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연재] 이희종의 '진보정치 그 다음'

▲ 란츠게마인데(Landsgemeinde)는 스위스 직접 민주주의에서 유래된 행사다.

얼마 전 스위스의 국민투표가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기본소득 권리를 헌법에 명시할 것을 묻는 국민투표로 사회, 경제적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 월 300만 원을 법으로 보장하자는 헌법 개정안이었다. 애초에 스위스 정부는 기본소득제 도입에 반대했다. 그런데도 유권자 10만 명의 발의로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이 헌법 개정안은 스위스 국민의 77%가 반대함으로써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의(아니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스위스에서는 1년에 4차례 정도의 국민투표가 진행된다. 법률안의 경우는 국민의 1.1%에 해당하는 5만 명, 헌법 개정안은 10만 명이 발의하면 국민투표의 안건이 된다. 2013년에는 기업 경영진의 보수를 회사가 아니라 주주가 결정하는 법안이 국민투표로 통과되었고, 작년에는 2029년까지 핵발전소를 조기 폐쇄하자는 법안이 상정되어 45.8%로 아슬아슬하게 부결되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정부가 제출한 법인세 인하를 뼈대로 한 세제 개혁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는데 부결되었다.

촛불광장에서 헌재의 재판 결과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로선 스위스의 직접정치가 부럽기만 하다. 우리 국회를 보자. 2월 임시국회도 며칠 남지 않았다. 촛불광장에선 각종 개혁 법안들이 쏟아지는데 국회는 박근혜 탄핵 가결 이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뭔가 큰 계기가 없는 한 개혁법안 2월 국회통과는 어려울 듯하다. 2월18일 광화문광장에서는 야당을 규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를 정치인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있겠는가? 현실 정치에 대한 실망, 대의제의 불완전함, 정치참여의 의지가 맞물려 국민발의 국민투표 등 직접정치의 제도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선거권을 18세로 인하하자’, ‘대통령과 국회의원까지 국민소환 제도를 확대하자’는 등의 정치 참여적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

노동자 농민, 청년이 스스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자는 것이 진보정치의 슬로건이었다. 광장의 직접정치 요구, 정치 참여는 진보정치에 새로운 기회로 주목받는다. 최근 회의나 토론을 하다 보면 직접정치를 화두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제안된 원탁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소집한 진보대통합 원탁회의에 참가했다. 많은 분이 오셨다. 그 자리에서도 발언자의 대부분이 촛불 항쟁, 시민들의 정치참여, 직접정치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지는 못한 것 같다. 익숙한 사람들의 익숙한 주장 사이에서 직접정치 시대에 걸맞은 진보정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다시 고민했다

광장에서 쏟아지는 요구를 기치로 드는 것만으로 진보정치가 완성되진 않는다. 이별을 경험하면 사랑도 다시 시작하기 어려운 법. 진보정치는 대중의 신뢰를 잃었다. 돌아보면 우리의 실력은 한참 부족했다. 의견그룹 간의 갈등은 대중조직과 진보정치의 역동성을 갉아먹었고, 리더십의 부족으로 진보정치는 분열했다. 진보정치는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직접정치의 시대 진보정치는 촛불광장 시민들을 담을 그릇, 청년들의 정치놀이터가 되어야 한다. 조직은 주도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투영되기 마련이다. 직접정치는 기술의 발달로 인한 정보의 평등함, 대중들의 정치의식의 고른 발전, 자유로운 정치활동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86세대도 우리 세대도 청년 시절 경험하지 못한 문화다. 진보정치의 조직문화도 새로워져야 한다.

직접정치 시대의 진보정당은 간부와 의견그룹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청년이 당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스위스의 직접정치를 진보정당에 대입해 본다. 노동현장과 지역에서 게마인데(주민자치단위)와 같이 상시적 정치토론이 진행되는 살아있는 분회모임, 수준 높은 당원교육, 중요한 사안마다 진행되는 당원들의 모바일 총투표, 누구나 당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대의원 추첨제, 세대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공존하는 지도부. 당원들을 주인으로 세우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최근 진보정당의 조직형태로 연합정당이 제안되고 있다. 진보정당, 의견그룹, 세대 간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정치투쟁과 선거를 함께 하자는 것이다. 현장분회를 조직하고, 분회모임을 중심으로 기층 정치모임을 꾸리는 등 당원들을 주인으로 세우기 위해 진보정치 세력마다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대통합도 연합정당도 새로운 제도도 결국엔 사람이 하는 법. 제도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이게 마련이다.

직접정치가 곧 진보정치는 아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국민투표 등 직접정치의 방법을 악용했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직접정치의 기초인 자치단체의 주민투표제가 방사능 폐기장 부지 결정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좌파대통령 차베스가 만든 대통령 소환 제도를 우파들도 똑같이 사용한다. 과거 진보정당 안에서도 다수파의 힘은 당원들의 투표였다.

다시 스위스의 직접정치를 생각해 본다. 핵발전소 조기폐쇄, 기본소득과 같은 진보적 의제들이 다루어지는 스위스 직접정치의 배경에는 조직률 35%의 노동조합과 진보적 시민사회가 있다. 게마인데에서부터 지역의 현안을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는 숙련된 민주주의자들이 있었다.

직접정치 시대를 이야기하는 진보정치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힘들게 모인 원탁회의 자리,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성찰의 리더십이 아쉬웠다. 노동 현장과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수많은 동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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