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시 분야' 첫 필화사건 <오적>의 작가 김지하의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 저항한 대표적 시인으로 1941년 2월 4일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와 중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고,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오적필화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옥고를 겪었다. 

3. 법적 쟁점과 판단

▲ '오적'으로 필화사건에 휘말릴 당시의 김지하

‘오적필화사건’ 당시 검찰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의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국외공산계열을 포함한다)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러한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도 같다”는 ‘찬양, 고무 등’에 관한 반공법 제4조의 위반 혐의로 김지하를 구속한다. 이에 대해 1974년 비상보통군법회의는, “‘오적’을 창작ㆍ교부하여 게재배포하게 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괴의 활동에 동조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는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했다(비상보통군법회의 74비보군형공 제14호). 그 후 이 사건과 민청학련사건은 병합돼 공판이 계속됐고, 1974년 7월 13일 서울형사지법은 김지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위 판결이 내려진 날로부터 약 36년 후인 2010년 11월, 김지하는 ‘민청학련사건’ 및 ‘오적필화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다며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2012년 10월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다. 2013년 5월 17일 이 사건 재심판결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 담시 ‘오적’은 당시 일부 부패한 권력층과 이를 적발해야 할 사정기관의 비리 등에 대하여 문학작품의 형식으로 비판적으로 풍자한 것이고, 특정 계층이나 개인에 대한 악의를 가지고 비방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부패를 보고 그에 대한 공분(公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며, 이러한 원고 본인의 창작 활동은 반국가단체로서의 북한에 동조하여 이롭게 한 것이 아니라 헌법상 보장된 예술과 표현의 자유의 본질적 영역에 속하는 정상적인 헌법상 기본권 행사로 보인다”고 판단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0재고합37). 그러나 재판부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서만 무죄판결을 내리고, 오적필화사건에 대해 징역 1년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 재심 사건에서 재판부는 “비록 같은 재심대상판결로 유죄가 인정된 담시 ‘오적’ 관련 공소사실에 대하여는 재심법원의 심리범위에 관한 법리상의 한계로 인해 그 유무죄의 판단은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 처벌의 무가치성에 기초하여 선택 가능한 형의 최하한에서 선고를 유예한다”고 하여 선고 유예의 사유를 밝히고 있다.

김지하는 이 유죄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형사9부(재판장 김주현 부장판사)는 2013년 5월 9일 풍자시 '오적'을 <사상계>에 실어 북한을 이롭게 한 혐의(반공법 위반)로 재심에서 징역 1월의 선고를 유예 받은 김지하의 항소를 기각했다(2013노256).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수 개의 범죄사실을 유죄로 인정해 하나의 형을 선고한 판결에서, 그 중 일부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재심청구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인정된 경우에는 판결 전부에 관해 재심개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재심사유가 없는 범죄사실을 재심사유가 있는 범죄사실과 함께 하나의 형을 선고했다는 우연한 사정으로 오적필화사건을 다시 심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리하여 결국 김지하의 담시 ‘오적’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하고 말았다.

4. 문학으로 법 읽기, 법으로 문학 읽기 1

▲ '오적'으로 필화사건에 휘말릴 당시의 김지하

‘오적’이 <사상계>에 발표된 것은 1970년이다. 하지만 이 시는 1960년대의 시대상을 ‘담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빌려 풍자하고 있다. 이 시가 발표되었을 때 필화사건과는 상관없이 시의 내용에 대해 찬반논쟁으로 뜨거웠다. 시인 이상로는 “(오적은) 침체된 문단에 활기를 넣은 작품”이라 평하면서 “이적행위는 ‘오적’이 아니라 ‘오적’으로 고발된 자들‘이라며 공화당정권의 부패상을 질책했다. 이에 반하여 어느 일간신문은 “우리도 할 말 있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 문제의 담시는 일종의 광가(狂歌), 광언(狂言)에 속하는 것이라 생각되며, 인인현자(仁人賢者)로서는 정면으로 상대할 것이라 못 된다고 여겨 진다”라며 혹평했다.

