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한 알의 밀알’로 농촌공동체 만들어가던 참농민

 

▲ 백남기농민투쟁본부 페이스북 화면 켑처

지난 해 민중총궐기 집회 당시 백남기농민은 경찰차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리고 흰 밧줄을 잡아당겼다. 순간, 살수차에서 뿜어내는 살인적인 물줄기에 아스팔트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의식불명 된지 31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명백한 국가폭력이었다. 사람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고 청문회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당시 책임자인 강신명경찰청장은 청문회장에서 조차 뻔뻔한 태도로 책임이 없다고 말했고 청문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부검을 하겠다며 망자의 시신을 탈취하려고 했고, 물대포로 인한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사인을 조작해서 발표했다. 잔인하고도 잔인한 국가폭력의 막판을 보여줬다.

부검실시를 위한 영장 만료일이었던 지난 25일, 영장 집행을 위해 온 경찰병력과 백농민투쟁본부와 시민지킴이단 등이 대치하고 있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백농민과 우리밀살리기운동을 해온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광주전남본부장을 만났다. ‘우리밀살리기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백농민의 발자취를 듣기 위해서였다.

백농민 상주로 빈소를 지키며 광주를 오가고 있는 최대표의 눈에는 백농민을 회상할 때마다 눈물이 맺혔다. 여전히 믿기 어려운 상황과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가 서려있는 듯 했다. 그에게 듣는 백농민은 영정에 나와 있는 모습처럼 따뜻하고 온화한 분이었다. 부탁을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고 앞에 나서는 것보다는 뒤에서 받쳐줬으며,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늘 양보하는 분이었다고 했다.

▲ 영장 만료일인 지난 25일 대치 모습[사진출처 백농민투쟁본부 페이스북]

너무나 검소해서 백농민에게는 3가지가 없었다는데 그건 양복과 지갑 그리고 핸드폰이라고 했다. 양복은 결혼식 때 입은 게 유일한 걸로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이 쓰러졌던 날의 정황들과 겹쳐져 더 아프다고 했다.

영상을 통해 봤겠지만 갑자기 경찰차 앞으로 걸어 나가는 백농민을 보며 의아해했을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더 아려왔다.

지역 후배의 권유로 다른 일정을 접고 상경한 그가 함께 다니던 동료와 인파 속에서 떨어지면서 핸드폰이 없어 연락을 못했을 것이란 얘기와 사고 현장에서 밧줄을 잡아달라는 한 시민의 부탁으로 나가서 밧줄을 잡았다가 화를 당하게 됐다는 얘기는 백농민의 착한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사실은 백남기농민이 ‘우리밀 살리기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분이라 것이다. 백농민은 토종종자인 ‘우리밀’을 살리기 위해 전국을 다니면서 씨앗을 구했고, 24kg에 불과했던 우리밀 씨앗으로 지금은 전국에 2만 헥타르(ha)에 달하는 우리밀 농지가 생기는데 단초를 만든 분이었다. 먹을거리의 중요성을 알고 유기농농사에 애쓰셨고 공동체운동에도 열심이었던 백남기농민은 국가폭력의 희생 속에서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한, 그야말로 당신 스스로가 ‘한 알의 밀알’이 된 큰 어르신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 최강은 본부장과의 인터뷰를 싣는다.

 

- 백남기 농민과는 어떤 관계였나? 

▲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광주전남본부장

“형님(백남기 농민)은 1986년도에 가농에 입회를 하셨다. 당시 저는 가농 전남연합회 실무자로 일했고 형님은 보성·고흥 협의회 회장을 하시면서 인연이 닿게 됐다. 그러다가 89년부터 형님이 가농 전남연합회 회장을 하고 제가 실무 책임자를 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됐다.”

- 백남기 농민이 농민운동을 시작한 배경은?

