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정훈의 ‘여명의 눈동자’(22)

1. 역지사지, 보수의 대선전략

결국 대통령 박근혜는 탄핵되었다. ‘박근혜 퇴진’을 내걸었던 촛불항쟁의 첫 승리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평화적 시위를 통한 국민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분열된 진보정당들은 이렇다 할 큰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민주당, 국민의당 등 중도야당의 동요와 무능은 기회주의라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촛불항쟁 기간 열린 여소야대 국회에서조차 야당은 다수 국민이 찬성하는 공직자비리수사처법, 검찰개혁법, 언론개혁법, 세월호 특별법 등 무수한 적폐청산을 위한 법률안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했다. 이는 국민의 기대와는 다르게 19대 대선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어도 이후 국민과 함께하는 적폐청산과 촛불민주혁명 완성의 길이 험난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그런 한편에서 기득권 보수세력은 정략적 개헌과 보수대연합을 통한 ‘한판 뒤집기’를 계속 시도 중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실패한 ‘반(反)문 연대’와 개헌을 고리로 한 보수대연합을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를 중심으로 재추진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폐지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들이 추진하는 개헌의 본질은 ‘보수정권 재탈환’ 프로그램이자 촛불을 끄기 위한 ‘반혁명’이다.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수구보수세력의 대선 전후 전략을 추론하며 이후 정국을 포괄적으로 전망해보자.

2. 정권재탈환 기반구축 전략

19대 대선은 촛불항쟁의 여진 속에서 치러진다. 일반적 예상대로 중도개혁적 민주당 집권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새누리당의 지난해 4.13총선 패배 이후 본격화된 수구보수세력 내부의 분열과 촛불항쟁으로 친박세력뿐 아니라 보수 전체의 지지기반이 급속히 약화됐다. 대선 기간 예상할 수 있는 북풍공작과 어떤 정치적 변수에도, 촛불시민의 높아진 정치의식과 국민적인 정치변화 요구를 쉽게 꺾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촛불항쟁 이후 보수의 집권전략도 단순히 비박(非朴) 주도의 권력교체가 아니라 수구보수(자유한국당, 바른정당)와 중도보수(국민의당)가 손잡는 새로운 ‘보수연합 정치구조’로의 전환을 꾀하는 것 같다. 반세기 이상 유지해온 대통령제 중심의 한국정치 체계를 개헌으로 전면 개편하려한다. 즉, 권력구조 변경을 통해 ‘한판 뒤집기’를 시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수구보수세력이 거대 양당제에 기반을 둔 대통령제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며 장기적으로 승산이 낮다고 판단한 것은 최근이 아니다. 특히 대선 부정선거 시비 속에 출발한 박근혜 정부 이후 마땅한 차기 대선 주자가 없는 수구보수세력은 현 대통령제를 버리고 ‘분권형 권력체제’(이원집정부제 혹은 내각제)로 전환하려 오래전부터 궁리해왔다.

‘최순실 사태’로 다급해진 박 정권이 먼저 조기 개헌논의를 정략적으로 꺼내들었으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촛불항쟁으로 그들의 기획과 의도는 일단 무너졌다. 결국 수구보수세력은 그들이 원하지 않던 19대 조기 대선마당에 끌려 나오게 되었다. 첫 주자였던 반기문은 ‘빅텐트’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낙마했다.

수구보수의 대선전략은 당장의 대선 승리보다는 오히려 19대 대선에서 정권을 일시적으로 민주당에게 내주더러도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기에 탈환하는 것에 있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대선 과정에서는 수구보수에게 유리한 개헌 기반을 형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보수대연정 체계를 대선 과정부터 단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수구보수가 추진하는 ‘분권형’ 개헌의 본질

수구보수세력이 말하는 ‘개헌=이원집정부제(또는 내각제)=연정론=빅텐트론=다당제=합리적보수=정개개편’ 등 용어는 모두 하나의 전략에서 나온 다양한 표현들이다. 이미 지난 2014년 CBS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회의원 249명 중 92.8%가 이런 분권형 개헌에 찬성하고 있었다. 민주당 역시 분권형 권력구조 개편에 다수 의원이 찬성하고 있다. 또 민주당이 자체로 만든 개헌안은 아직 없지만 최근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 국민의당이 합의해 발의한 개헌안과 사실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개헌의 시기 문제와 대통령의 권한 정도일 것이다.