하지만 이 시의 내용에 대한 찬반논쟁을 떠나 ‘오적’의 시대적 배경이 된 ‘1960년대’에 주목해야 한다. 이 시기는 정치권력의 무능과 부패가 극심했고, 경제적 부의 독점과 정부의 각종 특혜를 받은 특정기업들이 독점재벌로 자리 잡았다. 이와는 상대적으로 도시의 확대와 팽창으로 농촌의 공동화가 심화됐고, 춘궁기로 대표되는 경제적 빈곤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또한 농촌에서 유입된 노동자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했고, 완전실업상태의 장기화로 빈부의 격차는 돌이킬 수 없는 사회병리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민중들의 점증하는 불만을 억압하고, 정치투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민혁명당사건’, ‘동백림사건’ 및 ‘통일혁명당사건’ 등 소위 ‘용공사건’을 조작했다. 이로써 군사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부정부패척결과 민주주의를 바라는 민중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어쩌면 김지하의 오적필화사건은 1972년 유신헌법체제를 통한 민중통제의 서막을 알리는 장송곡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김지하에 대한 비판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오적’을 통해 박정희정권의 유신헌법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한 그의 정신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김지하는 ‘오적’에서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생활과 감정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담시’라는 새로운 문학 형식을 채용하고 있다. 그가 ‘담시’를 만들어낸 것은 평소 그 자신의 꿈인 ‘판소리의 현대화’를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담시 ‘오적’을 비롯해 ‘똥바다’, ‘소리내역’ 등은 현대적 판소리로 창작돼 1980년대 국내외에서 160여 회에 걸쳐 공연됐다.

‘담(譚)’이란 ‘이야기’를 뜻한다. 그래서 ‘담시(譚詩)’란 곧 ‘이야기 시’가 된다. 담시의 특징에 대해 김지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판소리는 생명의 문학이다. 나의 담시, 그러니까 단형 판소리 역시 생명의 문법을 모토로 한다. 가락이 장단을 타거나 빠져나가는 중에 행간에 솟아나는 신명의 문법을 잘 살펴주기 바란다. 언어 밑에 흐르는 신명의 분류 없이, 언어가 퉁겨내는 광활한 여백의 울림 없이 시, 특히 생명의 시는 없다. 의미만 가지고 시를 따지는 관행은 이제쯤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김지하가 ‘판소리의 현대화’를 꾀하면서 굳이 ‘담시’라는 형식을 채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1960년대 김수영의 실천문학론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1970년대에는 민중문학으로 변모를 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따른 것이다. 그의 민중문학론의 요지는 시인의 비애와 민중의식의 자각만이 풍자되어서는 안되며, 억압의 주체가 되는 지배계층을 향한 풍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지하의 민중문학론은 그가 쓴 글 '풍자냐 자살이냐'(1970)와 강연 '민중문학의 형식문제'(1985)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김수영의 폭력 표현의 특징이 풍자의 방법 속에 자기 자신과 더불어 자기가 속한 계층에 대한 부정, 자학, 배도의 방향을 보여주면서 소시민적인 부정적 요소로 민중전체의 본질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면적 적대적인 매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분적인 매도의 방법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억압의 주체인 지배계층을 향한 민중의 의식형태를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풍자를 담은 판소리라는 것이다. 아래에 그가 주장하는 요지를 인용한다.

“풍자의 방향은 민중적인 것, 민중의 증오의 방향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력한 민중적 자기 긍정에 토대를 둔 비판이요, 폭로 규탄이어야 한다. 결코 그것은 민중 자체를 매도하는 시적 폭력 표현으로 될 수가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민중적인 소수 집단에 대한 폭력의 표현인 것이다.

(...)

