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연재] 이희종의 '진보정치 그 다음'

▲ 2월25일 민중총궐기

늘 느끼지만, 민중총궐기나 민주노총의 투쟁은 백화점 진열장 같다. 대중조직별 요구사항을 모아서 나열하는 식이다. 안타까우나 애써 준비하는 이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대중조직 준비 정도와 내부 상황의 표현이다.

탄핵정국에서 대선을 앞둔 마지막 국회가 될 2월 임시국회에서는 몇몇 개혁 법안들에 힘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때 민주노총의 2월 임시국회 요구사항은 지도부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퇴진행동에서 제안하는 6대 적폐청산 입법과제로는 노동현장과 산별 조직을 움직이는데 부족하다. 노동이슈를 주도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최저임금, 위험의 외주화 금지법을 중심으로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의 핵심 주장인 노조를 설립할 권리 공론화, 가맹조직마다 개혁입법 요구사항을 모아서 총연맹 집중투쟁과제를 정리했다.

‘왜 우리 것은 주요 투쟁과제에 포함하지 않느냐?’는 단위의 요구, ‘현장을 움직이려면 이런 요구를 포함해야 한다’는 요구, 이런저런 요구에 민주노총의 핵심요구는 하나둘 늘어간다. 결국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힘없는 요구사항이 된다.

지난달 25일 민중총궐기 집회, 그날 무대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수많은 발언자가 자기조직의 요구를 가지고 무대에 올라왔다. 집회를 준비한 민중총궐기운동본부의 고민도 이해가 간다. 산별은 산별대로, 투쟁사업장은 투쟁사업장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워 광장에 모였으니 그들을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야 한다. ‘집회가 재미없다’거나 ‘시민들의 참여 장을 열지 못했다’는 지적은 다른 결이다. 그들이 무대에 설 자격은 충분하다.

그렇게 우리의 구호는 박근혜 퇴진에서 임금인상 요구까지, 10대 과제에서 20대 과제로 늘어난다. 핵심 요구는 일반적 요구가 되고 총궐기는 조직별 궐기가 된다. 요즘은 그래도 다행이다. 박근혜 퇴진으로 굵직하니 정리가 된다. 대중조직은 구성원들의 이해와 요구에 기초한다. 정치의식, 연대연합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투쟁에 기층을 움직이기는 쉽지 않다. 대중조직의 정치적 요구와 연대연합의 이해가 높아질수록 요구도 단순해지고 집회의 발언들도 집중될 것이다.

하지만 대중조직과 진보정당은 달라야 한다. 진보정당은 지지자와 국민을 바라보고 정치해야 한다. 진보정치가 백화점 같은 주의주장을 쏟아낸다면 정국을 주도할 수도, 국민과 소통할 수도 없다. 그 시기 대중들에게 전달할 메시지도 명확해야하고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도 정확해야 한다. 진보정당은 노동자 농민 등 진보적 대중들의 이해를 모아 정치 쟁점화해야 한다.

▲ 2월25일 민중총궐기

2.25 민중총궐기 집회를 마치고 행진을 할 때였다. 광화문광장에서 헌재로 가는 차량에서는 이석기 석방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목청껏 구호를 따라 외치던 몇몇 사람들이 주춤했다. 사실 나도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통합진보당 사건은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무너진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이석기 의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다. 그런데 왜 그때 나에게 불편한 감정이 일었을까? 광화문광장에 수많은 단체에서 수많은 구호를 가지고 나오는데 왜 이 구호에만 불편한 감정이 일었을까? 혹시나 민주주의자라고 하는 나에게 뭔가 선입견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석기 석방구호가 맞느냐 아니냐를 다시 논쟁하자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국민적 요구 앞에 진보정치가 어떤 구호를 들고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진보정치가 다시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특검 연장과 황교안 권한대행의 퇴진, 헌재의 조속한 탄핵을 요구해야 하는 그날, 진보정치가 어떤 구호를 들어야 했는가의 문제였다.

방법도 문제다. 마이크 권력으로, 무대 위 권력으로 구호를 외친다고 이 구호가 전면화 되진 않는다. 작은 불신만 하나 더 쌓을 뿐이다.

왜 이런 문제들이 당사자들에겐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진보정치를 하면서 늘 1인칭 관점으로 세상을 보려고 했다. 아니 그렇게 훈련돼 왔다. 난관에 봉착하면 늘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먼저 고민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때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문제를 대하는 사람은 답답했다. 조언하고 비평은 하지만 실천도 대안도 없는 사람들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문제를 대하는 사람들은 무섭기까지 하다. 상대방의 주의 주장의 속내까지 다 아는 듯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들도 많다.

요즘 진보정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 필요한 것 같다. 1인칭 시점으로만 보면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 서면 토론과 설득이 힘들다. 연대와 통합은 상대방이 있는 일이다. 상대방도 나와 같이 1인칭 시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자신을 객관화하며 전체를 봐야 한다. 그것이 싫다면 스스로 당이요, 스스로가 전선이다. 연대와 통합의 주장은 명분 쌓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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