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문학사상사 출판/김진준 번역)

영국의 생태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1972년 열대의 섬 뉴기니에서 조류의 진화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홀로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름다운 해변에서 그 지역의 원시부족 지도자 얄리와 조우한다. 얄리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부(富)를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뉴기니 인들은 그런 부를 만들지 못한 겁니까?”

얄리의 눈동자에는 깊은 고뇌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깊은 충격에 빠진 채 그와 헤어지고 말았다. 정말이지 왜 백인은 부를 창조했는데 뉴기니 인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 왜 인류의 문명에는 심각한 불평등이 존재하며, 서로 다른 발전 속도를 간직한 것일까?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이런 고민에 몰두하여 20년의 연구 끝에 펴낸 책이 바로 『총, 균, 쇠』다.

얄리의 질문은 비단 제레드 다이아몬드 혼자를 고민에 빠뜨린 것은 아니었다. 대학시절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하여 이를 체화시켰다고 믿었던 나 또한 중요한 문제에 부딪쳤다. 얄리의 질문에 담긴 궁금증은 마르크스의 사상과 정면에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소중한 특성은 <노동>이다. 오직 인간만이 노동도구(즉 생산수단)를 만들어 자연을 바꿔내며, 오직 인간만이 자연에서 거두어들인 생산물로써 동료 인간을 이롭게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homo faber)’로 규정했으며, 인간의 역사란 노동도구(즉 생산수단)를 순차적으로 개선시켜 더 나은 단계로 진전시켜온 과정이라고 보았다.

굳이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란 끊임없는 생산수단 발전의 역사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생산수단을 바꾸는 과정에서 그에 조응하는 경제조직을 만들어냈고, 정치조직과 법체계를 완비하였다. 그뿐 아니라 생산수단을 더 잘 만들어낼 후손을 양성하려 교육 시스템까지 변화시켰다. 그런데 그 과정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의 외부적 충격이나 환경적 영향에 의거해서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노동능력>을 증진시켜온 과정이었다.

즉 마르크스의 관점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란 마치 계란과 비슷하여, 특정한 온도가 가해지고 적절한 습도가 주어지면, 알이 깨서 병아리가 부화하듯 자생적으로 성장한다고 보았다. 결국 인류 역사는 자생적인 변천을 거쳐 농업사회에 이르렀으며, 자생적인 변화 끝에 자본주의로 바뀌어 더 나은 미래로 변화할 가능성까지 내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얄리의 질문은 이런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심오한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모든 인간이 노동도구를 만들고, 또 이를 발전시켜 현대에 이르렀다면, 왜 뉴기니의 원주민은 발전의 도상에 있지 않고 원시상태에 머물렀을까? 혹여 이들에게 더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 지구상의 다른 지역 인류와 마찬가지로 자생적으로 농경시대를 겪게 되고, 산업혁명까지 겪어서 자동차를 생산하며,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정보화 기기를 향유하게 될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답은 “아니요”다. 그가 『총, 균, 쇠』에서 밝히는 바는 인류가 결코 자생적인 진보의 과정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거꾸로 인류는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면 정지된 문명에 머무르려 하며, 기존의 생활습관을 좀체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 발전은 자생적인 것이 아니며, 외부변수와의 끊임없는 충돌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를테면 농경의 시작이나 산업화도 공동체가 생존에 위협을 느꼈을 때 촉발된 것이다.

인간 공동체가 생존에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자연환경이 급격하게 바뀌어 생명의 유지가 위태로워질 경우. 둘째, 외부 사회의 침략으로 공동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경우. 이 두 가지 상황에서 인간 공동체는 자기 방어의 차원에서 생산수단을 바꾸는 것이다.

『총, 균, 쇠』에는 이런 자기 방어적 변화 사례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담겨 있다. 첫째의 사례로 농업의 발생을 들 수 있다. 인류의 역사상 최초의 농업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알려진 터키 남동부 지역에서 B.C. 8500년 무렵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농경이 시작되었을까? 그 이유는 이 지역에서 인류가 수렵하거나 채집 가능한 기존의 동식물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절박한 생존의 필요에서 씨앗을 뿌리게 되었고, 농경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냈다. 이런 생산수단의 변화는, 나중에 우리가 ‘4대 문명지역’이라 부르는 여타 지역에 전파되었으니, 결국 인류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주민처럼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지 않았더라면, 뉴기니 인이나 아마존의 원시부족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새로운 생존도구를 개발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의 사례로는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의 부대와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의 조우를 들 수 있다. 잉카 문명의 경우 말을 가축으로 사육하지 않았으며 바퀴조차 발명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총을 쏘아대는 피사로의 200명 부대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서, 무려 2만 명의 잉카 대군이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히고 만다. 이는 방위적 근대화가 되어 있지 않던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에게 예속당하고, 선진 문명이 후진 문명을 종속시켜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한국의 개화기를 들 수 있다. 한국은 그 어떤 자생적인 발전 경로를 통해 근대화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서구 열강과의 관계 속에서, 아니 메이지 유신을 더 일찍 받아들인 일본의 위협과 침략 과정에서 근대화를 체험하게 된다. 

결국 『총, 균, 쇠』에 따르면, 한 공동체는 결코 자생적으로 생산수단을 바꾸지 않는다. 자연환경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혹은 역사적 외부적 정치 지세 가운데에서, 새로운 생산수단을 받아들이거나 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왜 하나의 공동체가 자생적인 경로로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주장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계란이 알을 깨고 나와 병아리로 자라나는 과정처럼, 한 사회의 내면에 잠재된 능력이 잉태되어, 그 어떤 필연적인 경로를 따라 사회주의로 발전한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것은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 아래 있던 19세기 영국 사회의 지적인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보수주의 진영에선 약육강식을 주장하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유행하고 있었고, 진보주의 진영에선 사회주의의 자생성, 필연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 사상이 널리 퍼졌던 것이다.

대학시절 나는 인류가 어떻게 해서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제로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놓고 동료들과 논쟁을 벌였던 경험이 있다. 당시 나와 동료들은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라는 책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는데, 그 책에는 인류의 자생적인 진보를 주장하는 모리스 돕이라는 학자와 세계체제 속에서 외부적 충격으로 자본주의가 태동했다는 폴 스위지라는 학자의 논쟁이 담겨 있었다. 나나 동료들은 마르크스의 자생적 발전 이론을 신봉했기에 이구동성으로 모리스 돕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무렵의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인류는 결코 자생적인 역사 변천을 겪지 않는다. 세계체제의 복잡한 지형 가운데에서 외부세계의 문물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생산수단을 개발해내는 것이다.

뉴기니나 아마존 같은 고립 상황, 혹은 티베트의 험난한 산맥과 같은 거대한 담벼락이 정지된 문명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정지된 문명과 현대인의 삶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은지는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총, 균, 쇠』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던지고 있다. 생산수단의 변천이나 발전 자체를 신봉했던 마르크스와 달리, 모든 생산수단이 인간본성과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기술이나 제도는 그 발생의 의미를 반드시 따져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생산수단의 변화나 발전에는 그 어떤 계급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또한 세탁기나 냉장고처럼 인류의 편의를 증대시키는 도구도 있지만, 그와 달리 신자유주의 시대에 등장한 무수한 금융상품이나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등장한 각종 무기처럼 아예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도 적지 않다. 그런 연유에서 『총, 균, 쇠』는 진보주의자의 역사관에 아주 중요한 문제를 던지고 있다.

남 한  소설가 겸 자유독서가

1983년 서울대 철학과 입학
1990년 미 메릴랜드 대학 물리학과 대학원 수료
소설집 [유다와 세번째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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