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시스템이다 (⑭마지막회) 광장이 개혁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개혁은 어려워도 지우기는 쉽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했다. 오바마 케어가 지워진다. 완전하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진전이 물거품으로 변해 간다. 개혁은 어려워도 지우기는 쉽다. 광장은 13번째 촛불을 밝히고 설날의 휴면으로 접어들었다. 삼성의 이재용은 부당하게 구속을 면하고, 그 자리를 대신해 블랙리스트 운용을 혐의로 김기춘과 조윤선이 구속됐다. 결국 뇌물죄는 차츰 성립 가능성이 멀어지고 있다. 황교안의 대통령 놀이는 도를 넘고 있다. 거대한 음모의 냄새를 맡는다. 그렇게 광장이 요구한 개혁은 차츰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노무현 정부의 처음과 마지막을 떠올린다. 개혁은 참으로 어려웠지만 쉽게 지워졌다. 백년정당의 꿈을 가졌던, 직접 민주제 정당의 꿈을 꾸었던 개혁당은 그렇게 쉽게 사라졌다. 이명박은 박근혜 게이트를 계기로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에 협력했던 자들이 ‘자신들은 바르다’며 포장을 하고 다시 국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한국 정치 시스템은 소수 직업 정치인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국민이 배제된 정치 시스템은 거대한 사기다. 과연 광장은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시민이 참여하는 정치 시스템
길게 바라보며, 숨 고를 필요가 있다. 탄핵이 기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인내는 끝에 다다를 것이고, 분열 책동은 더욱 왕성해질 것이다. 결국 장거리 투쟁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개혁의 길은 역시 험하고 어렵다. 시민이 중심이 되는 정치시스템은 시민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정치는 시민 모두의 것이다. 일부 직업 정치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부는 관료의 것도 대통령의 것도 아니다. 국회는 국회의원만의 세상이 아니다. 시민은 단지 선거만으로 의견을 표하는 시대를 넘어서야 한다.
가까워진 대통령선거는 대선 주자들의 조급함으로 원칙 없이 흔들리고 있다. 근원적인 처방을 요구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구시대의 낡은 체계를 인물 하나 바꾼다고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광장의 촛불은 언제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아마 대부분이 그냥 바라볼 뿐이고 이용할 뿐이다. 광장 시민들의 요구 역시 추상적인 구호다. 시민의회는 무엇이고 시민정부는 무엇인가.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동조하는 글들을 게시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대안을 말하고 있지 않다. 시민 배심원단을 모으듯 ‘시민의회’를 조직하자는 주장은 또 하나의 소수 정치인을 양성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국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의회가 있고 이를 구조적으로 개혁할 방안도 있는데 외면하고 있다. 그들도 지금 체계의 수혜자이자, 참여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시민이 참여하는 정당 운동에 나서야 한다.
정치는 시스템이다 연재를 마치며
‘정치는 시스템이다’는 80년대 중반의 학번으로 학생운동과 이어진 정치권 생활, 특히 1996년 이후 국회에서 직접 입법 과정에 참여하며, 2003년 정부에서 정책 일을 하며 겪은 경험과 이후 계속된 정치 활동을 통해 얻어진 정치 구조에 대한 의견을 기고한 글이다. 1997년 김대중 정부의 대선 공약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문화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현장 예술인, 창작자들과 정책이 어떻게 준비되고 이것이 정치에 어떻게 작용하고 반응하는지를 배웠다.
당시 영화정책은 영화인들과 함께 만들었고, 이는 정책을 통한 최초의 지지 연대로 이어져, 김대중 후보 당선에 큰 힘을 보탰다. 1998년 영화 등 문화산업 관련 법률을 정비하면서 광범위한 현장 의견을 반영했고 정부가 부담스러워 회피하는 법률을 당시 연합정권이던 자민련의 지원을 받아 의원입법으로 통과시켰다. 이 법들이 영화검열의 폐지, 영화진흥위원회라는 유일의 민간행정위원회 설치, 영화 스크린쿼터의 준수, 문화산업을 벤처업종으로 인정해서 민간 투자를 유치한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의 제정, 최초의 게임 입법으로 온라인 게임 강국의 틀을 놓은 것, 문화산업진흥기금의 설치 등을 담고 있었다. 의원입법으로 만들어진 초유의 개혁입법이었다.
2002년 개혁국민정당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며, 직접민주제정당의 꿈을 꾸었다가 기득권에 무참히 깨지고, 인수위원회를 거쳐 문화관광부에서 장관정책보좌관의 역할을 하면서 개혁이 용두사미로 바꿔는 과정을 보았다. 노무현 정부로부터 시작된 긴 야인생활 동안 공부를 위한 모임을 조직하고, 새로운 정당을 꿈꾸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에 관여해왔다. 문득 지나와 보니 사실은 모든 지나간 것들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 개혁이었다.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고, 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정치를 꿈꾸고 있었다. 처음엔 기대하지 않았던 광장의 촛불은 더욱 그러한 믿음을 높였다. 그럴수록 기성의 기득권 정치는 개혁의 대상이 됐다. 이른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면서 다시 좌절을 느낀다. 문고리 권력의 국정 농단이 단지 청와대의 일만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는 야당도, 진보정치라고 하는 집단도 차이가 있을망정 마찬가지였다. 기득권은 어디에서든 강고하다. 그 어느 곳에도 시민의 존재는 찾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국민은 무엇이든 명분이 있어야 함께 하는데, 사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광장 시민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의 정치’
다시 정치의 계절은 짙어지고 있고 이 계절을 나름대로 원칙을 가지고 값지게 지나가려 한다. 긴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새로운 정치는 시민들과 조금씩 힘을 키워갈 것이다. 광장의 촛불이 가고자 하는 길을, 광장에 나오지 못한 민중과 같이 갈 수 있는 정치구조를 만들어 함께 가는 꿈을 꾼다. 정치는 시스템이고 이 시스템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움직이며, 깨어있지 않지만 평범하고 흔한 모든 민중과 함께 한다. 민주주의는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며, 지식인의 전유물도 아니다. 똑같은 한 표로 움직이는 모든 민중의 것이다. 집단지성의 옳음을 믿고 모임의 장을 만들고 성숙된 결론으로 세상을 움직여가는 정치 시스템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2017년 대통령선거는 시스템의 정치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광장으로 인해 주어진 기회는 기득권의 벽에서 멈출 것이다. 결국 변화는 작은 바람에 그칠 것이고 한국은 좀 더 긴 호흡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바닥까지 이르러 더 추락할 곳이 없을 때 한국은 튕겨져 올라올 것이다. 암울한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광장은 믿음을 주었고, 이제는 소극적인 광장의 참여에서 적극적인 정치의 참여가 일어날 것을 믿는다. 시스템의 동력이 되는 깨어있는 시민이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가 나타날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움직이는 정치시스템을 준비하는 긴 여정에 오른다. 2017년 초입에, 설날을 앞두고 절망 섞인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희망의 봄을 기다리는 기약을 한다. 희망은 시민에게 있다. 작금의 절망적인 시스템 부제 속에서도 낡은 정치를 깨고 ‘광장 시민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의 정치’는 새 봄을 열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시민들에게서 볼 것이다.
김종선 국회문화관광위원회 위원 보좌관(1996~2004)/ 15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문화정책담당 행정관(2003) / 문화관광부 문화행정 혁신위원회 간사(이창동장관 정책보좌역) / 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