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활극 ‘방탄철가방’을 보고

“요기 요게 나여, 나가 바로 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지라.”

무대 설치물에 비춰진 흐릿한 사진을 가리키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남자. 그 사진은 바로 80년 오월광주의 잿빛 사진이었다. 분수대 뒤편쯤에 있는, 객석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그 점을 굳이 자신이라 각인시키며 극은 시작된다.

▲사진제공 :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첫 장면으로 오월광주에 대한 경건함을 난 이미 가슴 위로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가진, 아니 어쩌면 80년대를 살았던 우리 세대가 가진 트라우마 같은 선입견이었다.

그는 자신을 배달의 신, 최배달이라고 했다. 성이 최씨 이름이 배달. 배달의 민족을 먼저 떠올리는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중국음식점 배달원의 배달을 떠올리는 세대차이가 목의 긴장을 풀게 만들었다.

판소리활극이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의 1인판소리극인 ‘방탄철가방’은 공연계에선 꽤 소문이 난 ‘재미진’ 판소리공연으로, 최용석의 1인 창작 판소리극이다. 2014년에 창작 초연된 뒤 제2회 창작국악극대상 남자 창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 사진제공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조부모와 전남의 한 시골마을에서 살던 주인공 최배달이 어릴 적 풋사랑인 애경과의 에피소드를 만담처럼 풀고 혼자가 된 뒤, 광주에 가서 중국집 배달원이 되는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전하는 걸로 전반부가 이어진다.

그가 일하는 평양반점과 금남로는 어쩌면 우리 현대사, 아니 오월광주에 대한 복선이 깔린 고유명사로 다가왔다. 다른 말없이 그 시대의 갈등과 사건이 응축돼 있는 듯했다.

그가 배달계 최고의 배달꾼이 되었을 때 광주는 오월의 꽃들처럼 군부의 발에 짓밟히고 있었다. 하지만 비극적인 현장을 마치 배달의 신기원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짜장면 배달로 금남로를 누비고 다녔다.

시민동참을 호소하는 거리방송을 듣고 무작정 도청으로 간 그에게 한 학생이 마지막으로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싶다는 청을 하자, 평양반점 사장이 만든 300그릇의 짜장면을 배달하는 최배달의 인정이 코 끝을 찡하게 했다.

▲ 사진제공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사용설명서 같이 틀에 박힌 감상일 수도 있겠지만, ‘방탄철가방’은 7~80년대를 지나는 농촌사람들의 소박한 정서와 인간미가 해학으로 묻어나고, 먹고 살기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나올 수밖에 없는 당시의 애잔한 삶이 바닥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도 오월광주라는 가슴시린 현대사의 상처 안에 최배달 같은 서민들의 애환이 곳곳에 서려있음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분명 군부에 의해 유린당하는 시민들의 처참한 오월광주의 현장에 최배달로 대변되는 무수한 보통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극을 보는 내내 등을 의자에 기대지 못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그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으나 시종일관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그의 말투와 쫀즉쪽득한 욕, 장면에 따라 우스광스럽게 변하는 그의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 극장문을 들어서면서 ‘판소리활극’이란 낯선 장르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극이 무르익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졌다. 무대 한 켠에 앉아 소리를 통해 극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베이스기타주자 양영호씨와 타악의 황근하씨는 활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의 판소리활극은 그냥 판소리가 아니라 마임과 연극과 영상이 결합된 새로운 장르로 독립할 수 있는 요소를 갖췄다. 예술이 각 장르의 경계를 넘어 콜라보네이션을 통한 융복합예술로 발전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의 판소리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뤄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방탄철가방’을 보고 나온 5월 충무로의 밤풍경엔 아직 서늘한 바람이 감돌았다. 그때 광주의 밤도 이랬을까?

▲ 사진제공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 판소리활극 ‘방탄철가방’ 은 지난 5월 11일부터 12일 양일간 남산국악당에서 공연됐습니다.

제작 :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 원작·극작·작창·배우 : 최용석 / 연출 : 손혜정 / 기획 : 김민정, 임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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