민주당이 이후에 국민기본권 강화를 개헌 조항에 추가할 수도 있겠으나, 권력구조 개편 중심의 개헌이란 본질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핵심은 실제 권력을 대통령으로부터 의회중심 내각의 총리에게로 옮긴다는 데 있다. 그리고 총리 선출이라는 배후 권력을 장악하게 될 의회를 새로운 보수대연합 체제로 정비하는 것이다. 즉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켜 실질적인 다수당에 의한 총리정치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정치관계법 개정은 개헌과 병행해 추진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핵심 방향은 다음과 같겠다.

1) 권력을 대통령제와 의원선출 내각제의 이중구조로 분산해 거대 정당이 재공유한다.

2) 대통령이 국방·외교를 담당하고, 의회 중심의 내각이 예산 편성과 내치 권한을 행사한다.

3) 개헌과 병행해 정치관계법을 개정해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한다.

4) 거대 양당 중심의 전통적인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보수대연정’ 구도로 전환한다.

이런 개헌안과 정치관계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전통적으로 야당 성향이 강한 호남과 수도권 지역에서도 중도개혁정당과 수구보수정당이 선거에서 동반 당선되어 공동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수구보수세력은 앞으로 대선을 걱정할 필요 없이 원내 1, 2당을 오가며 내각을 통해 정권의 주도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게 된다.

4. 촛불, 개혁대연정 vs 기득권, 보수대연정

‘연정(聯政)’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연정은 원래 ‘연합정치’, ‘연립정부’ 등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연정인가이다. 전통적으로 민주진보세력이 주장한 연정론은 ‘반새누리당 민주주의 대연정’이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득권세력(미·일 외세, 재벌, 언론, 관료 등과 결탁한 수구보수정당)을 반대하는 피해자, 약자들의 대연합정치가 연정이었다. 따라서 민주당이 지금 연정론을 제기하려면 촛불국민과 함께하는 적폐청산을 위한 ‘촛불대연정’을 말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민주당의 대선주자인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바른정당은 물론, 경우에 따라 자유한국당과도 연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노무현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득권 대변세력과 싸우지 않고 개혁과 적폐청산의 대상과 연정이 가능하다는 말인데, 이는 역사와 현실을 무시한 궤변이다. 이런 연정론으로 민주당 내부는 대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연정세력’과 ‘비연정세력’으로 양분되는 양상이다. 수구보수언론이 민주당 경선에서 안희정을 띄우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분권형 권력구조와 (보수)연정론은 원래 동전의 양면처럼 구성된다. 쉽게 말해 이는 ‘권력 나눠먹기’이다. 민주당이 분권형 권력구조 개편에 동의하면 다음 수순은 ‘보수연정론’에 합의하는 것이다. 만약 대선 이후 촛불이 시들해지고, 민주당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국민주도 개헌’ 의지가 없다면 보수대연정은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종인 전 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의 초청으로 지난 11월 극비리에 미국을 방문해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 또 지난달 15일 ‘안보의 다보스포럼’이라 불리는 뮌헨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미국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 틸러슨 국무장관, 매티스 국방장관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가 최근 민주당을 탈당한 뒤 안희정, 안철수, 박지원, 손학규, 유승민 등이 동조하는 개헌과 연정론을 주도하고 있다. 실패한 반기문의 뒤를 이어 민주당이나 문재인을 제외한 모든 세력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연합하는 제3지대 빅텐트론을 다시 추스르고 있다.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야당(자유한국당·바른정당·국민의당)이 연합하여 이들 세력(165석 규모) 주도로 차기 정권의 임기를 3년으로 줄이고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를 개편한다는 구상이다.

5. 민주당 정권, 출발부터 레임덕(권력누수) 가능성

국민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촉발된 촛불항쟁을 경험하며, 한국정치의 부패한 실상을 민낯 그대로 보았다. 국민대중이 한국정치의 현주소와 기득권정치의 속임수를 간파하였다. 이 과정은 특히 계급, 계층과 세대를 초월하여 광범위한 대중의 정치의식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촛불항쟁의 새로운 정치와 민주공화국에 대한 요구는 대선 이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렇게 높아진 국민들의 적폐청산 요구와 ‘새로운 공화국 만들기’를 민주당이 과연 추진할 수 있는가이다.