“형님은 본래 학생운동을 하셨다. 그러다 대학에서 두 번째 제적을 당하고 마지막 복교조치가 된 것이 1980년 서울의 봄 당시다. 그런데 복학하자마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래서 복교하자마자 총학생회 부회장을 하시게 됐다. 당시에 자꾸 제적을 당하셔서 학교를 12년을 다니게 되다보니 한참 후배들과 운동을 하게 됐는데 후배들이 대선배님이 역할을 좀 맡아 달라 부탁을 해서 부회장이 됐다.

그 즈음에 형님의 대표적인 활동이 한강도하를 주도하신 거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80년 5월 17일 김대중 내란음모 및 계엄령 포고 위반으로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당시 형님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후배들이 도망가자고 했지만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도망가지 않겠다’고 거절하고 경찰에 연행됐다.

그래서 아마 2년3개월인가 형을 받고 안양 교도소에 있을 때, 유시민 등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 유시민의 경우엔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쓰면서 항소를 했는데, 형님은 ‘나는 부도덕한 정권에 항소할 이유가 없다’며 항소를 하지 않아서 사면이 됐다. 그런데 유시민은 항소하는 바람에 사면이 안 되고 형을 다 산 것으로 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제적처리가 됐다. 그래서 귀농을 하시게 됐는데 처음엔 꼭 농민운동을 한다기보다는 그냥 농민으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귀농을 하신 것이다.”

- 가톨릭 농민회에서 백남기 농민의 역할은?

“처음엔 보성에서 그냥 농사만 짓고 살다가 아마 83년에 해금이 됐는데 그 해에 건너 건너 소개를 받아 농민운동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농촌이 갈수록 척박해지는 시기인데, 보성에 훌륭한 청년이 있다는 말을 듣고 몇 사람이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86년 가농에 가입하고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마침 당시 보성군조직은 있는데 웅치면에 면 조직이 없어서 면 조직 책임자가 되겠다고 자청하셨다. 그래서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농민활동을 시작했고 그런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점점 역할이 높아지신 것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나?

“당시에는 마을 이장도 면에서 간선으로 뽑았는데 형님이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서 아마 대한민국에서 1호로 민선 이장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면사무소 이장단 회의에 가면 형님 자리가 없어서 자기가 의자를 가져와서 앉고 그랬다. 그때는 전두환 시기니까 그럴 만도 했지. 말하자면 마을 민주화부터 앞장섰던 분이라고 할 수 있다.”

- 어떻게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시작하시게 됐나?

“우리밀을 살린다고 우리농업이 획기적으로 살아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밀이 사라지게 된 역사적 의미가 중요한 게 뭐냐면, 밀이 우리나라 농산물 수입개방 1호다. 84년 정부수매 중단이 되면서 자연스레 농가에서는 재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89년 무렵, 가농 전국본부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옛날에는 밀농사를 많이들 지었는데 요즘은 밀농사 짓는 농가가 없다. 우리가 한번 해보세’라며 소박하게 시작하게 됐다.

주변을 살펴보면 간식거리나 밀가루로 된 음식이 정말 많고,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좋아하지 않나? 그래서 국민건강에도 좋고 수입을 안 하면 국가경제도 이바지하고, 새로운 농업소득원도 창출할 수 있다. 또 겨울철에 농촌이 황량한데 밀을 2모작으로 해서 파란 밀밭이 펼쳐지면 경관도 좋고 밀의 광합성 작용으로 환경적 측면에서도 좋으니까 시작을 했다. 근데 막상 시작하려니 밀 종자가 없더라. 그래서 형님이랑 몇 분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촌의 노인들이 가용(家用)으로, 약재 등으로 심는 밀 종자를 조금씩 받았는데 24kg 정도 확보했고 보성, 구례 그리고 경남 지역에 배포했다.“

- 당시 에피소드는 없었나?

