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도시빈민의 삶과 투쟁’ 기고를 시작하며

'도시 빈민'이라는 용어는 진보진영에서 나름 오래 활동을 해온 사람들도 막상 물어보면 쉽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좀 들은 얘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 노점상 분들이요?" 정도의 대답을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도시 빈민 문제는 사회변혁을 얘기하는 진영 내부에서도 주변부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진보적 언론들도 다루기 꺼려한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이제 자신들이 직접 풀어놓고자 한다. 빈민단체 활동가들과 빈곤문제를 연구해 온 전문가들이 현장언론 민플러스에 도시 빈민들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주제로 연재한다. 첫 순서는 박정환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조직국장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취지를 전하는 프롤로그이다. [편집자]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순수성에 주목한다. 끊임없는 욕망의 재생산은 자본주의의 동력이고 개발과 성장이 최고라는 하나의 의식을 만들어낸다. 필연적으로 평범한 사람들도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욕망하는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로 가득한 대도시는 그런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결과물이다. 그 욕망으로 채워진 휘황찬란한 대도시의 빌딩숲이 높아질수록 그것의 그림자도 더욱 커지고 짙어진다. 그렇게 짙어져가는 도시의 그림자 속에 사람들이 있다. 팽창하는 도시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 빈곤의 얼굴들을 하고 있다. 다양하고 더 처절해지는 그림자 속의 모습처럼 빈곤을 철폐하고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도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 2016년 10월 이수역 7번출구 노점 강제철거 이후 망연자실한 노점상인들(사진제공: 빈민해방실천연대)

도시 빈민이란 어떤 존재인가

산업화와 도시화로 생겨난 도시 빈민은 일종의 현상적인 존재다. ‘도시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공식적인 고용-피고용의 노동시장이나 법, 제도와 사회안전망에 포함되지 못한 삶의 다양한 형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대표적으로 노점상, 철거민, 장애인 그리고 쪽방촌 주민, 홈리스, 기초생활수급자 등의 형태로 살고 있는 도시의 구성원들이다.

당연하게도 도시 빈민 역시 동료 시민이다. 그러나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은 도시 빈민에 대한 헌법적 기본권도 존중하지 않는다. 동료 시민들조차 도시 빈민을 비(非) 국민으로 대하며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생존권을 지키고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떼쓰기로 치부하는 권력집단과 을(乙)질, 감성팔이, 피해자 코스프레라며 인신공격하는 얼굴 없는 댓글들은 서로 닮아있다.

‘도시 빈민의 삶과 투쟁’을 기고하게 된 이유

노동시장과 사회안전망에서 탈락하여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떠밀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과 투쟁은 그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면 주목하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민중운동과 진보정당의 활동가 중에서도 이해가 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예전에 IMF 구제금융 등으로 난리일 때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노점을 시작해서 20년이 지난 지금은 먹고 살만은 하다는 빈민 당사자에게 “알고 보면 빈민이라고 다 가난하고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죠?”라며 너스레를 떠는 활동가를 최근에 만났었다. 오랫동안 진보정치를 해왔던 사람이고, 아마도 귀족노조라는 이름으로 고임금을 받는 정규직/대공장 노동자집단에 대한 공격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일 텐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도시 빈민의 문제를 단순히 절대빈곤을 잣대로만 얘기하는 수준이었다.

▲ 용역들에 의해 강제철거 당한 후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400일 넘게 마포구청 앞에서 노숙투쟁 중인 신수1구역 철거민들

찢어지게 가난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만이 도시 빈민은 아니다. 절대빈곤이라는 협소한 개념으로만 빈곤문제를 대하는 순간 도시 빈민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아니라 복지정책의 시혜적 공간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워낙 많은 오해와 악선전이 함께하는 터라 도시 빈민에 대한 이해가 낮은 사람이라면 진보적 활동을 오래한 사람이라고 해도 큰 차이가 없을 수밖에 없다.

도시 빈민의 문제는 일종의 현상이기 때문에 사회적 맥락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은 도시 빈민에 관한 대부분의 관심사는 ‘얼마나 불쌍한가’에 집중된다. 아래 두 가지 사례를 보자.

[사례 1] 2016년 9월, 마포구 아현동 일대의 포장마차에 대한 마포구청의 강제철거가 있었다. 많은 언론이 그 강제철거에 주목했다. 아현포차가 강제철거 당한 이후 약 100m가량 떨어진 곳에서 장사를 하던 아현역 앞 노점상들이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소속 서부지역노점상연합으로 가입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노점의 숫자나 장사하시는 분들의 연세는 비슷하다. 이 아현역 노점상들의 투쟁에는 어떤 언론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사례 2] 2016년 4월, 서울 노원구 월계동 인덕마을 재건축 지역에서 조합측이 동원한 철거용역 300여 명이 강제철거를 하면서 상가 세입자들에게 소화기나 쇠파이프 등을 이용해 폭행을 가했고, 그로 인해 30여 명이 뼈와 치아가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당했다. 같은 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폭력적인 상황에 대한 동영상이 방영돼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법원도 집행 과정에 있었던 인권침해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자체장들은 재개발/재건축에 대한 사업 승인을 마구 남발하고 있다. 물론 철거용역을 동원한 강제철거도 여전하다.

도시 빈민 문제에 관한 언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관심은 물리적 강자들이 불쌍한 약자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도시 빈민은 언제나 처절하게 당하는 약자여야만 한다. 자신들의 주장을 조직화하여 대응하거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요구하면 그때부터 그들은 지탄의 대상이 돼버린다. 이는 도시 빈민을 사회 변혁의 주체로 보지 않고 객체화하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언론이 강자에게 당하는 불쌍한 약자로 소비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류질서가 자본주의의 체제와 질서를 뒤흔들만한 조직된 민중의 적극적 저항은 탄압하고 개별 노동자 민중의 소극적 저항만 수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권력, 자본권력을 쥐고 있는 기득권에게서 조직된 노동자 민중운동이 그 권력을 가지고 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사회의 민중들을 조직하기 위한 전망과 기획이 필요하고 민중운동 간의 이해와 연대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 또한 필수이다.

그래서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얘기를 하는 언론과는 다른, 도시 빈민 당사자의 시선과 입장으로 여러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기 위한 다양한 도시 빈민의 삶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다음 편: 노점상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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