는 비밀회의이다. 트럼프가 요청한 이 비밀브리핑에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 댄 코츠 국가정보국(DNI) 국장 등 외교·안보 당국 수장들이 모두 참석했다. 내용은 비공개로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북의 핵‧미사일 비밀 정보와 대응 정책이 정치권에 공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기존 대북 적대정책을 전격 폐기하고 북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것일까?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 일본 교도통신은 지난 9일 복수의 외교 소식통을 인용,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통해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 의사를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트럼프 정부가 ▲국가체제의 전환을 추구하지 않는다 ▲김정은 정권 붕괴를 추구하지 않는다 ▲남북통일을 가속화하지 않는다 ▲미군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는 38선을 넘어서 북한에 진출하지 않는다 등의 조건을 중국측을 통해 북에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한반도 분단 상황을 유지하면서 ‘9.19공동성명’으로 되돌아가자는 메시지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또는 ‘북미 평화협정’ 문제는 과거 6자 회담과 9.19공동성명 합의 목록에도 있었으나 실행과정에서 미국이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한 것이었다. 미국이 이제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겠다는 의도이다. 즉 뒤늦게 북한(조선)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평화협정 포함)를 동시에 일괄 타결하여 추진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런 미국의 입장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북의 대미 핵 타격 능력이 현실화되자 오바마 행정부 말기에 이미 미국이 북과 수차례 비밀접촉과 이른바 1.5트랙 민관회담을 통해 은밀히 타진했던 내용이다. 이런 진전과 공개적인 논의가 한국 수구보수세력에게는 사실 충격이며 배신감을 느끼게 할 만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평양의 대응은 더 충격적이다. 9.19성명은 지나간 버스이고, 세계 비핵화 없는 일방적 북한(조선) 비핵화는 더 이상 없다는 일관된 입장이다. 노동당 7차 대회 노선을 계속 견지하겠다는 뜻이다.

3. 문제의 본질, 두 가지 평화협정

현재 북미관계 문제의 본질은 대결에서 협상으로 전환하느냐 여부가 아니다. 비핵화 평화협정과 북미관계 정상화가 중심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지금 핵심 문제는 ‘어떠한 수준의 평화협정’인가에 있다. 미국의 대표적 정책연구기관인 미국외교협회(CFR) 보고서들과 과거 대북정책에 직접 관여했던 강경파 대북전문가들조차 오마바 정부 말기에 이미 극한점에 이르러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북핵 문제에 대해 북미 평화협정을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결국 수용한 셈이다.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발언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난 2000년 북미관계 정상화를 포함하는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클린턴 행정부 말기 성사된 배경과 최근의 상황은 차이가 있다. 당시 북은 핵개발 중간단계에 있어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지키며 한반도 비핵화에 응할 의향이 실제 있었다. 핵 개발과 북미 평화협정을 상호 교환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차기 부시 행정부는 북미 합의를 전면 백지화했고 오바마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 북은 거의 속도전으로 핵 무력체계를 완성(경량화, 소형화, 다종화, 정밀화)하고 대량생산 단계에 들어서 핵을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왔다. 이는 마치도 중국과 영국에게 비핵화하라는 소리와 똑같다. 미국은 대북 적대전략과 정권전복 전략에 매달리다 비핵화 협상 기회를 완전히 놓친 것이다. 미국은 현재 지나간 버스를 되돌려 세우자고 뒷북을 치고 있다.

중국이 제안하는 ‘쌍중단 쌍궤병행’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전략과 일치한다. 쌍궤병행(雙軌竝行)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를 동시에 시작한다는 것이고, 쌍중단(雙中斷)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동시에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북-중 관계를 고도로 중시한다는 말은 허언에 가깝다. 중국 역시 자국중심의 G2, 신형대국관계를 앞세우며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조선)은 지난해 노동당 7차 대회에서 ‘핵보유국 지위에 맞게 대외관계를 발전시킨다’는 노선을 결정하였고 대미관계도 이런 견지에서 풀어가겠다는 입장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표명하고 있다. 즉 앞으로는 북의 비핵화를 전제로 한 9.19성명 방식의 평화협정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북의 입장에 변화도 없다면, 트럼프의 ‘최대 압박과 관여’ 전략도 전임자 오바마의 ‘기다리는 전략’과 마찬가지로 곧 다시 위기에 봉착할 게 분명해 보인다.

▲사진 : 노동신문 홈페이지

4.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대결

트럼프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를 비난하지만, 크게 보면 그 역시 대북 적대정책의 전환이 아닌 압박과 위협으로 북을 비핵화 협상으로 유도하겠다는 전략을 다시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트럼프가 자신의 전략을 어떻게 표현하든 결국 ‘오바마 3기’ 전략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북미 정상회담이란 회유책을 공개적으로 열어놓고, 전쟁위기와 봉쇄정책을 추진한다는 게 그나마 다르다고 하겠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지난 11일 미 CIA가 북의 핵과 탄도미사일 위협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특수조직인 ‘코리아 임무 센터(Korea Mission Center)’를 신설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특정 국가에 집중한 임무 센터를 창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안보 위기감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주한미군이 대북 휴민트(스파이) 정보부대를 10월에 신설한다고 한다. 사드도 조기 배치했다. 정상회담을 꺼내면서 한편으로 전쟁 대비를 동시에 다그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럼에도 북한(조선)이 입장에 변화가 없다면 미국의 선택지는 세 가지로 좁혀진다.

