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진보대통합 연대회의 부대표의 '패권주의'에 대한 반론

김창현 진보대통합연대회의 부대표가 <현장언론 민플러스>에 기고한 "성찰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 연재에 대해 윤현식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이 반론을 보내왔다. 이번주 기고는 김 부대표가 연재 2편 '쉽지 않은 당내민주주의 그리고 패권주의'에서 밝힌 패권주의의 본질과 극복방안에 대한 또다른 시각에 관한 내용이다. [편집자 주]

김창현 진보대통합연대회의 부대표(이하 김 부대표)의 두 번째 기고글의 주제는 ‘당내 민주주의와 패권주의’였다. 이러한 반성과 성찰이 제출된 점을 높이 산다. ‘패권주의’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긴다. 쓴 맛 나는 과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패권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경계가 여전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김 부대표의 반성과 성찰은 그러한 의미에서 잘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그의 반성과 성찰의 내용상에서 미진한 부분을 짚어보고자 한다.

김 부대표는 “민중의 이익과 정파의 이익이 부닥칠 때 정파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 바로 이것이” 패권주의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은 패권주의의 작동을 민주주의의 작동원리와는 별개로 책임윤리의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정파의 이익은 경험의 범위지만 민중의 이익은 추상의 영역이다. 진보좌파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민중의 이익은 불변의 지향이자 가치이지만, 실제 민중이 진보좌파의 그러한 자임을 승인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공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따라서 패권주의를 윤리적 차원에서 검토하게 되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

▲ 사진출처: 노동당 홈페이지

패권주의를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게 되면 어떻게 논리가 흘러가는지를 김 부대표의 글을 통해 확인해 보자. 김 부대표가 패권주의의 작동을 윤리적 차원에서 들여다봄에 따라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 있다. 다수파의 윤리적 책임이 끊임없이 거론되는 것이다. 물론 김 부대표는 다수파의 미덕만으로는 패권주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제도가 다수파의 책임윤리를 전제로 하는 한, 제도 작동의 결과는 여전히 다수파의 윤리적 책임감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김 부대표는 정파의 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잘 조직된 정파일수록 민중의 이익, 민심의 흐름을 모든 실천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조직의 이익과 결정을 우선시하고 심지어 절대화하여 이에 반하는 결정을 대중추수주의라는 단어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논지는 진보를 추구하는 정파가 가져야 할 태도로서는 훌륭하지만, 정파 자체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정파는 무엇보다도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전망과 실천노선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민중의 이익에 복무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정파는 자기정립을 위해 타 정파와의 끝없는 대립과 타협을 반복한다. 이 과정이 바로 정치다.

김 부대표의 글 한 부분을 더 보자.

‘숫자의 정치’가 거듭되면 세력과 세력 사이에 대립이 형성되고 이를 둘러싼 이합집산이 횡행하며 그렇게 되면 단결을 실현해야 할 활동가들이 다수의 패권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동원된다. 이를 당원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포장하는 짓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패권의 작동을 당원 민주주의와 등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당위적인 결론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대립의 형성과 이합집산과 패권관철을 위한 활동가 동원의 문제는 당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숫자의 정치’가 원래 정치의 본질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정치는 애초부터 숫자 싸움이다.

이 부분을 김 부대표 또한 정확하게 알고 있다. 진보좌파정치세력의 연대 연합이 왜 필요한지에 대하여 그가 설파하는 다음의 말은 중요하다.

우리의 단결은 일시적 제휴나 전술적 연대가 아니라 권력을 함께 쥐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전략적 연대이다. 이것은 … 각계 각층 민중의 단결을 실현하고 사상과 노선을 달리하는 광범위한 진보세력의 연대 연합을 통해 지배세력에 대한 진보운동세력의 압도적 우위를 보장하기 위한 우리 진보운동의 전략노선이다.

