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선의 문화정책 돌아보기 12 - 문화계와 참여정부의 엇갈린 행보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노문모)'는 2001년 5월부터 논의가 시작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핵심 축이었다. ‘개혁적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민주주의를 진일보시키고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는 문화계를 한국 최초의 자발적 정치운동에 나서게 했다. 개혁국민정당과 노사모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운영에 깊이 관여한 핵심세력이 됐다.

그리고 대통령선거를 이겼고, 노문모에 참여했던 이창동은 문화관광부 장관이 됐다. ‘새 예술의 힘’과 ‘창의한국’은 이창동 장관의 주도로 만든 문화관광부 정책 매뉴얼이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할 정도로 민간 전문가와 관료들이 치열한 토론을 통해 만든 현황 파악과 중장기 과제의 정책 매뉴얼이었다. 어느 부처에도 찾아보기 힘든 민관 합동의, 참여정부에 걸맞은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문화정책은 마감됐다. 장관은 바뀌었고, 영화 스크린쿼터제도가 무용화되는 것을 시발로 문화정책은 어둠 속으로 접어들었다.

참여정부 문화정책에 대해 3가지 유감으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용두사미 개혁추락

참여정부는 결국 '이명박근혜' 정부 실패의 근원을 잉태했다. 최소한 문화정책 분야에선 그렇다. 용두사미가 된 것이다. 문화계의 참여로 만들고 함께한 짧은 시절을 뒤로하고, 참여정부 문화정책은 추락을 거듭했다.

참여정부도 지금의 '블랙리스트 파동'과 다를 바 없이 문화를 '국정의 도구' 정도로 여기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용두사미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변절에 가까운 문화정책의 훼손을 가져왔다. 가장 큰 원인은 청와대였다. 인사문제에서부터 정책에 있어서까지, 청와대는 관점이 없었다. 문화정책을 바로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시각이 결여돼 있었다. 지금의 블랙리스트 파동과 다를 바 없이 문화를 국정의 도구 정도로 생각했다.

2003년 2월 참여정부 인수위원회가 채택한 문화 분과 정책 보고서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문화정책기구의 민간 참여 확대가 고갱이였다.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를 만든 것을 확대해서 예술 분야의 장르별 독립 행정위원회와 문화 콘텐츠 분야의 장르별 독립 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들의 협의체로 문화예술위원회와 문화산업위원회를 두는 것이었다. 이는 관료로서 참여한 전문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킨 문화관광부의 미래에 대한 이정표였다.

이후 문화예술위원회는 지금처럼 장르별 대표자 위원회로 변질되어 실질적으로 문화현장의 의견이 반영되기보다는 그전의 문화예술진흥원과 다를 바 없어졌다. 현재 논란 중인 블랙리스트가 실제 실행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문화산업위원회는 역시 시도조차 못 했고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파행을 예견하게 했다.

참여정부는 스스로 참여의 의지를 포기했다. 최소한 문화정책에 있어서는 그렇다. 특히 참여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와 이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인 ‘새 예술의 힘’과 ‘창의 한국’을 2년도 안 돼서 폐기하다시피 했다. 용두사미와 개혁 추락의 문화정책이 참여정부 문화정책의 첫 번째 유감이다.

정경유착 상품 전락

참여정부는 정경유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줄 알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은 참여정부를 통해서 활발해졌고, 문화는 큰 희생을 겪었다. 2000년 들어 꽃피기 시작한 영화산업의 가장 암흑기가 2006년이었다. 대기업 위주의 영화시장은 가장 혼란한 시기를 만들었다. 지금은 그 문제가 골수에 스몄고, 현재 한국 영화가 잘 나가는 것은 영화인들의 노력과 안정화된 대기업 지배구조 때문이다. 시장이 커진 것을 대기업이 누리는 것이다.

최근 지나친 간접광고(PPL)로 팬들조차 눈살 찌푸리게 한 인기드라마 '도깨비'(tvN) 속 간접광고 모음 .

