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1

조국과 역사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을 작가와 책을 펴낸 ‘박종철출판사’의 동의 아래 연재한다. 작가는 ‘일흔한 분의 헌걸찬 어르신들께 바치는 한 점 향불’을 올리는 마음으로 6년여 간의 발품과 작업과정을 거쳐 원고를 완성했으며, ‘혁명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허물어진 혁명가들의 삶을 떠올려 보는 마음’을 보태고자 펴낸 책이라고 밝혔다. 소개되는 혁명가는 책의 순서와 달리, 작가의 동의 아래 민플러스 임의대로 선정 소개함을 밝혀둔다. 첫 번째 혁명가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편집자]
▲몽양 여운형 선생[사진출처 : 몽양여운영기념관 홈페이지]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두물머리 거쳐 양서면 신원리로 갔는데, 묘꼴이었다. 몽양선생 생가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신원역 굴다리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고, 어욱새 더욱새 덕갈나무 메마른 가랑잎만 소소리 바람 뒤섞이어 으르렁 스르렁 슬피 우는 몽양 생가 터무니에서 영산마지만 죽이는데, 저만치 꺼뭇한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을밋을밋 가보니 빗돌이었다. 해포 앞서 세운 ‘몽양고택유허비’였는데, 「양평애향동지회」라고 오목새김되어 있었다. 그런데 얄망궂은 것이 빗돌을 세운 사람들 이름도 없고 빗글을 짓고 쓴 사람 이름도 없다. 얼키설키한 몽양선생 항일투쟁 발자취를 성글게 추려놓은 빗글 끝에 달랑 ‘이기형’이라고만 훈민정음으로 새기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기형(李基炯)이라면 『몽양 여운형』이라는 평전을 낸 극노인이다. 26년 전이고, 올해 97살로 돌아가셨다. 8.15 바로 뒤 신문기자를 하여 해방공간 속내를 어지간히 알고 계셨던 분이다. 『몽양 여운형』에 나오는 대문이다.

몽양의 묘꼴 생가는 기역자 안채와 기역자 초가집 바깥채로 되어있고 안채는 돌층계 위에 높게 자리 잡았다. 담 안 안채 후원에는 디딜방아가 있었다. 담 밖 사랑채 앞에는 앞마당이 붙었고, 다시 조상대대로 문묘가 있는 산으로 연결되었었다. 이 집은 본시 재실로 영회암(永懷庵)이라는 택호를 가지고 있었다. 6·25 때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폭격에 불타버리는 비운을 맞았다.

몇 해 전 복권된 몽양선생이다. 독립운동 유공자 2등. 1등 유공자는 이승만이었으니, 뜻있는 이들은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가 터 가는 쪽을 알려주는 알림표 하나 없고 생가 터임을 밝혀주는 알림판도 없으며 ‘역사 양평’을 자랑하는 숱한 알림책자며 좀책 그 어디에도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선생 성명 삼자는 없다. 미·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민족자주 ·민족주체 정치인 몽양의 중도통합 노선을 이루었더라면 이 겨레에게 겨레가 찢겨지는 슬픈 일은 없었으리라는 생각 또한 부질없는 짓인가. 친일 민족반역자들과 손잡고 반쪼가리나라 세운 이승만 붙좇는 자들한테 돌아가신 몽양선생은 저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이럴 수는 없다.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비록 복권은 되었다지만 여태도 시퍼런 수구반공논리가 판치는 이 땅에서 몽양을 기리는 이들이 차마 애타는 마음으로 세워놓은 조그만 빗돌이라는 것을 알 것 같으니, 아아. 민족사의 큰 별을 낳고 길러준 양평 사람들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뼈저린 뉘우침도 없는가. 네둘레를 둘러봐도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몽양선생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 양평 생가 앞에 서있는 몽양 여운형[출처 : 몽양여운형기념관 홈페이지]

몽양 여운형(1985~1947)은 진서 공부를 하는 틈틈이 온갖 운동으로 몸기르기를 하며 서울에 있는 배재학당·홍화학교·우체학교를 옮겨 다니다가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우체학교를 그만두었다. 한 달에 27원 받는 공다리 자리가 다짐된 졸업장이었다.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인 「단연동맹(斷煙同盟)」을 얽어내고 광동(廣東)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었으며 골골샅샅 돌아다니며 애국계몽 연설을 하였다.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노비를 해방시킨 것이 22살 때였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그대들을 다 해방시키겠다. 이제부터 저마다 제 마음대로 움직여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그러므로 서방님이니 아씨니 하는 말부터 입에 올리지 마라. 사람은 날 때부터 똑같다. 상전과 종으로 나누는 것은 어제까지 풍습일 뿐이다. 오늘부터는 그런 낡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제 뜻대로 살아가라.”

▲ 몽양 여운형의 생가와 몽양여운형기념관. 이 글을 쓸 때에는 생가 복원이 요원한 때여서 현재의 모습과 글의 내용은 확연히 다르다. 기념관에는 서거 당시 입었던 혈의, 장례식에 사용된 만장, 서울 계동 집에 있던 책상, 2008년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의 유품과 자료가 전시돼있다. [사진출처 : 몽양여운형기념관 홈페이지]

1914년 남경(南京) 금릉(金陵)대학 신학과에 들어갔고, 1918년 8월 상해에서 「신한청년단」을 만들어 대표와 총무가 되었으며, 12월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보내는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미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건네주었다. 노령과 간도(間島)를 돌아다니며 그곳에 있는 이동휘장군 같은 민족운동 채잡이들과 독립운동 길을 주고받았고, 상해임시정부 외무부 위원과 「상해한인거류민단」단장이 되었다. 1919년 12월 동경 제국호텔에서 일제 목대잡이들 맞대놓고 조선독립을 내세우는 멱찬(더할 수 없는 한도에 이르다) 말을 뱉어냈다.

1921년 『공산당 선언』을 조선말로 옮기었고, 광동정부 손문(孫文) 총통과 조선독립과 피압박민족 해방문제를 놓고 이야기하였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의장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레닌· 트로츠카와 뜻을 맞추며 조선독립운동을 도와달라고 졸랐다. 1929년 7월 왜경에 붙잡혀 32년 7월까지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우가키(宇垣)총독이 도와달라는 것을 자빡 놓았고(딱 잘라 거절하였고), 1933년《조선중앙일보》사장이 되었으나 36년 8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았다. 그때에 사람들이 하였다는 말이다.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떡꺼덕,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계속)

* 이 글은 생가 복원 이전에 취재하고 작성한 글이어서 생가터에 대한 설명이 현재와는 사뭇 다르다.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몽양선생 서거 64주년인 2011년 생가가 복원됐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66에 위치한 생가와 몽양기념관에는 서거 당시 입었던 혈의, 장례식에 사용된 만장, 서울 계동 집에 있던 책상, 2008년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의 유품과 자료가 전시돼 있으며 몽양선생의 삶과 정신을 배우는 체험공간으로 활용된다. 

 

작가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지효대선사 상좌가 됐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단편 <목탁조>가 당선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으나 그에게는 승적이 없었다. 1978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 <만다라>가 당선됐고 이듬해 장편으로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됐다. 중편 <황야에서>로 소설문학작품상을 받게 됐으나 주관사측의 상업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창작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집>, <국수>, <꿈>, 우화소설<염소>, 산문집 <미륵세상 꿈나라>, <생명기행> 등이 있다. 지난 3월에는 제1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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