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계단 오르기]첫 번째 계단 - 시인 조연희, 詩의 사생활 12

빈 자리

입대한 오빠의 빈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엄마와 난 배추김치를 쭉쭉 찢어먹다 왈칵 목이 메었고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만 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신발장에서 오빠의 철 지난 신발을 발견하거나 고스란히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장롱에서 곰팡내를 풍길 때, 엄마와 난 다시 한 번 오빠의 빈 자리를 더듬거려야 했다. 오빠는 그렇게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서성이다 이따금 엎질러진 커피처럼 식탁을 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우린 살아야 했으므로 난 간판도 없는 슈퍼에서 막걸리를 샀고, 언니는 나팔꽃이 무단으로 기둥을 점거한 야매 미장원에서 나팔꽃 넝쿨처럼 돌돌 말린 파마를 했다. 먹을 사람도 없는데 엄마는 집 앞 공터에 씨를 뿌리고 상추며 고추 모종 따위를 심었다. 엄마의 밭은 누가 봐도 초라했다. 자갈투성이였으며 잡초가 무성했다. 하지만 엄마는 남긴 음식을 모아 썩힌 후 거름으로 주는 등 정성을 다했다. 그 무허가 밭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조금이라도 밭을 훼손하면 삿대질도 서슴지 않았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뱉어댔다. 엄마는 그렇게라도 해서 뿌리 내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허가 밭의 수확물인 우리는 태생적으로 무허가 꿈을 꾸게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엄마는 말뚝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도근점이었다.

한 겹 두 겹 소용돌이치던 엄마의 도면 속엔

5만분의 1로 축소된 아버지가 있었고

6000분의 1로 축소된 고향 우물이 들어 있었다.

구부러진 시냇물 한 줄기

어쩌다 담장 밖을 흘러가곤 했지만

오빠와 나는 동숭동 127번지

엄마의 변치 않는 기준점이었으므로

말뚝 밖 견고한 사유지를

무단으로 꿈꾸기도 했다.

걸핏하면 경계를 넘어오던

쑥부쟁이며 엉겅퀴들

말뚝이 자라 어느새 울타리가 되었지만

영원히 측량할 수 없는 아버지

끝내 한 필지, 두 필지

아픈 경계를 이루기도 했던 낡은 지적도

좁은 앞마당으로 측량원점 같은 달이 뜨면

나는 무수한 측량점을 헤아려보며

새 지적도를 꿈꾸고는 했다.

-졸시 ‘어떤 지적도’ 전문

 

엄마, 위탁모가 되다

이곳에서 엄마는 위탁모 일을 새로 시작했다. 마치 무허가 텃밭에 상추며 고추 모종을 돌보듯 미혼모의 아기들을 돌봤다. 돌이켜보면 엄마의 인생이야말로 ‘무허가’가 아니었던가. 아버지의 호적에 숨어 있던 엄마가 미혼모의 아이들을 키우게 된 것이야말로 운명이 아니었을까.

‘홀트아동복지회’는 홀트라 불리는 할머니가 한국전쟁 당시 8명의 한국 전쟁고아를 입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주로 해외입양을 주선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해외입양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여자아기는 그래도 괜찮은데 사내아기는 국내입양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핏줄에 대한 고정관념이 국내입양을 몹시 까다롭게 했으리라. 아무튼 엄마는 바로 그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위탁모 일을 시작했다. 양부모가 생기기 전까지 아이를 돌봐주는 일이었다. 짧게는 1개월, 길게는 1년도 넘게 돌본 아기도 있었다.

대부분 미혼모의 아기들이었다. 부모가 이혼해서 온 아기. 심한 경우 미성년의 아기도 있었다. 임신한 줄도 모르고 지내다 화장실에서 낳았다는 아기. 임신 막달까지 배를 꽁꽁 싸매고 있다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할 만큼 체중미달로 나온 아기도 있었다. 

엄마가 처음 위탁받은 아기는 사내아기였다. 대학생인 엄마가 어떻게든 아기를 키워보려 했지만 결국 복지회에 맡겼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사실 위탁모에게 생모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되어서 사실을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아기가 뽀얗고 귀티 나는 게 아마도 생모의 손길을 탔을 것으로 추측해 볼 밖에.

아기의 출현은 오빠의 부재로 우물 속 같이 침잠해 있던 집안 공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이제 막 뒤집기를 시작했으며 배를 밀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모습에 우리 식구는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보드라운 속살과 달달한 분유 냄새. 딸랑이를 흔들어주면 유난히 까르르 웃곤 하는 아기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입 안 가득 고였다. 나는 아기가 보고 싶어 집 100미터 전부터 아기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는 했다.