“가용으로 쓰는 종자를 모은 것이라 양을 많이 받을 수 없었고 종자도 다 달랐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농촌진흥청에 맥류과(밀, 보리, 귀리)가 있어서 거기서 육종을 해서 연구용 종자는 남아있었다. 근데 보급용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조금씩 종자를 모아서 퍼뜨렸는데 말 그대로 하나의 밀알이 온 세상을 뒤덮게 한 셈이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2만 헥타르(6천만 평) 정도 밀 농지가 있다. 그 정도면 대략 1년에 밀 200만 가마 정도를 생산할 수 있는 양입니다. 백남기 농민은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도 같이 만들었고, 주변 사람들이 전국 회장도 맡아주시길 부탁했지만 거절하고 광주전남지역본부장만 맡으셨다. 그러다가 2000년 초에는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농사일에만 전념하셨다.“

- 농민들이 밀을 심도록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겨울에 남부지방은 대체로 2모작을 하는데 보리는 밀보다 1주일 정도 수확시기가 빠르다. 그 1주일 차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다음 벼농사 파종시기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굉장히 민감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수확시기가 빠른 밀 종자를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지금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농촌진흥청 같은 곳에서도 그런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동력을 살려준 셈이니까 농촌진흥청 직원들도 우리를 굉장히 고마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국내 밀 자급률이 2%밖에 되지 않는다. 수입밀은 연간 400만 톤 정도 들어오는데 미국이 70% 정도 되고 나머지는 호주, 캐나다 이런데서 들어오는데 사료용과 식용이 반반 정도다. 국내에서는 식용 밀만 생산하고 4만 톤 정도 생산하니까 자급률이 2%가 되는 거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우리밀살리기 운동을 해서 밀농사를 살려놓은 것은 우리나라 밖에 없을 거다. 다른 나라들은 다 정부나 협동조합에서 하지 민간에서 안 한다.”

- 우리밀살리기운동이 과거 ‘분식장려정책’과도 관련이 있나?

“해방되고 나서 미국의 무상원조정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밀가루였다. 자국에서 남는 밀을 가격 지지(주가의 추가하락을 막고 있는 주가수준)를 위해서 바다에 버리거나 우리나라 같은 곳에 무상으로 준거다. 제가 볼 때 그것은 우리 식문화 자체를 쌀 중심에서 밀로 바꾸기 위한 미국의 식량정책의 일환이라고 본다.

물론 우리도 전통적으로 밀농사를 짓기는 했다. 문헌으로 봐도 삼국사기에도 밀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쌀이 주곡이었고 밀은 귀한 작물이었다. 옛말에 ‘언제 국수 먹여줄래?’ 이런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밀이 잔치 때만 먹는 귀한 작물이었다는 거다.”

- 백남기 농민은 유기농 농업에도 많이 힘쓰셨다는데?

“유기농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제초작업이다. 풀과의 전쟁에서 지면 안된다. 제초제를 안 쓰려고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예초기를 들고 살았다. 그 덕분에 팔뚝이 정말 굵어지셨다.”

- 밀 외에도 다양한 곡물을 재배하셨다는데?

“밀 외에도 콩을 재배하셨다. 그걸로 재래식 된장, 고추장 만드는 일에도 참여해서 가농 ’되살이’라는 곳에 공급했다. 농촌에서 농사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동체 운동을 시도하셨다고 보면 된다.”

- 지난해 민중총궐기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나?

“본래 형님은 사실 지역에서 하는 다른 행사가 있어서 그곳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보성농민회 후배가 민중총궐기에 함께 가서 격려도 해주고 해야 후배들도 힘이 나지 않겠냐고 부탁을 해서 승낙을 하신 거다. 형님이 다른 사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도 다른 사람 의견에 반박을 잘 안하고 ‘아, 그건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네’라며 수긍하시고 주로 듣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분은 본래 혼자 나서서 뭔가 하는 것을 싫어한다. 예전에 농민단체 간부를 하실 때도 무슨 행사가 있으면 당연히 인사말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잘 안하려고 하고 ‘그냥 자네가 하게’ 그러던 분이셨다.”

- 흥도 많으신 분이었다던데?