민중의 삶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문체, 민중의 삶이 그 형성 주체가 되는 새로운 형식, 양식, 새로운 장르의 창조가 요구됩니다. 동시에 기존 장르의 새로운 방향으로의 변용, 변혁, 재활성화가 요구됩니다. (...) 시장판에 나타나는 다성적인 구조의 탈중심화라는 미학적 방법을 새로운 방향에서 어떻게 확대, 활용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인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시도들은 민중의 집단적 사명, 즉 민중적 삶의 생명 에너지의 고양된 충족이라는 민중 미의식의 핵심, 민중의 미학적 견해의 핵심에 의해서 통어되고 확대되고 창조되고 비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중심적 전체로서의 활동하는 자유를 핵으로 하는 민중문학의 형식문제의 한 해결 방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글에 따르면, 김지하는 '시장판에 나타나는 다성적인 구조의 탈중심화라는 미학적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의 결과 “민중의 집단적 사명, 즉 민중적 삶의 생명 에너지의 고양된 충족이라는 민중 미의식의 핵심, 민중의 미학적 견해의 핵심에 의해서 통어되고 확대되고 창조되고 비판되”는 민중문학의 형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담시’를 선택했다. 요컨대 새로운 시의 형식(장르)에 대하여 김지하는 ‘오적’을 비롯한 자신이 쓴 여러 시를 ‘담시’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김지하가 채용한 담시를 어떠한 문학형태로 보고, 그 의미는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즉, 연구자들은 김지하가 채용한 담시의 명칭을 다양하게 부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염무웅은 판소리의 계승으로 보고, 고현철은 ‘판소리시’, 오세영은 ‘단편 판소리’, 정끝별은 ‘혼성모방적인 패러디’, 진순애는 ‘판소리계 담시’ 등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담시는 김지하가 처음으로 채용한 문학형태 또는 창작기법이 아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오적’은 기존의 판소리를 ‘패러디’한 것이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패러디란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런 작품”을 말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패러디적 글쓰기는 유희적 성격의 글쓰기로서 다른 텍스트의 진지한 의도, 말씨, 목소리를 조롱거리로 삼는다. 그 결과 패러디는 엄숙한 것을 희화화하고 기품과 품격을 비속화시키기도 한다.

패러디의 관점에서 담시 ‘오적’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고현철은 ‘오적’을 “과거의 특정한 문학 작품이나 장르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것의 은유적 각색을 환유적 전통에 삽입시키는 문학적 전략”인 ‘장르 패러디’로 보았다. 또 송영순도 위의 글 “풍자냐 자살이냐”에 담긴 김지하의 창작법은 패러디라고 본다. 김지하는 ‘오적’ 이후 ‘蜚語(비어)’, ‘五行(오행)’, ‘櫻賊歌(앵적가)’, ‘아주까리 神風(신풍)’, ‘똥바다’, ‘김흔들 이야기’, ‘고무장화’ 등 판소리를 패러디한 작품을 발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오적’은 패러디로 보아야 한다. 송영순은 김지하가 판소리를 패러디한 담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김지하가 판소리를 패러디한 담시를 선택한 것은 70년대의 유신독재로 말미암아 이 땅의 근본이면인 자유민주주의체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역사의 수난기를 동인 및 배경으로 하여 박정권의 폭력정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문학적 전략 전술로서 서사시양식을 택했으며, 그 공격무기로서 민족문학의 오랜 전통인 민담류의 풍자정신, 즉 풍자와 해학을 활용한 것이다. 그의 풍자는 민중의 오랜 전통 시가문학에서 찾아 형식적으론 전통적인 판소리에서, 내용면에서 현실을 비판한 풍자정신을 담은 민중의 실천적 참여를 담은 민중문학의 전범을 마련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기존의 시창작 방법에 새로운 도전이면서 창작 마당극의 연희성까지 염두에 두고 창작한 것은 장르경계의 모호함, 퍼포먼스, 탈정전, 탈중심 등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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