블랙리스트와 같은 투자 배제 리스트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는 예술인들의 손에 의해 살고 있다. 문화 콘텐츠는 단지 상품이 된 것이다. 한류도 그러하다. 드라마는 간접광고를 통해 제작되고, 가수들은 음악보다 광고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문화 콘텐츠는 미끼 상품으로 전락했다. 네이버 등 포털을 먹여 살린 게임과 음원과 웹툰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기반이 이 시절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공정한 문화콘텐츠 거래 구조를 오히려 정부가 방치했다. 참여정부는 신자유주의가 문화 분야에 적응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가운데 당연히 정경유착이 저질러졌다. 참여정부는 삼성, SK, CJ, 롯데, KT 등 재벌과 함께했다. 정경유착 상품 전락이 참여정부 문화정책의 두 번째 유감이다.

복지부동 관료행정

'박근혜 게이트는' 블랙리스트와 차은택을 통한 이권 개입으로 문화계를 강타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관료시스템이다. 말 안 듣는 관료 한두 명을 본보기로 처리하고 그 자리에 실권자를 앉히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이런 관료 중심 시스템은 문화의 특성에 따라 워낙 세분화되고, 다양한 실행방식이 있으며,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한 문화행정의 경우 절대 지양해야 할 점이었다.

그래서 문화계는 참여정부를 통해서 민간 참여 행정의 확대를 꿈꿨던 것이다. 그러나 참여정부 중반기부터 문화관광부는 관료시스템이 안착되기 시작한다. 문화예술위원회가 2005년에 현재의 형태로 왜곡되어 만들어지고, 게임산업진흥원이 한국콘텐츠진흥원에 통합되는 등 문화 행정의 민간 참여 구조는 점차 구호에 그치고 만다. 그 중심을 장악한 것이 문화 관료였다. 그리고 이는 지금의 문화행정 파행을 낳았다. 참여 정부는 이름과 달리 참여를 제한했다. 복지부동의 관료행정을 되살려 냈다. 이것이 참여정부 문화정책의 세 번째 유감이다.

철학 없는 정부

LA 할리우드에 자리잡은 영화스튜디오들과 뮤지컬의 메카가 된 뉴욕 브로드웨이.

특히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서 유감이다. 행정수도 이전에서 서울은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인 뉴욕과 같은 모델로 구상됐다. 그러나 문화부 역시 지방 이전에 포함됐다. 목표는 작은 기관의 지방이전이 아니라 지방 문화의 활성화와 집중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영화제작사 하나 변변히 없는 부산에서 영화진흥위원회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고, 나주로 간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콘텐츠 기업 하나 없는 변방을 떠돌고 있다.

기관의 지방 이전이 아니라 지방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정확한 지방분권의 문화정책이다.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LA의 할리우드처럼 집중이 필요한 것이 문화다. 그리고 지역으로 뻗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행정수도 이전을 주도했던 건설부의 시각이 반영된 것에 어떤 철학적 가치를 찾아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필자는 1997년, 2002년 대통령선거 문화공약 수립에 참여했다. 2001년 노문모를 조직하는 역할을 했고, 개혁국민정당의 정책기획팀장이었다. 2003년 인수위 문화정책 행정관과 이창동 장관과 문화관광부 문화행정혁신위원회 간사로서 참여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영화진흥법 개정에 실무책임자였고, 검열의 폐지, 영화진흥위원회 설치 등의 성과를 직접 만들었다. 2004년 문화관광부를 나왔고, 참여정부는 개혁의 주체에서 최소한 문화정책에 있어서 필자에겐 개혁의 대상이 됐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지나면서 회한이 젖어 드는 것은 결국 자괴감이다. 올해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할 국가의 기회이자 또한 위기다. 희망하건대 민주주의와 개혁은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정부 문화정책에 대한 유감을 지울 수 없다. 

 

 

김종선 국회문화관광위원회 위원 보좌관(1996~2004)/ 15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문화정책담당 행정관(2003) / 문화관광부 문화행정 혁신위원회 간사(이창동장관 정책보좌역) / 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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