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17)

〈별이 빛나는 깃발>은 미국 국가(國歌)다. 1812년에 벌어진 미-영 전쟁 기간에 볼티모어로 진격 중인 영국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수비대는 체서피크(Chesapeake) 만에 집결했다. 1814년 9월 13일 미국 포로의 석방 교섭을 위해 영국 함선에 승선 중이었던 법률가이자 시인인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는 포격 다음 날의 새벽 여명에 여전히 휘날리는 성조기를 보고 느낀 감동을 시로 적었는데, 이것이 바로  <The Star-Spangled Banner>였다. 9월 20일자 볼티모어 신문에 발표가 된 이 시는 영국에서 술 마실 때 부르는 <천국의 아나크레온에게, To Anacreon in Heaven>라는 선율과 만나, 미국인 사이에서 널리 노래로 불려 졌고, 1931년 3월 후버 대통령에 의해 미국의 국가로 채택이 되었다. 

'포화의 붉은 섬광' 이라거나 '창공에 작열하는 폭탄' 등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호전적인 노랫말의 미국 국가가 역사적으로 새롭게 인식된 것은 1969년 8월에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1969)에서였다.  

18일 월요일은 뉴욕 주 우드스톡 인근의 베델 평원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이 모여 평화와 사랑을 노래하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마지막 무대에 오른 지미 핸드릭스는 그의 대표작인 <Purple Haze>를 부르기에 앞서 익숙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로 <The Star-Spangled Banner>이었다. 독립을 위해 “포화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 작렬하는 폭탄”이 아니라, 베트남전에서 죽어간 이들의 절규와 미국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짓는 분노의 함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흐른 2016년, 대한민국 광화문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11월19일 저녁,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에 모인 촛불 인파 앞에서 거친 목소리로 읊조리듯 절규하는 전인권의 애국가는 의례성을 넘어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의 절절한 함성이 되어, 한주먹거리도 아닌 부정한 정권이 망친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 ‘길이 보전’할 나라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라는 노랫말의 북측의 애국가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1947년 6월에 월북시인인 박세영과 광산 노동자 출신의 김원균 작곡으로 만들어졌다. 북한 헌법 165조에서는 이 노래를 <애국가>라고 적시하고 있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끝나는 남측의 애국가는 성문법으로 규정을 하고는 있지 않지만, 역시 <애국가(愛國歌)>로 호칭하고 있다. 같지만 다른 국가(國歌)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담은 남과 북이 함께 부를 우리의 노래를 없을까? 성문법으로 혹은 역사적 사회적 통념상 관습법으로 불려온 남과 북의 애국가를 통합하거나 새롭게 만들기는 요원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통일조국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가 부를 북측의 노래를 고른다면 <우리는 하나>가 아닐까 싶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창작한 노래 <우리는 하나>는 남측에서도 널리 알려진 통일의 행진곡이다. <다시 만납시다>와 <백두와 한라는 나의 조국>을 작곡한 모란봉악단 부단장인 인민예술가 황진영이 작곡과 작사를 했다. 1절과 2절에서는 반만년 역사와 혈연 공동체인 우리 민족이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3절에서는 우리가 통일로 뭉치면 더 큰 하나가 될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7음계를 바탕으로 5음계와 민족장단을 반영해 민족적 정서도 잘 살리고 있어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가사도 좋고, 선율도 훌륭하고, 리듬 또한 희망차 <우리는 하나>를 ‘통일애국가’로 떠올려 본 것이다. 

이 노래를 무용음악으로 사용한 무용작품 <하나>도 있다. 필자가 2007년 겨울에 제작한 금강산가극단 초청공연 “조선무용50년-북녘의 명무”에서 선보인 3인무 <하나>가 그것이다. 공훈배우 송영숙과 장려화, 김수미가 출연을 했고, 피바다가극단의 연주(MR) 음악이 실연되었다. 

무용으로 형상된 <하나>는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의 간절한 소망인 통일을,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우리민족이 함께 앞당기며, 행복하게 살자는 희망을 담고 있다. 무용수 3명은 남북과 해외를 상징하고 있다. 땅도 하나 핏줄도 하나인 우리나라가 반세기가 넘도록 갈라져 있는 슬픔을 절절하게 호소하면서도, 우리 민족끼리 굳게 힘을 모아 기어이 통일 조국을 이룩하자는 열망과 결기를 담고 있다. 힘차게 휘날리는 민족 통일기(한반도기)로 모이는 역사적 과정이 역동적인 무용수의 몸짓과 강렬한 피아노 선율에 힘입어 큰 감동을 선사했다.

