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선의 문화정책 돌아보기 8 - 문화산업이 예술을 압도하는 사회

영화 관객 천만 시대, 시(詩)는 광장에 없다  

촛불을 켠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탄핵이라는 1차 목적을 달성하고 다시 이어지고 있는 광장의 문화는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한다. 많이 모이는 참여의 시대를 맞은 건 사실이다. 다양하게 조직적인 ‘동원’이 아니라 ‘참여’가 월등해진 민주주의의 진일보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갈수록 마음 한쪽이 비어있는 듯 아련함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구시대의 사고를 버리지 못한 체 아직도 ‘진격 투쟁’과 같은 과거의 무용담에 젖어 있어서는 아니다. 잃어버린 ‘혁명의 추억’에 젖어서는 더욱 아니다. 뭔가 모를 허전함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열정’이 빠져 있는 듯 아쉬움 때문인 것 같다. 광장에서 시(詩)를 만나지 못함 때문이다.

김수영, 신경림, 김지하, 김남주, 박노해... 과거의 광장에는 그들의 시가 살아 있었다. 지금은 SNS를 타고 많은 말들이 풍요롭게 움직인다. 촌철살인의 목소리도, 감동의 사연들도... 그러나 가슴을 오랫동안 뛰게 하는,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한 마디의 힘을 찾기 어렵다. 이렇게 예술의 시대를 아쉬워한다. 천만 영화 관객의 시대, 문화의 홍수 속에서 예술을 그리워한다.

(김남주시인 육성 시낭송 ‘조국은 하나다’

https://www.youtube.com/watch?v=wmD1vIKvvZ0&index=5&list=PLluSBhgek3Ih-oKgkohEtrtIPTR1FIzls)

(김남주시인 육성 시낭송 ‘이 가을에 나는’

https://www.youtube.com/watch?v=REc1oopy4_s&list=PLluSBhgek3Ih-oKgkohEtrtIPTR1FIzls&index=3)

문화 산업의 시대를 열어버린 것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

문화산업의 시대는 문화와 예술정책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한다. 지난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집권으로 문화·예술 정책은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문화·예술 분야 대통령 선거 공약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 이 분야에 발을 디딘 입장에서 지금, 오히려 후회가 드는 것이 많다.

새로운 시작이 20년을 지나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왜곡 시켰는지, 아쉬움이 많다. 문화나 예술에 대해 잘 모를 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행정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국가 운영 구조에 대한 타협이기도 했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무지는 국민의 관심을 얻어야 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초점을 두게 됐다. 그것이 대중문화였다. 문화산업이 중점이 되었던 것이다.

영화, 대중음악, 게임 등등. 행정중심의 정부 구조에 대한 타협은 경제성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쥬라기공원과 현대자동차의 비교’와 같은 예술에 대한 천박함을 그대로 드러낸 슬로건에 정책의 방향을 맡겨야 했다. 당장 우리 편의 정치인조차 설득하기 위해선 그래야 했다. 경제부처의 예산을 배정받기 위해서 그래야 했다.

김대중 정부를 통해 가장 큰 성장을 이룬 것이 영화계이다. 1999년 1월 ‘영화진흥법’의 개정을 통해 검열이 폐지되면서 소재의 자유를 맞았다. 스크린쿼터 준수를 통해 상영의 기회를 확보했다. 같이 제정된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통해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은 벤처산업으로 분류되어 금융자본의 투자가 가능하게 됐다. 드디어 문화산업의 산업적 구조가 펼쳐진 것이다.

지금의 천만 관객시대를 맞기 위한 준비가 이뤄졌다. 이제는 시 한편에 인생을 바꾸던 시대가 접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 영화는 다양한 사회변혁을 일정하게 담아내고 있다. 최근의 여러 영화들 역시 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들이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얼마만큼의 행동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문화산업을 정치적, 행정 구조적 타협으로 성장시키면서 놓아버린, 아니 미쳐 챙겨내지 못한 예술정책의 부재가 우리 사회를 더욱 가볍게 만들지 않았는지, 철학이 없는 사회로 인도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정부가 책을 공급하는 사회

인문학의 위기라고 한지 오래 됐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가 된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동네 책방이 사라지고 대형 서점과 교재 서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오랜 헌책방이던 공씨책방이 위기를 맞고 있다. 출판되는 책들은 많아져도 많이 팔리는, 살아남는 책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됐다. 출판이 사회적 공기가 아니라 산업의 영역으로 자리 잡아 버린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현재 출판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편재에 따르면 문화콘텐츠산업실 소관이다. 출판이 문화산업인 것이다. 출판은 사회를 지탱하는 철학과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원동력이다. 그런데 출판이 문화산업이 된 것이다.

도정일 선생을 비롯해 1990년 대 ‘도서관 운동’이 있었다. 함께 하면서 가졌던 고민을 2003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문화정책 계획에 반영하고 출판 영역을 예술의 영역, 문화정책 포괄의 영역으로 가져오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결국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공공도서관의 도서구입비의 실질적 확대를 통해서 정부가 책을 공급하는 사회로 만들고 싶었다.

문학을 위해 국가는 책을 사서 시민에게 공급해야 한다

연극을 위해 국가는 공연장을 공급해야 한다 

음악을 위해 국가는 공적인 공급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문학이 살고, 인문학이 살고, 자연과학이 사는 길은 꾸준히 책을 만들고 책을 소비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정부의 공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공공도서관에서, 책들의 초판을 기본적으로 국민에게 제공하는 사회가 선진 국가이다.

예술정책은 국가의 공적인 영역이어야 한다. 문학과 미술이 없는 영화나 대중음악은 겉만 화려할 뿐 깊이를 담보할 수 없다. 문학과 미술과 음악을 모르는 시민은 이타적이기 어렵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중요한 하나인 이타성은, 예술을 통해 세상을 관조할 때 많은 부분이 채워진다고 믿는다. 문학을 위해 국가는 책을 사서 시민에게 공급해야 한다. 연극을 위해 국가는 공연장을 공급해야 한다. 음악을 위해 국가는 공적인 공급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공공재로서 예술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 돼야 한다. 지난 20년 문화·예술정책에 몸담아 오면서 느낀 아쉬움이 더욱 절실한 시기를 맡고 있다. 이제 사회는 더욱 소비적이고 다변화 될 것이다.

스마트 시대라고 하는 것은 문화를 기반으로 하지만 예술의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술의 가치는 쉽게 소비되지 못하기 때문에, 진득한 예술의 향취는 뒤안길로 가고 있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촛불 광장에서 끌어 내린 정부의 자리에 예술이 희망이 되는 정부가 자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예술가의 자존심은 살아야 한다

시(詩)가 다시 광장을 지배하기를 바란다. 시가 청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를 원한다. 시가 아이들의 놀이가 되길 원한다. 문화국가와 문화시민은 더디 가도 원칙에 충실할 때 만들어질 것이다. 예술이 사회의 공공재로 제 역할을 하고 예술가가 당당하게 사회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때 문화국가가 될 것이다.

몇몇의 예술가들은 장사치처럼 완장을 차거나, 과장된 경력을 팔고 있다. 쥐꼬리만 한 공공 지원금을 타기 위해 목메고, 예술을 배반하는 일이 일어난다. 예술가의 문제만이 아니다. 예술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자존심이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미안하면서도 그렇다. 다시 시가 울려 퍼지고, 감동이 삶을 바꾸는 광장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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