국민들은 민주당 정권을 이미 두 번 경험했다. 기대를 않고 출발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데 실패했다. 지금 민주당의 상태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기보다 결코 유능하거나 원칙이 견결하지 않다. 이는 이미 촛불항쟁 과정에서 보인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동요에서 거듭 확인되었다. 탄핵 이후 대선 정국이 열리자 민주당 내부에서는 적폐청산과 민주주의 완성이 아니라 (보수)연정이 주장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본격 싸움을 시작도 하기 전에 적폐청산의 대상과 공생, 공존을 논하는 꼴이다. 차기 민주당 정권이 노무현 정부보다 나을 것이라는 보장은 현재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대선 이후에는 김대중 집권 초기 IMF사태 못지않은 산적한 경제위기가 기다리고 있다. 북미관계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도 여전히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할 실마리를 못 잡고 당분간 더욱 격화되는 양상을 보일 것 같다. 민주당이 대선에서 이길 경우 국민들의 적폐청산 요구와 정략적 개헌논의가 충돌하며 본격화될 것이다. 민주당을 제외한 다수 원내 정당들은 보수대연정으로 민주당을 포위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민주당 상태를 보면 임기 초부터 노무현 정권 후반기처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양면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노동기본권과 자주외교 문제는 물론 남북문제조차 제대로 풀어나갈지 미지수이다. 돌이켜보면 노무현·김대중 정권 모두 근로대중의 노동기본권을 지키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6. 예상되는 민주당 시대, 진보세력의 선택

대선을 포함해 향후 혁명과 반혁명의 분기점에서 누구보다도 단결하고 누구보다도 정치적이어야 할 진보는 여전히 사분오열 중이다. 박 정권의 진보당 강제해산 이후 진보분열 상태를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대선 시기 주요 관심사였을 ‘야권연대’나 ‘후보단일화’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없다. 야권연대는 고사하고 진보진영 단일후보 논의조차 진행되지 않고 각개약진하고 있다.

진보의 가장 큰 과제는 진보정당들의 사업관점과 방식을 과감히 개조하는 ‘주체혁신’ 문제로 보인다. 진보는 새로운 정치환경에서 단결의 현실적 방도를 찾아 분열상을 서둘러 끝내고, 진보의 기반을 양질적으로 획기적으로 강화할 출로를 찾아야 한다. 진보의 주요 기반인 노동조합(조직률 10%), 농민회 등의 합법적 기반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법·제도적 대안을 차기 정부 내에 찾아 관철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정치관계법 개정 과정에서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전면 확대(독일식 비례대표제)를 관철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국내 자본주의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20년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노동문제는 더 이상 노동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당은 기본적으로 근로대중정당이며 노동당이다. 노동당에 연합전선(통일전선)을 더하면 그것이 한국형 진보정당이다. 노동자와 근로대중이 국민의 대다수인 한국에서 근로대중의 노동문제가 인권이고 경제회복이며, 국민복지 문제로 전환된 지 이미 오래이다. 따라서 노사문제 차원이 아니라 국민기본권 실현의 주요 과제로 헌법과 노동법 전면 개정을 더불어 제기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입체적이고 정치적인 노동운동의 길을 새롭게 개척해야한다.

중도개혁성향 정부에 대한 진보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중도정권이 국민복지, 자주외교와 남북화해, 노동대중의 권리를 확장하는 길로 나아가면 협조하고, 반대로 역행한다면 대립할 수밖에 없다. 만약 민주당이 집권 후 촛불혁명 완수의 길로 나간다면 협력해야하고, 기득권세력과 보수대연정으로 간다면 처음부터 대립할 수밖에 없다.

적폐청산, 사드배치 문제, 남북 화해협력(전민족대회), 노동법 개정, 정략개헌 문제 등을 민주당이 올 하반기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잣대가 될 것이다. 진보와 예견되는 민주당 정권의 관계설정의 첫 시험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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