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민주주의 시리즈 연재①: “아래로부터 결정사항을 의무적으로 정책에 반영”
직접민주주의는 국가 단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치정당은 물론 노동조합이나 비영기구 같은 시민사회단체도 내부에서 직접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선관위에 등록된 공식 정당들은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의 숫자가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달한다. 노동조합연맹을 살펴봐도 수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는 산별연맹들이 있다.
“당원이 주인이라면서 정작 내 의견은 안 물어봐요”
진보적 성향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연맹이라면 내부에서 활발한 토론과 참여가 있을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주로 조직의 ‘상층부’라고 표현되는 몇몇 인사들이 주요 사안을 협의한 뒤 결정사항을 내려 보내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디서는 이런 말도 나온다더라” 식으로 기층의 의사가 일부 전달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당연하다는 듯이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 ‘조합원들에게 귀 기울이는 연맹’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기층 구성원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끌어올려 정책결정에까지 의무적으로 반영하는 상향식 민주주의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적지 않은 구성원들의 의사를 어떻게 빠른 시간 안에 취합하고 정리할 수 있느냐는 기술적인 고민도 존재했다.
2017년 정초 의미 있는 직접민주주의 실험이 시작됐다. 진보대통합을 위한 정치단체 ‘서울 민중의꿈’에서 개최한 제1회 서울노동자시민평의회가 그 실험이다. 22일 오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리셉션홀에서 열린 평의회는 서울지역 민중의꿈 회원을 중심으로 230여 명의 참가자들이 모여 상향식 직접민주주의 체험을 했다.
행사장에는 수십 개의 원탁이 배치돼 소속 직능단위나 지역단위로 모여 조별토론이 가능하게 했다. 이날 토론주제는 ‘나의 정치참여를 가로막는 장벽은’ ‘노동자 시민의 직접정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까’ ‘서울 민중의꿈에 제안하는 사업은’ 세 가지였다. 각 조에서는 토론주제에 대해 개인의 의견을 종이에 적어 제출한 뒤 조원들끼리 그것을 돌려보며 마음에 드는 의견에 스티커를 붙인다. 그러면 가장 많은 스티커를 얻은 의견 몇 가지를 운영진에게 보낸다.
평의회 운영진은 각 조에서 올라온 의견들 중 비슷한 의견을 모아 다시 몇 개의 카테고리로 정리한 뒤 전체 참가자가 볼 수 있게 화면에 띄운다. 그러면 전자투표로 개개인이 마음에 드는 의견에 다시 투표한다. 이런 방식으로 정해진 시간 내에 참가자 개개인의 의사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의견을 선정하는 방식이다. 원탁 곳곳에는 도우미들이 배치돼 참가자들이 세부규칙을 이해 못하면 도움을 주고 취합된 의견들을 모아 운영진에 전달한다.
“의결사항은 반드시 사업계획에 포함”
민중의꿈은 이날 최종적으로 확정된 의견들에 대해서는 “2017년 사업계획에 반드시 반영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최종투표로 결정된 ‘2017년 서울 민중의꿈 주요투쟁과제’는 △부정부패세력 정치 재진입 불가 입법 운동 △최저임금 인상 △사드배치 반대와 평화통일 △비정규직 철폐 연대 △재벌개혁 5가지였다.
‘서울 민중의꿈 조직강화와 혁신’을 위한 결정사항은 △노농빈 주도 진보대통합당 건설 △진보정치, 직접정치에 대한 교육 생산 △(주요의제에 대한) 회원 참여로 결정 - 회원 정치참여 어플 구축과 주요 결정사항에 대한 회원투표 △진보정치에 대한 새로운 상과 중장기적 안목 계획 준비 △(조직 차원의) 육아대책 세우기 5가지였다.
이런 방식이라면 수천만 명이 토론해야 할 국가단위는 아니라도 수만 명 정도의 조직이라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기층의 의사를 최상층 운영단위까지 올려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진보단체들이 그토록 고민했던 상향식 민주주의를 실현할 힌트가 주어진 셈이다.
물론 직접민주주의와 상향식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는 서울 민중의꿈이 이번 평의회에서 시도한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방식이라도 한 장소에 모여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 전국적으로 수많은 참가자들이 함께 진행할 수도 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많은 정당과 단체들이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이런 상향식민주주의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이날 평의회에 종로구에서 참가한 김모씨는 “평소 막연한 내 생각을 어설픈 표현으로 적어서 올려 보냈는데 운영진이 나와 비슷한 다른 의견과 모아 명료한 문구로 다시 최종투표 안건에 올려주는 것을 보니 ‘아, 이거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라며 “소위 활동가 그룹이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교육이 많아지면 좋겠다”라는 의견을 표했다.
노점연합 단위에서 참가한 박모씨도 “처음 해보는 거라 얼떨떨하고 이런 방식의 효과성도 완전히 확신은 못하겠다”라면서도 “항상 풀뿌리 민주주의 안하냐는 불평이나 논쟁만 있어 왔는데 이렇게 일반 회원들이 모여 터놓고 토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좋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