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열사 30주기에 부쳐

김찬휘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거리를 메우는 엄청난 군중이 있다. 군중들은 한 목소리로 하나의 구호를 외친다. 그들은 대통령 선거에 의한 새 대통령을 원한다. 언제의 얘기인가? 2016년인가, 1987년인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빚어진 국민의 분노가 촛불집회로 타오르면서, 1987년 전두환의 영구집권 음모를 좌절시켰던 광장 민주주의가 귀환하였다. 1987년 시민들은 시종일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2016년의 시민들은 “박근혜는 퇴진하라. 새누리당 해체하라”라고 외쳤다. 물론 다른 것을 외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외의 슬로건은 뭔가 돌출적이고, 심지어 ‘불순’한 것으로 군중에게 받아들여졌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이루어지면 정국은 급속히 대통령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그러면 광장의 군중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고 광장에서 흩어질 것이다. 갑자기 87년의 추웠던 겨울이 생각이 난다. 김영삼과 김대중 유세장에 모여든 그 어마어마했던 군중과, 대선 패배 후 썰물처럼 사라졌던 군중의 모습. 이쯤 되면 87년과 16-17년 사이의 일종의 ‘평행이론’ 같은 것이 연상될 만도 하다.

물론 같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는 쿠데타로 생긴 군사독재 아래였고 지금은 선거로 당선된 ‘합법’ 정부 아래에 있다. 그때는 경찰이 시위대를 강력히 진압하려 했지만 지금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그때는 조중동과 TV가 모두 축소 보도했지만 지금은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때는 폭력 ‘데모’였고 지금은 ‘비폭력’ 촛불이다. 마지막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대통령이 그때와 지금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의 공존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세상은 바뀌었는데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합법적 정권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군사독재 아래에서 어용언론과 폭력 경찰과 부딪히면서 직선제 개헌을 위해 전진할 때, 이것은 무조건 진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왜 조중동 같은 언론들이 촛불시위 편을 들고 있는가? 아니, 왜 조선일보는 그 수많은 폭로를 통해서 촛불집회를 불러일으켰는가? 언론은 판을 깔아주고 경찰은 중립을 지킨다. 우리는 세계 역사에 보기 힘든 ‘질서 있는’ 시위라는 찬사에 우쭐해하면서, 경찰과 몸만 부딪혀도 ‘프락치의 공작’이라고 비난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의 수가 너무 많아서, 우리가 너무 평화적이라서, 조중동이 우리 편이 되었다고? 그 조중동이?

이것은 분명히 착시다. “역사의 수준 아래에 있는,” “인간성의 수준 아래에 있는 범죄자들”(헤겔「법철학 비판서설」, 1843)을 마주 대하고 있다 보니, 그들을 쫓아내는 혁명이 대단한 진보처럼 보이는 것이다. 쫓아내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쫓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쫓아내도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 엄청나게 후퇴했다가 겨우 1987년, 혹은 1997년의 어느 지점에 돌아왔을 뿐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 후보가 당선이 된다고 하자.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도 아니지 않은가? 이미 그 ‘민주’ 정부 10년을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촛불집회가 불타오르던 2016년 11월, 1년 전 민중총궐기를 주도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 대한 2심 공판이 열렸다. 검찰의 구형은 1심과 똑같이 8년. 정말 1년도 줄어들지 않았다. 한상균 위원장은 파렴치한 박근혜 집단의 폭력적 공권력 행사에 대해 저항한 것이기에, 그의 싸움은 지금의 촛불과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형은 그대로이고 광장의 시민은 거기에 관심이 없다.

이 또한 1987년과 얼마나 비슷한가? 87년 6월 항쟁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인 7,8월에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게 된 것은, 6월 항쟁이 절대 권력을 후퇴시켜 민중의 욕구가 터져 나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87년 6월의 싸움이 ‘일하는 대중들’의 요구를 전혀 담아내지 못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 점에서도 16-17년의 촛불집회는 87년의 6월 항쟁을 닮았다.

아들, 딸의 손을 잡고 수 없이 광장에 나갔던 이 땅의 한 시민으로서, 나는 촛불집회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패배감과 자기비하, 절망과 무기력을 뚫고 우리 국민은 위대한 시민혁명을 만들어 가고 있다.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이 용솟음치고 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것이 변조되고 윤색되어 스러져 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촛불은 더 나아가야 한다. 1987, 1997을 뛰어넘어 전진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속에서 ‘헬조선’의 흙수저로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한 최소한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박근혜 집단과 공생관계를 맺고 자기 배를 불려 온 재벌총수들은 모두 처벌해야 한다. 특히 국민의 피와 땀으로 모은 국민연금을 이용하여 삼성재벌 전체를 손아귀에 넣은 이재용은 반드시 감옥에 넣어야 한다.

둘째, 기만적인 개헌 시도는 즉각 중단해야 한다. 대신 선거기탁금 폐지와 선거공영제, 완전한 비례대표제의 실시, 정당이 연합한 선거연합정당의 보장, 대통령 및 단체장 선거에서의 결선투표제 도입 등 민주주의적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셋째, 신정부는 ‘헬조선’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 사회보장제도의 확대, 노동시간의 단축, 기본소득의 지급이라는 ‘삼각’ 정책을 취해야 한다. 그것만이 대한민국 국민이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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