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양성우는 1943년 11월 1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전남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詩人誌(시인지)>에 ‘발상법’, ‘증언’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발상법>(1972), <신하여 신하여>(1974), <겨울공화국>(1977), <북치는 앉은뱅이>(1980),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1982), <넋이라도 있고없고>(1983), <낙화>(1984), <노예수첩>(1985), <부활의 땅>(1988), <꽃날리기>(1991),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1997), <첫마음>(2000), <물고기 한 마리>(2003), <길에서 시를 줍다: 양성우 시화집>(2007),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2012) 등이 있다. |
1. 사건 원인과 경과
양성우(梁性佑, 1943.11.1~ )는 자작시 ‘겨울공화국’, 장시 ‘노예수첩’ 및 시집 <겨울공화국> 발간 등으로 필화사건을 겪는다. 이 일련의 사건을 통칭하여 ‘양성우시인필화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시기별로 살펴본다.
1975년 2월 12일 양성우는 광주 YMCA강당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에 참석한다. 이 기도회는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열린 행사였다. 여기에서 그는 유신체제를 ‘겨울’, ‘한밤중’ 등으로 비유하여 시대상을 암울하게 묘사한 자작시 ‘겨울공화국’을 낭송한다. 이 일로 그는 그해 4월 근무하던 광주 중앙여고에서 파면된다. 이른바 ‘겨울공화국사건’이다. 세월이 흐른 후인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한 뒤 중앙여고에 복직 권고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31년 전 사건이라 당시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직을 거부당한다.
양성우는 ‘겨울공화국사건’으로 파면당한 후, 장시 ‘노예수첩’을 써서 일본 잡지 <세까이(世界)> 1977년 6월호에 번역․게재한다. 이 시는 대한민국은 독재국가로서 국민들은 무자비한 인권탄압으로 최소한의 기본권도 누리지 못한 채 억압당하고 있고, 정부는 비밀흥정에 의해 몇 푼의 대가를 미끼로 군인들을 월남으로 보내 죽게 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와 함께 그는 자작시 ‘우리는 열 번이고 책을 던졌다’를 복사하여 지인들에게 배포한다. 이 두 건으로 그는 검찰에 의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정세 전반 및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에 관한 사실을 왜곡한 내용으로 대한민국의 안전, 이익과 위신을 해했다는 등의 범죄사실로 국가모독죄 및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1975. 5. 13.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기소된다. 이른바 ‘노예수첩사건’이다.
1977년 12월 26일 양성우는 위 범죄사실로 1심에서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고(서울형사지방법원 77고합586), 항소(서울고등법원 78노196) 및 상고(대법원 78도1992)가 모두 기각돼 1978년 9월 26일 그 형이 확정됐다. 그 이듬해인 1979년 건강 악화로 가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 ‘노예수첩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문단의 저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필화사건이다.
양성우가 ‘노예수첩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중인 1977년 8월 30일 그를 지지하는 문단, 특히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 현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을 중심으로 그의 시를 묶어 시집 <겨울공화국>(실천문학사)을 발간한다. 이 일로 이 협의회 소속 다수의 문인들이 체포됐고 고은, 조태일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고를 치른다. 이른바 ‘겨울공화국 시집 사건’이다.
‘노예수첩필화사건’에 대한 유죄판결이 내려진 날로부터 약 35년 후인 2012년 10월 26일 양성우는 서울형사지방법원 77고합586 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이에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3년 4월 19일 재심개시결정을 했다(2012재고합23). 양성우는 재심 계속 중인 2013년 6월 5일 국가모독죄를 규정한 구 형법 제104조의2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했다. 2013년 6월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위 제청신청에 따라 이 사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2013초기1930). 2015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유신시절 국가를 비방하면 형사 처벌하도록 규정한 국가모독죄(옛 형법 104조의2)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했다.
김지하의 ‘오적’필화사건과는 달리 ‘양성우시인필화사건’은 유신당국의 철저한 통제로 세간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김종훈은 “정권은 양성우 시인에게 자유를 주되 영웅으로 만들기는 싫었다”고 분석한다. 정권의 의도대로 양성우는 ‘영웅’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긴급조치 발동으로 제4공화국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탄압하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양성우를 유신체제에 저항한 대표적 시인으로 각인시킨다.
그 후 그는 시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후 신민주연합당) 후보로 서울시 양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1992년 같은 선거구에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주자유당 박범진 후보에게 밀려 낙선한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던 중 그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적으로 전격 전향한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캠프에 참여해서 그의 당선을 돕는다. 그 덕분일까?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 8월 11일 제5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돼 3년간 역임한다.
누구나 정치활동의 자유가 있다. 누구도 ‘시인’ 양성우의 ‘정치인’ 양성우로의 변신을 힐난할 수는 없다. ‘시인’ 양성우의 변신은 무죄일까? 그 판단은 독자의 손에 맡긴다. 이 글에서는 유신체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시인’ 양성우와 필화를 겪은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