사실 이 초청 공연에는 현재의 분단 상황을 보여주는 뒷이야기가 있다. 원래는 2007년 10월23일과 24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무산이 되었다. 외교통상부가 금강산가극단 무용단원들의 고향방문단용 여행증명서 발급을 거부한 것이다. 2000년 남북장관회의에서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총련계 동포의 방한을 보장한 것과는 달리 외통부 내규를 근거로 교류를 막은 것이다. 북한 유일의 국립해외예술단인 금강산가극단 단원들이 고향방문단용 여행증명서 발급신청서를 제출한 것을 도쿄주재 한국대사관 쪽이 고향방문단 사업이 아니라며 통상절차에 따른 여권발급신청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고, 가극단이 이를 거부하면서 공연이 무산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청와대와 인권위 등 관계기관에 민원을 제기하고, 여론이 움직이고 후원기관인 통일부의 노력에 힘입어 순연을 결정했다.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과 홍익표 국회의원의 각별한 관심과 협력에 의해서 공연 전날 간신히 서울로 입국해 12월22일과 23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공연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하나> 무용에 사용한 노래인 <우리는 하나>의 가사 중 후렴구의 “태양 조선”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첫 날 공연을 관람한 관계기관 관계자로부터 공연 금지를 통보받았고, 결국 다음 날 공연에서는 “태양 조선” 부분에서 장내 오디오를 죽이는 편법으로 공연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남측 행사에서는 “태양 조선” 부분을 “단군 조선”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으며, 3절은 부르지 않고 있다.

이 무용의 안무가는 북측이 민족무용의 최고봉이라고 밝힌 바 있는 백환영이다. 백환영은 1935년 12월29일 개성시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 건축설계 양성소를 졸업하고 1950년부터 황해제철소 건축설계부에 근무했다. 여기서 예술소조 활동을 하며 무용을 익히고 작품에 출연하면서 무용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전국 노동자예술축전에 참가해 두각을 나타냈고, 이것을 계기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진학해 체계적인 무용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54년 국립고전예술극장 무용배우를 시작해 국립민족예술극장 무용배우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그는 ‘춘향전’, ‘심청전’을 비롯한 창극들에 무용배우로 출연하였으며 ‘농악무’, ‘탈춤’, ‘수박춤’ 등 소품들에도 참여하였다. 여러 차례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출전하여 입선도 하였다. 1966년 국립가무단의 안무가를 거쳐 모란봉예술단의 안무가, 이후 음악무용대학 안무 강좌장을 거쳐 피바다가극단 안무가, 국립민족예술단 안무실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작품은 1972년에 평양예술단이 공연한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이다. 서장, 전5장, 종장으로 구성된 항일혁명을 다룬 작품인데, 여기서 제2장 “혁명군 동무들에게 어서 보내세”를 창작해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완전무결한 작품이란 극찬을 받았다. ‘내 사랑하는 꽃’,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 ‘나의 어머니’ 등 송가 형식의 무용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이 세 무용의 창작으로, 위인송가 무용창작의 1인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또한 흥겨운 민족의 율동에 기초한 무용창작에도 뛰어나 ‘강냉이 농사 대풍 들었다’, ‘부채춤’(원작 최승희), ‘직동령의 여인들’, ‘직포공의 마음’, ‘칼춤’, ‘흥겨운 새납소리’ 등을 창작했고, 특히 ‘칼춤’, ‘직포공의 마음’, ‘흥겨운 새납소리’ 등은 북측에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가극과 무용조곡 창작에도 걸출한 기량을 선보이며, ‘금강산의 노래’의 주 안무가로 활동하였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민족무용조곡 <평양성사람들>의 연출과 안무를 맡기도 했으며, 금강산가극단에게 <금강산의 노래>를 전습한 인연으로 오랜 기간 재일조선무용계에 많은 작품을 전하기도 하였다. 1975년 5월 공훈예술가 칭호를, 1982년 4월 인민예술가 칭호를 수여 받았다. 현재 국립평양민족예술단(구 평양모란봉예술단, 평양예술단)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북측의 5대 혁명가극 창착에 참가한 안무가의 한 사람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비록 공식적으로 북측 관계자를 만난 것이 10년의 세월이 되었지만, 평양에서 개성에서 묘향산에서 금강산에서 <우리는 하나>를 목 놓아 부르던 때가 어제 같은 것은 비록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하나>, 조청미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hFWQ3IZMxQY

<다시 만납시다>, 백정숙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RgWZai9yg-s

<백두와 한라는 나의 조국>, 모란봉악단 중창
https://www.youtube.com/watch?v=6vEC6JM14Kc

▲ 인무 <하나> (2006년 금강산가극단 특별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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