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1)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 수복 후 다시 처단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국방부의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숙청당했던 국군의 수는 장교 242명, 사병 4133명으로 모두 4375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8천명에 이른다는 주장까지 있는 것을 보면 이 수는 신원이 확인되는 최소치일 것으로 보인다. 숙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군복을 벗었거나 ‘강표월북사건’ 경우처럼 탈영 또는 월북한 경우는 이 통계에서 빠졌을 것이다.

이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던 숙군작업에 대해, 한국전쟁에서 생존하여 퇴역한 장성들이나 <한국전쟁사>의 서술에는 공통된 입장이 있다. 숙군 없이 전쟁을 맞았을 경우를 생각하면 끔찍하게 패전했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숙군공작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숙군의 희생자들

군부 내 갈등은 이미 경비대 시절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전쟁사>는 이를 ‘하극상’이라고 불렀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 이는 ‘내부고발’에 해당한다.

<한국전쟁사>가 소개하고 있는 ‘하극상사건’이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역시 가장 먼저 창설되었던 국군 1연대였다. 1946년 5월23일 1연대 1대대에서 지휘관들의 보급부정을 규탄하는 집단시위가 벌어졌다. 주동자는 중대장 이병위 중위, 이상진 중위였고 참여한 다른 군인는 박근서, 김지회, 위재설 등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지회가 여순사건의 김지회로 보이는데 그는 육군사관학교 3기였으므로 당시 소위였을 것이다.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육군사관학교 3기를 졸업한 김창룡은 1연대 정보소대장으로 좌익색출을 담당했다고 한다.

해안경비대에서는 1946년 6월27일 진해 조선해안경비대에서 6.27사태라고 부르는 하극상사건이 발생했다. 신현준은 사건의 원인에 대해 ‘위계질서가 잡혀있지 않아 생긴 문제’로 설명하고 있지만 당시 분위기로 보아 장교들의 부정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46년 10월 국방경비대 두 번째 하극상 사건이 이리에서 창설된 3연대에서 발생했다. 당시 3연대장이었던 김백일 대위가 결혼 비용에 쓰기 위해 병사들의 식량인 ‘시레이션’ 등 부대 급식품을 부정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연대본부의 하사관들과 군산의 2대대가 집단으로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 결과 현 연대장이 부연대장으로 내려가고 송호성 참령(소령)이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한국전쟁사>는 김백일이 실제 병사들의 시레이션을 처분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않으면서 이에 대한 항의를 좌익계열 군인들이 이용한 현상으로 적고 있다.

1946년 12월14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원용덕을 대신해서 육군사관학교 교장직을 맡던 대위 이치업은 침실에서 잠을 자던 중 박정희, 박형훈 등 몰래 방에 들어 온 육사 2기생들로부터 곡괭이자루로 집단구타를 당했다.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던 당시 생도들은 육사 책임자였던 이치업의 “군 풍기 확립을 빙자한 가혹한 기합과 형편없는 식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치업은 좌익성향의 생도들이 날조한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치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조차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공급되는 쌀이 부족하여 보리와 밀이 지급되었고 이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고 하고 있다. 생도들은 졸업할 때도 정식 군복을 입지 못했다고 한다.

1946년 9월1일 대대장으로 취임한 송요찬은 3개월 간 혹독한 훈련을 강행해 사병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사병들은 1947년 4월5일 대대장을 구타하고 무기고에서 총기를 꺼내 무장했으며, 장교들을 숙소에 연금하기에 이르렀다. 강릉에 주둔하던 미군이 출동하여 이를 진압했다고 한다. 박인욱 상사 등 이 사건의 주동자들 역시 이후 숙군의 대상이 되었다.

군내 비리에 항의했던 군인들이 파면되거나 불명예 제대했다고 알려졌지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이들에 대한 처벌은 파면이나 불명예에 그치지 않았다. 형무소 재소자나 국민보도연맹원이 되었던 그들은 전쟁 직후 학살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 여수 진압 후 여수남국민학교에 끌려온 주민들. 주민들은 저 자리에서 선별되어 충살당했다.[사진출처 : 진실화해위원회 화보집 <가려진 역사 밝혀진 진실>]