엄마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들통에 젖병을 둥그렇게 세워 펄펄 끓여 매일 소독했고 하얀 기저귀들을 빨아 공터 햇빛 바른 곳에 말렸다. 그 하얀 기저귀들이 국수발처럼 길게 늘어져 흔들릴 때, 햇빛도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엄마는 하얀 쌀을 갈아 미음처럼 푹푹 끓였다. 그리고 그 걸쭉한 미음을 체에 쳐 맑게 걸러냈다. 그런 후 분유를 타서 다시 한 번 끓여 아기에게 먹였다. 유독 엄마가 키운 아기들이 토실토실했던 것은 그 하얀 쌀가루 덕분이 아니었을까. 홀트아동복지회에서는 나름 지침이 있었고 탁아에 대한 교육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시간 맞춰 우유를 주라는 말도 무시하고 아기가 울면 젖병부터 물렸다. 엄마는 정말 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한 달에 한 번 엄마는 아기를 업고 홀트아동복지회에 갔다. 아기 정기검진을 하고 한 달 먹을 분유를 타오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날 약간의 보수도 받았다. 아이를 업은 엄마가 깡통분유가 가득 든 가방을 팔이 늘어져라 들고 오면 난 버스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 무거운 분유가방을 받았다. 아기는 엄마 등에서 얼마나 얼굴을 비벼댔는지 볼이 발개져 있고는 했다. 나는 무거운 엄마의 분유가방을 들고 아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산동네를 올랐다. 그 비탈진 길을 쉬었다가 다시 오르고 쉬었다가 다시 오르고는 했는데, 그 숨넘어가던 오르막이 평화의 한 모습이었음을 그날 밤 불현듯 깨닫게 된다.

 

그 놈의 ‘꿀’ 때문에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집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성격이 급해 비탈길도 늘 뛰어서 오르내렸다. 식사도 규칙적인 속도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집에 들어와 저녁식사를 하고 한두 시간 아기와 함께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였다. 아기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표현은 끝없이 뭔가 먹을 걸 준다는 점이었다. 이눔 봐라, 하면서 배부른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고 또 이유식 남은 걸 먹였다. 아기가 받아먹는 모습이 뭐가 그리 우습다고, 혼자 너털웃음을 웃기도 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쿠사리’를 들으면서도, 들은 척도 안하는 우리에게도 계속 이눔 봐라, 하면서 아기에게 뭔가를 먹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기가 ‘홀트아동복지회’에 다녀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우유를 다 토한 채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렇게 순한 아기의 볼이 여전히 상기된 걸 보면 열이 오른 것도 같았다. 그런 아기에게 아버지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꿀을 먹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꿀에 대해 맹신하는 편이었다. 꿀이야말로 신이 내린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썩지 않는 유일한 음식이라나. 그래서 아버지 머리맡에는 늘 꿀이 있었다. 눈을 뜨면 아버지는 제일 먼저 꿀 한 숟가락을 드셨다.

그렇게 가장 아끼는 꿀을 아버지는 아파보이는 아기에게 선사한 것이었다. 달달한 꿀이 입술을 적시자 아기도 아마 열심히 빨아먹었을 것이고 아기가 맛있게 먹자 아버지는 또 한 수저를 넣어 주었을 것이다. 아- 어른도 빈속에 꿀을 과하게 먹으면 속이 너무 아려 뒤집어질 텐데…. 아버지가 ‘영아 보툴리즘’이란 병을 알 리가 없었겠지만…. 아기의 장이 아직 미성숙해 박테리아를 이겨낼 수 없다고 하는데…. 

결국 그날 밤 사단이 나고 말았다. 아기는 숨을 점점 거칠게 내쉬었고 손발이 마비가 되듯 뻣뻣해졌으며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는 듯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엄마는 아기를 들쳐 엎고 난 기저귀 가방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골목은 어두웠다. 산동네 판자촌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얽기설기 이어져 있었다. 한참 아래로 내려와 겨우 택시를 잡았다. ‘홀트아동복지회’의 협력병원인 연대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렸다. 아기의 거친 숨소리에 내 심장박동도 거칠어졌다. 차창으로 엄마의 하얀 얼굴이 검게 비춰졌다. 마치 엄마 밭의 무허가 공터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한 어둠이 차창 밖에서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조연희 시인은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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