1. 협박과 봉쇄, 전쟁위기를 계속 진행하며 비핵화 전제 평화협상을 유도하는 것.

2.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고 전격적으로 북 핵동결 평화협정(핵보유 평화협정)을 개시하는 것.

3. 북에 경제위기나 정치적 동요가 조성될 경우 선제 핵공격으로 전쟁을 전격 개시하는 것.

북이 할 수 있는 대응전략도 세 가지로 좁혀진다.

1. ICBM 시험과 핵 무력을 증강하며 자립적 경제력을 더욱 키우는 것.

2. 전쟁을 가능한 피하며 핵보유 평화협정을 관철하는 것.

3. 미국의 선제공격 징후가 보일 경우 조국통일대전과 대미 태평양전쟁을 단계적으로 전격 개시하는 것.

5. 통일 문제와 새로운 국제질서

국민들의 시야가 주류 언론에 갇혀 우리 문제조차 CNN이나 미국식으로 보는 동안 한반도 문제는 어느새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 문제로 발전했다. 북미 대결이 재래식 전쟁에서 미증유의 핵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와 미국의 일극 패권체계에 균열이 발생했다. 미국에 맞서 다극화를 추진하는 중국, 러시아 중심의 대미 군사균형과 견제구도 역시 큰 영향과 충격을 받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군사전문가들도 북미간에 전쟁이 다시 발생한다면 이는 핵 보유국간 벌어지는 인류 최초의 핵전쟁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2차 전쟁이 발생한다면, 양상은 지난날의 상호 군사동맹과 지원이 별의미가 없는 핵전쟁과 세계대전이 될 것이다. 중·러가 개입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이라크나 시리아 수준의 전쟁이 아니다. 

한반도 전쟁에 중국과 러시아가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북한(조선)에 대한 군사적 지원 차원 문제가 아니다. 이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전대미문의 3차 세계 핵 대전의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쟁과 평화 문제는 주변국 문제가 아니라 결국 자신들의 위기 문제가 된다. 보수언론이 흔히 말하는 정권붕괴와 북 난민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아무도 상상하지 못 했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반도 평화 문제를 작용과 반작용의 과정에서 이렇게 키운 것은 다름 아닌 핵 패권국가 미국 자신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협정이 어떻게 결말을 보는가는 이제 아시아 지역 문제가 아니라 미래 세계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평화협정은 당연히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다루게 되며 차후 평화적 통일 문제와도 연동된다. 이는 또 미래 통일국가의 핵 보유 문제이기도 하다. 한반도 주변국은 모두 핵을 가지고 있다. 핵을 보유한 통일 코리아와 핵을 보유하지 않은 통일 코리아의 자위력, 그리고 국제적 지위와 역할은 크게 다를 것이다. 일본 우익은 헌법을 수정해 핵을 보유하고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만들려 하고 있다. 중국은 핵을 보유한 강력한 통일 코리아를 반대한다. 노동당 7차 대회에서 결정한 국제전략을 살펴보면 북은 상호 핵군축을 하지 않는 이상 핵을 보유한 평화협정과 핵을 보유한 통일을 기본 방향으로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전례 없이 비핵화 평화협상의 길과 북미 정상회담을 띄우며 북에게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북의 태도는 완강해 보인다. 따라서 현재 북미 관계는 대화와 타결이 아니라 최후 대결을 눈앞에 둔 형국으로 보인다. 미국은 더 거칠게 위협공세와 경제봉쇄를 취할 것으로 예상되며 북은 미국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고 퇴각하지 않는 이상 핵과 ICBM 시험을 계속 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 : 뉴시스

6. 새로운 한국 정부의 선택

67년 동안이나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은 언제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미국의 일방적인 대북 군사협박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북의 핵과 미사일 문제는 한반도, 동북아뿐 아니라 북미 양국의 안보위기로 발전했고, 이것이 자신의 안보 현안임을 미국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임기 초반 이 문제를 조기에 전격적으로 해결한다면 세계의 화약고인 한반도 문제는 정리되지만, 거꾸로 위기가 더욱 증폭된다면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역시 임기 중에 이 문제를 못 끝낼 가능성도 있다.

문제인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여건이 되면 평양도 갈 수 있다면서 남북 정상회담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이나 6.15공동선언, 10.4선언 재개에 제동을 걸면서 한국의 새 정부에게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보조를 맞추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남북 교류를 모두 차단한 5.24조치 해제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만 개성공단 재개는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북의 올해 신년사를 보면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확고한 것 같다. 남북 고위급회담 복원과 민·관이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 전민족대회를 올해 개최하고 여건이 되면 남북관계에 전환적 국면을 열 정상회담도 수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촛불항쟁으로 등장한 새 정부의 대북정책은 올 하반기와 내년 초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통일의 길을 과감히 열 것인가, 아니면 오바마 3기 트럼프 행정부가 강요하는 대북 적대정책과 대결의 길을 따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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