숙군은 여순사건 전에 시작되었다

숙군은 5.10선거가 치러지던 1948년 5월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 4.3당시 9연대장 김익렬은 박진경 암살 후 배후로 의심을 받아 방첩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김익렬은 민족청년단 계열로 지목당해 군을 떠나야 할 위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미 숙군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48년 5월7일 묵호기지에 소속되어 있던 소해정 301호 통천호와 소해정 517호 고원호가 월북했으며, 5월20일에는 제주 9연대 41명이 탈영 후 대정지서 습격 후 한라산으로 입산했다. 6월18일 박진경 중령이 대령으로 진급한 뒤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배경록, 손석호 하사, 양희진 일병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방경비대에서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하고 해안경비대에서 함정 2척이 월북한 사건이 발생하자 1948년 7월12일 통위부 참모총장 이형근 대령은 기자회견에서 국방경비대나 해안경비대를 철저히 숙청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실질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숙군이나 좌익세력을 색출하기 위한 국가적 조직은 1948년 8월부터 이미 마련되고 있었다. 이세호에 따르면, 8월20일부터 11월20일까지 장충단에 위치한 박문사에서 특수정보교육이 있었다. 여기에는 이세호 본인을 비롯하여 김안일 대위와 김창룡 중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수 14연대의 반란

1948년 5월4일 국군 14연대가 여수에서 창설되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여수를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 청년들이 모집대상이었으니 소작쟁의나 추수봉기, 친일경찰의 억압을 직접 겪은 세대들이 모여 들었을 것이다. 일부 14연대 군인들은 강진, 목포 등에서 가족들에게 해를 가한 경찰에게 보복하다 집단 패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으니 14연대 군인들이 친일경찰에게 갖고 있었던 반감은 매우 컸다.

1948년 10월19일 밤 12시까지 14연대 2개 대대를 제주도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인사계 지창수 상사 등은 군인들이 모인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지난 6월 박진경 대령의 암살을 계기로 시작된 숙군의 대상이었다. 주동자는 지창수 상사 외에 외선총책 이재복,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등이었으며 반란군의 주력은 1000여 명이었다.

여순사건과 숙군의 확대, 그리고 군 반란의 확대

1948년 초겨울, 특수정보교육을 마친 김창룡 특무대의 숙군작업 진행되었다. <한국전쟁사>를 살펴보면, 육군사관학교 3기 출신 김창룡은 여순사건의 김지회, 홍순석과 동기였음이 드러난다.

이세호에 따르면, 육군 정보국은 1949년 1월2일 특별수사과 예하에 15개 파견대를 두고 4연대, 14연대, 6연대, 15연대에서 364명을 숙청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15연대장 최남근 중령, 여단장 대리 김종석, 제1공병단장 오규범, 대대장 오일균 소령, 육사교수부장 조병건, 나학선, 최상빈, 김학림, 김창영, 안영길 등 장교만 80명에 이른다고 했다. 정부수립 후인 1948년 10월부터 6.25전쟁 전까지 4차례, 이후 1954년 10월까지 3차 등 모두 7차에 걸쳐 숙군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들 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리된 군인들이 1667명에 달했다.

숙군이 확대되자 대상이 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주 4연대 중대장 김남근 중위가 일으킨 ‘나주반란사건’, 1948년 11월부터 3회에 걸쳐 벌어진 ‘대구 6연대사건’, ‘마산 16연대 연대장 최남근 중령 사건’ 등이 벌어졌다.

▲ 전쟁 뒤 경인복선철교 아래 부교로 피난민들이 조심스럽게 건너고 있다. 27일경 한강의 모습.[사진출처 : 고든 리트먼의 <인천 1950>]

박정희를 위한 변명

숙청당했던 군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장교는 육사 2기 박정희였다. 그는 1948년 11월11일 김창룡에게 체포되었고, 이듬해 2월8일 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16조 위반으로 파면, 급료 몰수, 무기징역형이 결정되었다. 이치업 회고록에 따르면,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는데 숙군과정에서 200명의 남로당 소속 군인들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200명의 명단을 제출했던 것인지 아니면 김창룡이 작성한 200명의 명단에 도장을 찍어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체포가 1948년 11월11일 이루어졌다면 이는 본격적인 숙군이 시작된 뒤였다고 볼 수 있으므로 나는 뒤의 경우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숙청대상자 명단은 이미 작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강표월북사건

1949년 5월4일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6사단 8연대 소속 군인 368명이 월북했던 ‘강표월북사건’도 숙군과 관련이 있었다.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은 이미 숙청당한 15연대장 최남근 중령, 경비대사관학교 구대장 오일균 소령, 5여단 참모장 김종석 중령 등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숙정대상에 올라있었고 두 사람 모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였다.

역사가 증명하는 국군 숙청의 결과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하기까지 전사 219명, 부상 761명, 실종 13명 등 모두 111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반면 국군은 최소 4만4000명에서 7만3000명의 병사가 전사했거나 무장해제되었다. 인민군이 강했다는 변명만으로는 부족하다. 1957년 1월 김창룡 암살사건 지원혐의로 군법회의에 섰던 전 2군 사령관 강문봉 중장은 특무대의 부정 사례를 열거한 뒤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특무대는 육군의 암적 존재다.”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은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닌 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과 고양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또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등 제노사이드의 공통점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멈춘시간 1950>, <전쟁범죄>,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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