김 부대표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 우리의 운동 또한 숫자를 목표로 하는 정치다. 진보좌파정치세력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숫자’를 확장하듯이, 그 내부에서 역시 개별 정파조직 간 ‘숫자’를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며 보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각개약진을 방치하는 수준에서 주장되는 진보다원주의가 아닌 연대연합의 틀 안에서 각자의 활동이 보장되는 다원주의가 필요하다. 그 다원주의의 내용에는 각 조직의 ‘숫자의 정치’를 보장할 수 있을 것조차도 포함되어야 한다.

김 부대표가 패권주의를 윤리적인 차원에서 검토하다보니 이처럼 정치 본연의 원리와 패권주의의 본질이 계속 엉클어진다. 이 혼란은 김 부대표가 글의 서두에 언급한 2000년 4·13 총선의 기억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는 당시의 사례를 회고하면서, 본인이 놓치고 있었던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장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은 전국 최초의 노동자 국회의원을 스스로 만들고 싶어 했던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런 민심 앞에 상대적으로 누가 더 진보적이고 누가 개량적인가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기준이었다.

이 판단은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노동자 민중이 “최초의 노동자 국회의원을 스스로 만들”기를 간절히 바란 건 그 노동자 국회의원이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김 부대표가 거론하는 저 ‘기준’은 노동자 민중의 기준이기도 하다. 실질적으로 김 부대표가 문제로 지적하는 ‘기준’과 노동자 민중의 ‘간절한 바람’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문제는 노동자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조직적 결정이 아니라 그 결정을 만들어내는 절차에 있었다.

김 부대표는 “절차상 하자가 없는 것은 분명하였다”고 회상하지만, 실은 그 절차 자체가 패권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절차였다. 당의 입장과 현장조직의 요청이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미비 혹은 왜곡의 문제를 정치조직이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책임윤리적 차원의 문제로 전환하면 안 된다.

따라서 패권주의는 민주주의의 작동양식과 결부하여 논의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패권주의’의 상관관계를 검토할 때야 실천적 대안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 나는 김 부대표와는 달리 패권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패권주의라 함은, 승자가 영원한 승자로 남기 위해 패자를 영원한 패자로 남기려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하게 되면, 패권주의는 민주주의의 작동 양식 안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된다. 패권주의는 결국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 즉 소수파를 보호·보장하고 그들에게 다수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원리를 소거하는 것이다. 패권주의와 유사한 것이 뒷골목에서 작동하는 힘의 논리다. “다시는 쳐다보지도 못하게 밟아라!” 얻어맞는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할 만하지만 강자의 입장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강자에게 필요한 건 내 발밑에 있는 자가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놓는 것뿐이다. 정치조직에서 발생하는 패권주의의 작동 역시 이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전형적인 민주주의의 파괴행위이다.

이 전제를 벗어날 경우 어떻게 논리가 흘러가는지를 김 부대표의 글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패권주의의 극복을 위한 출구가 강자의 책임윤리로 전환된다면 이후 제도적 논의는 형식론으로 전락한다. 책임윤리 없는 강자는 줄기차게 이 제도를 패권의 작동에 유리하게 바꾸려 노력할 것이며, 기왕에 패권을 가진 쪽에서는 제도의 변경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양보의 미덕으로 문제를 풀겠다”는 방식을 비판하면서 패권주의에 대하여 “아예 유혹조차 가질 수 없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김 부대표의 주장은 명확하게 민주주의의 원리를 전제할 때 실현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 부대표는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중요 사안에 대한 숙의 토론제, 소수파의 일정한 비토권 보장, 지도부와 공직후보 선출에서 소수파에 대한 제도적 배려

바람직한 대안이다. 이러한 대안들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한다. 정파등록제, 정책명부비례대표제와 같은 제도도 고려할만하다. 당직공직 후보의 청문제도나 당원소환제, 탄핵제도 등을 정비하는 것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러한 제도적 장치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에 충실할 때에야 소정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다수파의 책임윤리로 회귀하는 논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윤리와 원리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시간이 없다.

윤현식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

전) 노동당 정책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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