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피눈물은 모르겠고 피멍만 보여요)

To. 박근혜 대통령(권한정지)님께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지난 9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가진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고 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 순간 저의 머릿속엔 사극에서 자주 듣던 '뭬야, 감히 나를! (부들부들)' 식의 대사가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구구절절한 탄핵 사유를 보고도 반성의 눈물이 아니라 ‘피눈물’을 운운한 인식이라니, 참담함은 또다시 국민의 몫인가 봅니다.

이미 2년 8개월 전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 당신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지만 ‘피눈물’은 유족과 국민 몫이었습니다. 그 당시,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 ‘방금 저게 뭐지?' 싶어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쳐다보게 한 ‘악어의 눈물’과 지금은 필러시술 자국이라고 강하게 추정되는 당신 입가의 ‘피멍’뿐입니다.

그런데 대통령님, 진짜 '피눈물'은 17일 광화문광장에서 아프게 흘렀습니다. 8차 촛불집회 시작 전 세월호 유가족들이 구명조끼를 나눠 입었습니다. 서로 구명조끼를 입혀주던 유가족들은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이들이 입고 구조됐어야 할 구명조끼.

참사 희생자 남지현 양의 언니 서현 씨는 17일 페이스북에 "아빠가 구명조끼를 입었다. 구명조끼 입는 것을 도와드렸다. 가족들은 한번 죽고 두번 죽고 세번 죽는다”라고 심경을 토로하며 “구명조끼가 튼튼한 것이 화가 났다. 지현이가 입고 나온 구명조끼는 다 해지고 낡아빠진 [...] 그 구명조끼 끈을 허벅지에 칭칭 감아 묶어놨었다..."라고 전했습니다.

보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구명조끼를 유가족이 입고, '오늘은 세월호 참사 977일'이라 적은 손팻말을 든 채 삼청동 총리공관 100m 앞으로 행진해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니... 그나마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무당/샤먼', '청와대 굿' 의혹이 제기됐고, ‘절친’이신 최순실씨 단골 병원과 밀접히 관련된 박 대통령의 미용주사 의혹 덕분에(?) ‘세월호 7시간’이 재조명됐지요. 국민의 관심이 '세월호 진실과 정의'에 힘을 보태는 지금, 유가족들은 필사적입니다.

대통령님, 구명조끼는 구원의 상징인데 세월호참사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만은 구명조끼가 '외면'과 '버림'의 상징이 된 걸 아시나요? “억울해서 못 살겠다...”는 한 엄마의 눈물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오열하고, 그러고도 광장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는 부모들의 뒷모습에서 '피눈물'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피눈물'을 흘리셨다는 박근혜 대통령은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혹 ‘황야의 무법자’처럼 흙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권토중래(捲土重來)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 아니신지요.

비록 당신은 국민과 국회에 탄핵당하고 청와대란 동굴에서 '겨울잠'과 유사한 칩거에 들어갔지만, 지난 18일 공개된 박근혜 대통령 법률대리인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답변서를 보니 “최순실씨의 국정관여 비율은 대통령 국정 수행 총량의 1% 미만”이라고 너무나 당당히 적혀 있더군요. 여전히 세상 당당한 당신! 덕분에 '1% 미만'은 이번 주의 유행어로 '급부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속하게’. 세월호참사 당일 부적절한 대응에 대한 답변은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상근무하면서 신속하게 중앙재해대책본부에 나가 현장 지휘를 했다”고 주장하더군요. 여기서 ‘정상근무’, ‘신속하게’의 의미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일반 국민이 이해하는 사전적 정의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박근혜 번역기'를 돌려봐야 이해 가능한 부분인지 국민은 많이 황당합니다.

첫 사고 신고가 있은 지 8시간이 경과한 뒤 대통령이 중대본에 나타난 건 이제 모든 기록에서 밝혀졌습니다. 긴박한 국가재난 상황에서 8시간이 '신속'이라면, 당신은 다른 중력의 작용으로 시간의 개념마저 지구와는 사뭇 다른 은하계에 살고 있다는 것만이 저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결론일 것 같습니다. 그곳이 어디든 지구가 속한 '밀키웨이 갤럭시'와는 굉장히 먼 곳이 되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시간 개념이 달라도 7시간 정상근무를 하고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는 삼척동자도 울고 갈 엉뚱한 질문을 하시고야 만 점은 석연찮습니다. 게다가 새누리당이 정상근무한 대통령의 7시간을 홍보하긴커녕 왜 마치 '대통령의 역린'인 양 번번이 특조위 조사 항목에서 제외되길 요구한 것인지 앞뒤가 맞지 않고요.

17일 8차 촛불집회 본대회가 끝난 뒤,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은 304벌의 구명조끼를 나눠 입고 삼청동 총리관저 100m 앞까지 행진했다.

서서히 ‘박근혜 공범’인 김기춘·우병우·황교안들이 어떤 식으로 꾸준히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영원히 수장하려 했는지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국 스스로 침몰하는 박근혜 정권인 것이죠.

사실 일반 시민은 세월호참사가 연상되는 '배', '침몰', '구명조끼' 등의 은유를 쓰는 일이 몹시 조심스럽습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집단기억에 깊숙이 자리 잡은 트라우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침몰 중인 박근혜와 부역자들에게 말씀드리려 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아직도 선명하게 악몽에 나올, 구명조끼를 주섬주섬 껴입고 거리를 행진토록 외면한 당신들에게 줄 '구명조끼'는 없습니다.

부정부패와 무능·무책임을 ‘과적’한 당신들 스스로 침몰한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세요. 이제 우리는 이 땅에 민주주의와 정의를 되찾겠습니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숙명처럼 남겨준 과업 '생명이 생명으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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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헌법 제85조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의 신분과 예우에 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고 하는데 미용주사는 택도 없고, 감방에서 드라마 볼 수 있는 정도의 예우는 ‘촛불국민’이 너그러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당신의 시계에 7시간이 신속했다면 앞으로 감방에서의 시간들도 꽤나 신속히 흐를 것 같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PPS. 아닙니다! 박근혜와 함께한 열여덟 해에 앞서 박정희와 함께한 열여덟 해, 합이 36. 그간 적폐를 생각하니 ‘드라마 딜'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래도 변기 한 대 정도를 새로 설치하는 예우라면 어떻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제 그만 살펴 들어가십시오.

17일, 대학생들이 '종강 맞이'로 박근혜 대통령 4년을 평가하는 성적표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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