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신냉전 구축과 특징, 그리고 한반도

2022년 들어와 신냉전은 본격화되었고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고, 미국은 나토와 아시아 동맹국들을 묶어 대러, 대중 연합전선을 공고화했다. 미국을 한축으로 하고, 중러를 또 다른 축으로 하는 대결전선이 공식화된 것이다. 신냉전은 그렇게 본격화되었다.

8월 초 중국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했다. 군사적 충돌로 비화되지는 않았으나, 펠로시를 태운 비행기가 대만을 향하던 8월 2일 밤, 미중 양측의 군사력이 대만 인근에 집중되었다. 펠로시 방문 이후 중국은 꽤 여러 날 동안 대만 포위 사격 훈련을 전개했다. 대만 역시 이에 반발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중국에서 띄운 것으로 보이는 드론을 대만군이 격추하기도 했다.

미국은 대만에 무기 판매를 시도하고 있다. 중국의 대만 정책은 더욱 강경해질 것이다. 펠로시의 대만 방문 노림수가 그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만은 점차 우크라이나화되어 가고 있다. 신냉전은 이렇게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우리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다.

신냉전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오고 있지만 신냉전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빈약한 수준이다. 신냉전을 단지 냉전의 새로운 버전으로 이해하고, 러시아와 중국의 권위주의적 행태와 호전성을 신냉전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신냉전에 대한 인식은 한반도 정세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현재 조성되고 있는 북미 대결 상황을 단지 과거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대결로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신냉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연동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반도는 강대국간 대결과 전쟁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강대국간 대결이 신냉전으로 격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는 또다시 신냉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특히 한반도에서 자주와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신냉전을 과학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의 네 가지 장면

강대국간 전쟁이 없었던 냉전의 경험은 신냉전에 대한 착시를 가져올 수 있다. 즉 신냉전에서도 강대국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그것이다. 신냉전적 대결을 펼치고 있는 미중러 3국 모두 지구를 몇십번은 쪼개고도 남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현실은 이같은 낙관론을 더욱 단단하게 한다.

그러나 냉전의 경험은 좀 더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과연 핵무기가 강대국간 전쟁을 억지했는가? 부분적으론 맞고, 부분적으로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즉 강대국간 핵전쟁은 다른 요인에 의해 일어나지 않은 측면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냉전 시대의 몇 가지 장면을 살펴보자.

첫째 장면은 베를린 봉쇄이다. 1948년 베를린 봉쇄는 흔히들 냉전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소련의 호전성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베를린 봉쇄는 독일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네 나라의 연합국공동관리위원회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미영프 세 나라가 자신들의 독일 점령지역(즉 서독 지역)에서 단일 경제화폐를 일방적으로 추진한 데 따른 소련의 반발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단행하자 서베를린에 있는 연합국측 독일인들에게 생필품을 제공하는 베를린 공수작전을 시작했다. 베를린 봉쇄 11개월 동안 하루 평균 3차례 공수가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수송기가 동원되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국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90대의 B-29폭격기를 영국에 배치하기까지 했다. 군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은 15개월 뒤인 1949년 5월 베를린 봉쇄를 해제했다.

▲ 1948년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서 미 수송기 C-54를 지켜보는 서베를린 시민들[사진:United States Air Force Historical Research Agency]
▲ 1948년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서 미 수송기 C-54를 지켜보는 서베를린 시민들[사진:United States Air Force Historical Research Agency]

둘째 장면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이다. 장개석의 국민당정부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국공내전은 1947년 중후반으로 가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시아 파트너였던 국민당정부가 대만으로 쫓겨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 정책 추진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해야 했고, 일본이 선택되었다. 미국은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풀어주고, 일본에서의 권력을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을 패전국이 아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미국의 냉전 정책 파트너로 삼기 위한 미국의 기획이었다. 소련은 비록 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셋째 장면은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1959년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공식화했다. 소련은 터키, 그리스 등에서 미국이 자신을 향해 배치하고 있던 미사일에 대응하는 차원으로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는 비밀 작전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정찰기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포착하게 되었고, 미사일 부품을 실은 소련의 상선을 카리브해에서 저지하고, 경우에 따라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카리브해에서 소련의 상선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날뻔한 아찔한 순간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결국 소련은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을 취소한다. 미국의 군사력 시위에 소련이 정책을 변경한 것이다. 이같은 결과에 쿠바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소련은 미국과의 협상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넷째 장면은 미중 관계 정상화이다. 1970년대는 미중 데탕트의 시대였다. 중국은 소련을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하고 소련의 위협에 맞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선택한 것이다. 미국 역시 반소 전선을 강화하는데서 중국과의 협력을 중요한 요소로 보고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착수했다.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 평화공존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정도로 반제국주의, 반미노선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소 국경분쟁과 이념분쟁을 겪으면서 소련을 중국의 최대 위협국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결국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로 했다. 1970년대 중국은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그에 기초해(혹은 그것을 활용해) 소련을 견제하는 대외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냉전시기 소련은 미국과 체제경쟁, 핵군비경쟁을 진행했지만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도전하는 적극적인 군사정책은 추진하지 않았다. 중국 역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인정하고 미국과의 협력을 선택했다. 단지 핵무기가 전쟁을 막은 것이 아니라 소련도, 중국도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했던 것이다. 따라서 냉전은 미국의 주도적 대소정책과 소련(중국도 포함)의 수세적 대미정책을 특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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