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연재] 이희종의 '진보정치 그 다음'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나의 글쓰기도 다시 시작한다.
내 한 표야 이미 정해두고 있었지만, 딱히 열성적으로 지지할 후보가 없었다. 덕분에 담담히 지켜보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이런 모습은 정상적이지도 않고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제3자의 처지에 있으니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는 선거였다.
어제의 동지들이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다지 열심히 하지도 않았었지만, 페이스북마저 눈팅만 하게 됐다. 비겁하게도 글쓰기도 멈추었다. 가끔 할 말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말해 뭐하겠냐고 묵혔다.
이제는 단결의 글쓰기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서점에서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라는 책을 보는데 이야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랍을 만드는 뇌’에 관한 이야기다. 편견과 오해에 대한 뇌과학이다.
인간은 ‘서랍’으로 상징되는 분류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기억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의 기준으로 만들어둔 여러 개의 서랍장 중 하나에 넣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외국인, 아시아인, 한국인 등 국적에서부터 백인, 흑인, 황인과 같은 인종의 서랍.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의 서랍. 빨갱이 좌파, 꼴통 우파 등 정치적 성향의 서랍 등 여러 기준에 따라 사람을 분류해 기억한다.
진보정치판에서 내가 상대를 기억할 때도 다르지 않다. 소속단체가 어디인지, 어떤 주장을 하는지, 몇 마디 말만 나누면 몇 개 안 되는 서랍장 중에서 어디에 넣어야 할지 판단할 수 있다.
한국계 독일인인 저자는 독일인들을 만나면 항상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고 했다. 실제로 독일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생활하는 그로서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은 독일 출신이라고 대답하지만, 결국에는 어머니는 북한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남한에서 태어났다는 상대방이 적절한 분류를 할 수 있는 대답을 할 때까지 질문을 받아야만 한다고 했다.
진보정치의 현장에서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민중의 꿈' 회원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알 만한 사람들은 나를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 아직은 당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과거 통합진보당 당원으로 분류하여 기억할 것이다.
이런 기억 방식은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 나의 글은 민중의 꿈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를 사고, 의도가 있는 글, 뻔한 글로 읽히기도 한다. 이건 마치 몇 개 안 되는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기억방식은 인간의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경험과 기억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있어야 상황에 따라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특히나 빠른 판단과 적절한 대응을 요구받는 뇌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분류를 통한 기억은 효율적이고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편견이라고 하지만, 어림잡아 짐작해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능력이다. 저자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편견, 편애도 아주 인간다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페이스북에서 여러 친구들의 논쟁을 보고 있자면 이런 분류의 기억이 오해를 불러오는 경우를 많이 본다.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어떤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특정 서랍에 넣어 기억하기 때문이다. 몇 마디 글을 주고받다 보면 늘 당신은 어느 당 소속, 누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다. 요즘 같은 선거기간엔 이런 선입견, 편견이 일상이 되는 때다. 하지만 사람의 정치적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으니 서로 실례를 범할 때도 많다.
편견과 오해를 없애기 위해 머릿속 서랍장을 없앨 수는 없다. 저자는 오히려 서랍장을 늘이라고 충고한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생활방식을 배워 차이와 고유성을 존중해 훨씬 더 많은 서랍을 만들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편견이 없다. 새로운 상황에 빠져드는 능력도 탁월하다. 이미 만들어 놓은 서랍장에 기억을 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랍장을 만드는 방식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대선이 끝났다. 촛불 항쟁과 진보적 정권교체를 이야기했지만, 나에겐 적, 동지, 경쟁자를 구분하기도 힘든 선거였다. 지금 진보정치에 평가도 논쟁도 필요하다. 하지만 대선 후 진보정치를 다시 설계하려 한다면 나의 서랍장이 너무 적지는 않는지, 분류는 적당한지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그들을 존중해야겠다. 아이들처럼 서랍장을 다시 수도 없이 짜볼 마음을 먹어야겠다. 그래야 단결의 글쓰기도 가능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