“백남기 농민이 한 때는 꽹과리에 심취하셔서 혼자 책을 사서 공부도 하시고 뒷산에 가서 연습을 열심히 하셨다.”

- 그런 분이 어떻게 민중총궐기에서는 나서서 밧줄을 잡게 되셨나?

“처음엔 저도 그것이 굉장히 궁금했다. 그런데 사고가 나고 며칠 뒤에 형님이 입원한 중환자실 앞에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울면서 백 농민 가족에게 와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다.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그분은 사고 당시에 백 농민 근처에 있었는데, 밧줄을 잡아줄 사람이 부족해서 “누가 나가서 줄 좀 잡아 주세요”라고 호소를 하니까 아무도 안 나서는데 어르신 혼자서 “아 그럼 나가야지” 이러면서 홀로 뚜벅뚜벅 가시더라는 거다. 그러다 변을 당하신거다.

그 아주머니는 소속된 단체는 없었고 이름도 당시 물어보지 못했다. 그분은 죄책감에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가족들 볼 낯이 없어서 찾아올 엄두를 못 내다가 도저히 오지 않을 수 없어서 며칠 만에 용기를 내서 찾아오신 것이다. 처음에 집회를 가자고 했던 후배도 ‘그때 가자고 하지 말걸’이라면서 정말 자책을 많이 했다. 백 농민은 어디를 가도 ‘같이 한 번 가보세’ 그러지, 혼자 하는 분이 아니다. 아마 당시엔 무자비한 물대포를 보고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했던 것 같다.“

- 11월에 다시 민중총궐기가 있는데 지금 현재 가장 시급한 농촌 문제가 있다면?

“다 심각하다, 다 심각한데 농업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식량자급을 하지 않고 선진국이 된 나라는 거의 없다. OECD 가입국 중에서 일본, 한국, 덴마크 정도를 빼면 모두 곡물 자급률이 100%가 넘는다. 기본적으로 농업의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하고 나서 경제발전도 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도외시하고 있다.

제가 볼 때 모든 곡물은 자급률을 10% 이상 유지해야 한다. 그러면 유사시에 6개월 안에 모든 곡물을 필요한 만큼 생산량을 회복할 수 있다. 일본은 밀 자급률 15%를 유지하는데 이게 가능한 것이 수입밀에 관세를 붙여 그걸로 국산밀에 가격지지를 해줘서 수입밀과 일본밀 가격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있는 관세도 없애버리고 밀에 대한 지원금도 농가가 아니라 제분업체로 가버리는 거다. 그렇게 농업정책에 대한 마인드가 안 돼 있다. 지금도 쌀 빼면 곡물자급률이 5% 남짓인데 밀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콩이 가장 중요하다.

(왜 콩인가요?) 국민건강을 위해서다. 미국에서 생산해서 우주인들 식량으로 공급하는 콩의 원종이 우리나라 시골에서 나는 똘콩 종자다. 우리 것을 가져가서 쓰는 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밀 종자도 일본에서 육종한 건데, 원종이 우리나라 앉은뱅이 밀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종자산업이 중요한 거다. 지금도 종자는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육종이 잘 안 되고 있으니 문제다.”

- 유족 측의 장례에 대한 입장은?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사과나 책임자 처벌이 있어야 장례를 치를 수 있는데 형님은 5.18유공자라서 5.18 국립묘역으로 갈 수 있다. 본래 유공자였는데, ‘살아있는 사람이 무슨 염치로’ 그러면서 한사코 거부했었다. 그러다 사고가 터지고 올해 초에 제가 서류를 갖춰서 광주시청에 제출했다.

그 결정이 내년 2월 정도에 날 것 같다. 그 전에 장례를 하게 되면 바로 5.18국립묘지는 못가고 그 옆 민주묘지로 모셨다가 확정이 되면 다시 이장할 수도 있다. 가족들도 그걸 원하고 있다. 그러고 나면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서 여러 가지 기념사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백남기농민투쟁본부 포스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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